주간동아 640

2008.06.17

삼촌팬들 “소녀시대가 내 맘 훔쳐갔다”

온라인 커뮤니티 상당수가 30, 40대 남성 음반 구입·공연 등 가요시장 新소비층으로 등장

  •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입력2008-06-09 17: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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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촌팬들 “소녀시대가 내 맘 훔쳐갔다”
    “사랑하는 윤아의 생일 축하합니다~.” 5월30일 서울 강남의 모처에 모인 30여 명의 남성들은 주인 없는 생일 케이크를 둘러싸고 ‘우렁차게’ 노래를 부른 뒤 ‘쑥스럽게’ 촛불을 껐다. 이날은 9인조 여성 아이돌그룹 ‘소녀시대’ 멤버 윤아의 생일이자, 소녀시대의 데뷔 300일째 날.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모두 인터넷 사이트 DVD PRIME 내 커뮤니티인 ‘소시당’(dp.sosi.kr) 회원들이다. ‘소녀시대당’의 줄임말인 소시당에는 현재 500명 남짓한 소녀시대 팬이 가입해 있다. 그중 약 30%(운영진 추정)는 30대 이상 남성 회원. 특히 활동이 활발한 10여 명의 운영진급(총재, 부총재, 정책위원장 등)은 모두 남성이며 이들의 평균나이는 약 33세다. 이들 ‘삼촌팬’ 회원은 따로 오프라인 친목모임을 갖고, 멤버들의 생일이나 기념일 혹은 가까운 곳에서의 공연(공개방송, 축하공연)에 함께 찾아가기도 한다.

    한눈에 반해 ‘팬질’ 첫 경험자 대부분

    회사원 김모 씨(30) 역시 소시당의 진성당원 중 한 명이다. 소시당에서 ‘홍보1국 대리’직을 맡고 있는 그는 소녀시대 중에서도 리더인 태연의 팬이다. 그의 아이디도 ‘밝은탱’(탱은 태연의 애칭으로, 소시당원 중 태연의 팬들은 ‘폴탱’ ‘러브탱’ ‘밝은탱’식으로 탱자 돌림 아이디 사용자가 많다). 태연이 DJ를 맡고 있는 10대 대상 라디오 프로그램 청취 2시간을 비롯해 소녀시대 관련 영상물 제작과 시청, 커뮤니티 게시판에 글 올리기 등 하루 평균 3~4시간을 소녀시대를 위해 투자한다.

    소녀시대에 대해 “예쁜 딸을 키우는 것처럼 볼수록 뿌듯하다” “덩달아 해맑아지는 것 같다”고 표현한 그는 소시당 게시판에서 소녀시대 9명의 멤버를 등장인물로 한 ‘팬픽’(좋아하는 스타를 주인공으로 한 픽션)을 쓰기도 했다. ‘알프레드 발탱 연대기’라는 그의 팬픽은 조만간 출간을 앞두고 있다. 300쪽이 넘는 이 소설에는 김씨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발탱이란 인물이 9명 소녀를 돕는 집사로 등장한다. 딱히 자극적이거나 야한 내용이 없는, 명랑순정 만화 분위기의 이 소설은 특히 소시당 남성당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는 “출간될 책의 인세 일부를 소녀시대 이름으로 유니세프에 기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좋아하는 것은 부끄러워할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팬으로서 상식적인 선은 지켜야죠.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면 좋고요. 제가 좋아서 ‘팬질’을 하고 글을 쓰는 거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좀더 어른스럽고 의미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유니세프 기부를 생각했습니다.”(김모 씨)



    1980년대 후반부터 끊임없이 다양한 아이돌 스타들을 좋아하며 팬덤문화를 형성해온 ‘이모팬’들과 달리 삼촌팬 중에는 ‘첫 경험’자가 많다. 이들은 모두 “30줄에 들어선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이라기엔 너무도 완벽한 피사체의 소녀들이 TV에 나와 뛰어난 안무와 가창력, 세련된 무대 매너를 보이는 것에 반했”지만, “나이가 부끄러워” 팬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고 “평상시엔 ‘일코’(아이돌 팬이 아닌 일반인인 양 코스프레 한다는 뜻)를 한다”고 말한다.

