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16

2007.12.25

‘계몽과 도발’ 위해 책과 씨름한 40년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khhan21@hanmail.net

    입력2007-12-19 18: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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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몽과 도발’ 위해 책과 씨름한 40년

    <b>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b><br>오쓰카 노부카즈 지음/ 송태욱 옮김/ 한길사 펴냄/ 458쪽/ 2만원

    2002년의 일이다. 도쿄에서 동아시아 출판인들이 모여 출판 비즈니스의 미래를 토론하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그 자리에 일본 발표자로 나선 사람 중 하나가 당시 이와나미쇼텐의 사장인 오쓰카 노부카즈였다. 이와나미쇼텐은 일본 지식인의 젖줄과 같은 출판사다. 그는 중국의 한 대형서점 앞에서 서점이 문을 열기 30분 전, 마치 바겐세일하는 백화점 앞에 모인 인파처럼 사람들이 늘어선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릴 뻔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다음 날 기노쿠니야쇼텐 본점이 문을 열기 30분 전에 가보았는데 그 자리에는 나를 포함해 6명만이 서 있었다.

    40년을 편집자로 살아온 사람, 그것도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과 교유하며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오쓰카 노부카즈가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 ‘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는 분량이 458쪽이나 됐지만 나는 한자리에서 단숨에 읽었다. 수많은 인명과 책명이 나와 어렵게 보였지만 글은 잘 짜인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저자의 삶이 부러웠다. 어찌 그리 살 수 있을까?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 일본인의 정신적 지주로 평가받는 가와이 하야오, ‘반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천재’로 꼽히는 문화인류학자 야마구치 마사오, 일본 고도성장기 이후의 격동하는 사상계에서 가장 세밀하게, 그리고 풍부하고 착실하게 사상을 전개한 철학자 나카무라 유지로 등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 할 수많은 저자들과 정신적 동지처럼 지낼 수 있었다니 말이다.

    햇병아리 편집자 시절에 계몽과 도발의 정신을 일깨워준 하야시 다쓰오 같은 스승이자 선배 편집자를 두었다는 것도 부러웠다. “인류의 유산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한편으론 끊임없이 아마추어로 경쾌한 발놀림을 유지하고 싶다”며 “인류의 문화란 인류사에서의 위치 부여나 말 그대로 글로벌한 시점을 교차시킨 지점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판단했다”는 하야시 다쓰오는 단순한 편집자가 아니라 인간의 본래 모습에 대한 탐구자이자 사상가라 할 수 있다. 그런 스승의 가르침을 40년 동안 지켜온 저자 또한 이미 스승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출판 일이란 뛰어난 인간의 지식과 지혜의 창출에 가담하고 아울러 그것들을 유지해 다음 세대로 계승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편집자의 일은 새로운 사고방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류가 지금까지 축적해온 것의 총체를 알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무엇이 진짜 새로운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고도 말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오쓰카 노부카즈는 대단한 편집자였다.



    나는 오쓰카 노부카즈 말고도 ‘40년 편집자’를 지낸 일본인을 두 사람 더 알고 있다. 한 사람은 일본 최대 출판사인 고단샤에서 편집자로 정년퇴직한 뒤 대학에서 3년간 출판론을 강의하며 ‘편집이란 어떤 일인가’라는 책을 펴낸 와시오 겐야다. 다른 한 사람은 지금은 종간(終刊)된 출판전문 계간지 ‘책과 컴퓨터’의 총괄 편집장을 지낸 쓰노 가이타로다. 두 사람과는 여러 차례 술자리를 했는데 그들의 유연한 사고는 늘 나를 압도했다. 그들은 지금도 출판 현장이나 대학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며 많은 글을 발표하고 있다. 오쓰카 노부카즈도 쓰쿠바전통민가연구회 대표, 사회복지법인 일본점자도서관 이사장, 동아시아출판인회의 이사 등으로 여전히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퇴직 편집자’를 이렇듯 다양하게 활용하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부럽기만 하다. 편집자의 정년은 38세라는 속설마저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40대 편집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 서글픈 생각도 들었다. 유토피아를 찾으려 했던 그의 40년 궤적이 부러움과 동시에 앞으로 그 같은 편집자가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패전 후 처음으로 출판계가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곤두박질하는, 소름 끼치는 시기에 이와나미쇼텐의 사장을 지냈다. 한때 10만 부 넘게 팔리던 시사월간지 ‘세카이(世界)’가 1만 부도 팔리지 않고, 사회언어학의 매력을 알리는 무명 학자의 책 ‘언어와 문화’(스즈키 다카오)가 누계로 100만 부나 팔리며 유명 저자로 올라설 수 있던 정말로 좋았던 시절은 가고, 팔리지 않는 학술서는 가차 없이 버려지던 엄혹한 시절(이와나미쇼텐이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에 경영을 책임졌다. 그리고 2001년 계열 도매상인 스즈키쇼텐의 부도 이후에는 이와나미쇼텐의 위기설마저 보도되는 사태를 맞았다.

    당시 보도를 보고 엄청난 위기라고 생각한, 30년 넘게 교제해온 한 작가에게서 이와나미쇼텐을 위해 거금을 내놓겠다는 전화를 받고 저자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는 일화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이 일화를 알리고 싶어 책을 썼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가 중국에서 눈물을 흘릴 뻔한 것은 아마도 그런 현실의 ‘고통’이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는 어떤가? 많은 편집자들이 ‘계몽과 도발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잘 팔리는 책을 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지적 자극을 주는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우리 현실이 서글퍼져 나는 이 책을 다 읽고도 한참 동안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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