    특히 30대 후반이나 40대 팬 중에는 “어렵게 용기를 내 CD를 구입하고도 차마 브로마이드를 달라는 말은 못하고 돌아섰다”거나 “아내가 버린 브로마이드를 몰래 가져와 다리미로 다렸다” “(스타의) 사진을 아내 몰래 프린트해서 업무책 깊숙한 곳에 넣어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소시당의 ‘총재’직을 맡고 있는 윤기열(31) 씨는 “각 글의 조회수가 회원수의 배가 넘는 것으로 봐서 가입을 하지 않고 이른바 ‘눈팅’만 하는 숨어 있는 팬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적당한 거리감 오프라인 접근엔 아직 소극적

    삼촌팬들 “소녀시대가 내 맘 훔쳐갔다”
    하지만 팬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삼촌팬의 숫자는 눈에 띄게 늘고 있다. 휴대전화 벨소리와 통화연결음, 컴퓨터와 휴대전화 바탕화면으로 좋아하는 소녀스타들의 노래와 사진을 올리는 삼촌팬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지난해 ‘텔미’ 열풍을 일으킨 JYP엔터테인먼트의 ‘원더걸스’가 그 ‘커밍아웃’의 시작이었다면, 아이돌 그룹 제조기로 잘 알려진 SM엔터테인먼트의 소녀시대를 통해 꿈틀거리는 ‘삼촌 팬덤문화’를 감지할 수 있다.

    실제로 소녀시대는 처음부터 “10대 중심 아이돌을 벗어나 좀더 넓은 팬층을 아우를 수 있는 그룹”을 목적으로 기획, 준비된 그룹이다. SM엔터테인먼트 김형국 대리는 “(소녀시대의 경우) 공식 팬클럽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30대 이상 삼촌팬이 20~30%는 되는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JYP엔터테인먼트의 홍보담당자 역시 “현재의 원더걸스 음반판매량은 10대 팬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면서 “30, 40대 삼촌팬의 구매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선착순 100명으로 제한되는 원더걸스 사인회에 30, 40대 남성팬들의 모습이 보이고, (원더걸스) 멤버들의 생일에 한약을 보내오는 한의사를 비롯해 적지 않은 가격대의 선물을 보내는 30대 이상 남성팬이 많다. 회사가 운영하는 공식 팬클럽에 (30, 40대가) 소속되지 않아서 통계에 잡히지는 않지만 삼촌팬 수가 늘고 있는 것은 실감한다”고 말했다.

    이 ‘비밀스러운’ 삼촌팬들은 때로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가 광고하는 상품의 ‘적극적인’ 소비자가 되기도 한다. 6월부터 소녀시대 멤버들의 브로마이드를 제공하는 모 치킨업체는 “6월의 경우 전달에 비해 매출이 30% 정도 상승했다”고 전한다. 이 업체 관계자는 “소녀시대 브로마이드에 대한 문의를 하는 이들이 많다”면서 “매출 증가에는 조류인플루엔자(AI)에 대한 공포가 줄어든 덕도 있지만 소녀시대 홍보효과도 컸다”고 덧붙였다. 마우스패드 등을 사은품으로 제공하는 의류업체들 역시 마찬가지다.

    삼촌팬들 “소녀시대가 내 맘 훔쳐갔다”

    오프라인 모임을 갖는 소시당원들(위), 소시당에서 자체 제작한 달력과 휴대전화 줄.

    첫사랑 순정이냐 위로받는 대상이냐

    “드디어 저도 ○○치킨 브로마이드 입수했습니다. 혼자 살고 있는데 브로마이드 3종 세트 모으려면 3마리를 시켜먹어야죠. 주변에서는 세 번에 걸쳐 천천히 시켜먹으라고 한가한 소리를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브로마이드 물량이 떨어질까봐 불안합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회사 사무실에서 3마리를 시켰답니다. ㅎㅎ (중략)”(소시당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글 중에서)

    “얼마 전에는 커뮤니티의 오프라인 정모 후 소녀시대가 광고하는 모 의류 가게에 남자 5명이 갔어요. 가서 셔츠를 사는데 노란색 하늘색 분홍색이 아니라 ‘너는 윤아색(윤아가 입은 셔츠색)’ ‘너는 (티)파니색’, 뭐 이렇게 얘기하면서 서로 골라줬죠.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렇게 말해도 다들 알아듣는다는 거예요.(웃음) 그렇다고 저희 상태가 심각한 건 아니고, 일종의 이벤트처럼 장난스레 즐기는 거죠.”(33세 대학연구원 삼촌팬, 아이디 ‘예맥나라’)

    물론 이들 삼촌팬의 소비력은 이모팬의 그것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삼촌팬 자신들도 이런 열광을 “덕후스럽다(오타쿠 같다)” “SM의 농노로 전락” 등 조롱조가 가미된 우스갯소리로 표현한다. 더불어 도를 넘는 열광이나 소비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편이다.

    삼촌부대의 활동무대나 활동방식 역시 이모부대들의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모부대가 스타를 만날 곳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니고 표현한다면 삼촌부대는 그와 같은 오프라인 접근에는 아직 소극적이다. 대신 이들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한다. 대중음악 평론가 김작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를 소재로 해 UCC 같은 영상물을 생산하고 공유하는 방식이 여성과 차이를 보인다”고 분석했다. 실제 많은 삼촌팬들은 온라인 팬 커뮤니티 활동을 하면서 영상편집 기술 등을 익히고, 그러한 기술력을 뽐내는 것을 즐긴다. 소시당의 경우 지난해 말 자신들이 만든 영상자료를 모아 영상회를 열기도 했다.

    대중문화 평론가 강명석 씨는 삼촌팬덤의 출현을 성과 나이에 대한 사회적 고정관념이 깨지고 있는 데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해석한다.

    “예전에는 나이 든 남성이 여자 가수를 좋아하면 부끄러운 분위기가 있었는데 이런 경향이 점차 사라지고 있죠. 남자답거나 철이 들었다는 기준이 바뀌고 있고, 그에 따라 자신의 취향에 대해 말하는 게 그들끼리는 부끄럽지 않은 것이 된 거죠.”(강명석 씨)

    하지만 여전히 어린 여자 연예인의 삼촌팬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 ‘롤리타 아니냐’식의 불편한 논쟁도 감수해야 하고, 무엇보다 아내나 여자친구의 이해를 얻는 것이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아내나 여자친구 몰래 ‘팬질’을 하는 이들이 다수다.

    “아내와 처음에는 갈등이 있었죠. 그래서 제가 당신이 젊은 남자연예인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감정이라고 설명했죠. 이제는 같이 노래를 즐기는 수준에 이르렀는데 가끔은 농담 섞인 질투를 해요.”(34세 회사원 삼촌팬, 아이디 ‘도연칭칭아빠’)

    “그냥 보기만 해도 예쁘고, 대견하고 귀엽고 그렇잖아요? 저는 이 아이들을 이성적인 대상으로 보진 않아요. 이제 겨우 스무 살인 애들과 답답해서 어떻게 사귀어요? 서너 살 이상만 차이 나도 힘들죠. 대화가 안 되니까.”(30세 연구원 삼촌팬 오모 씨)

    인터뷰 중 만난 소녀시대의 한 30대 삼촌팬은 “소년시절 좋아했던 첫사랑을 보는 감정을 느낀다”고 말했다. 실제로 특정 스타에게 열광하고 그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는 것은 말랑말랑한 감정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현실에서 순정을 갈구하기엔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린 나이’, 여전히 뭔가가 그립거들랑 TV에 등장하는 예쁘고 발랄한 아이돌을 대상으로 순정을 즐기는 것도 한 방법이다.

    “단란주점에 가거나 골프를 치는 대신 우리는 소녀시대를 좋아하는 거죠. ‘팬질’(적극적인 팬 활동)을 하며 퍽퍽한 삶에 위로를 얻는 겁니다.”(38세 자영업자 삼촌팬 유모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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