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8

..

SK 잘나가는 이유 ‘헐크’가 분위기 띄운 덕?

이만수 코치, MLB서 익힌 ‘팬 서비스’ 화제 … 사인·기념촬영 자청하고 관중과 춤판까지

  • 이헌재 동아일보 스포츠레저부 기자 uni@donga.com

    입력2007-05-29 16:1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2006년 7월 미국 시카고 화이트삭스 홈구장인 US셀룰러필드를 찾은 SK 직원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코치로 활약 중이던 이만수 SK 수석코치 때문이었다.

    경기 전 이 코치는 1루 측 불펜에서 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그냥 한두 명의 팬이 아니었다. 생면부지의 미국 땅에서 당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한 팬과는 가족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또 다른 팬과는 야구 이야기를 했다. 어떤 팬이 사진 촬영을 요청하자 이 코치는 육중한 몸을 움직여 펜스로 기어 올라갔다. 함께 사진을 찍은 두 사람은 순식간에 친한 친구가 된 것 같았다.

    경기 시작 30분 전 팬들과의 만남

    올해 SK 수석코치로 한국에 돌아온 이 코치의 ‘팬과 하나 되기’는 요즘도 계속되고 있다. 관중이 하나 둘 스탠드에 차기 시작하면 이 코치는 매직펜을 뒷주머니에 꽂고 1루 측 관중석을 향한다. 그때부터 즉석 팬사인회가 시작된다. 어린이 팬이든 어른 팬이든 가리지 않고 사인을 해준다. 사진을 함께 찍자는 팬이 있으면 기꺼이 포즈를 취한다. 멀찌감치에서 스타를 바라봐야 했던 한국 야구팬들에게 이 같은 모습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물론이다.

    1998년 미국으로 떠난 이 코치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국보다 미국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의 대스타이자 메이저리그에서 코치로 일한다는 것 정도가 그에 대해 알려진 전부였다. 가끔 전 소속팀인 삼성의 감독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렸지만, 실제 가능하리라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대신 한국에서 접하기 힘들었던 이 코치 관련 기사가 종종 메이저리그 사이트에 올라왔다.



    이 코치는 선수단에서도 분위기 메이커였던 모양이다. 몇 년 전, 이 코치가 경기 전 한 선수의 목을 조르며 레슬링을 하는 듯한 사진을 메이저리그 사이트에서 본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그 선수는 그날 홈런을 쳤는데, 경기 후 인터뷰에서 “경기 전 만수 리 코치와 몸을 풀었던 게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기사 끝부분에는 이 코치의 별명이 ‘헐크’이며 한국 프로야구 홈런왕 출신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미국에 9년간 머문 탓에 한국 팬들의 기억에서조차 그의 존재감이 사라져갈 무렵 SK는 이 코치를 데려왔다. 삼성이 아닌 SK가 그를 영입한 이유는 바로 ‘스포테인먼트(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의 합성어)’ 때문이었다. 그의 스타성과 팬을 향한 열린 마음을 높이 샀던 것이다.

    지난해 가을 입단식에서 이 코치는 “스포테인먼트요? 앞으로 제 모습을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팬들과 호흡하며 그들과 하나가 됐습니다”라고 강조했다. 현재까지 이 코치는 자신의 말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다. 주변에서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그를 ‘스포테인먼트’의 전도사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는 팬을 위해서라면 몸을 사리지 않는다. 4월29일 LG와의 홈경기 직전에 있었던 그룹 ‘레이지본’의 공연 때는 긴 가발을 쓰고 팬들과 기념촬영해 눈길을 끌었다. 이어 벌어진 경기가 SK의 승리로 끝나자 아예 관중석까지 올라가 팬들과 함께 그 자리에서 시끌벅적한 춤판(?)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모습이 미국에 있는 아들에겐 좀 민망했던 모양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가발 쓰고 춤추는 사진이 인터넷에 떠 창피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코치는 단호했다. 그는 “팬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내가 좀 망가지더라도 팬들이 재미를 느끼고 경기장을 찾도록 해야 한다”고 응수했다고.

    최근에는 ‘팬티 선언’이 화제다. SK의 선전에도 외야 스탠드가 텅 비는 일이 잦자 “문학구장에 관중이 꽉 차는 날 팬티만 입고 그라운드를 뛰겠다”고 공언한 것.

    이 코치의 독특한 ‘만원사례’ 계획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그날 입을 팬티를 보내주겠다”는 팬이 나타났다. 계열사인 SK 네트웍스는 자사 런칭 브랜드 속옷을 엄선해 10장의 팬티를 보내기도 했다. 이 코치는 그중 하나를 점찍어두고 문학구장이 관중으로 가득 차길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팬들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만원사례 때 팬티 러닝 약속 지켜질까

    이 코치의 이처럼 튀는 행동은 김성근 감독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SK에서 감독과 수석코치로 만나기 전까지 두 사람의 인연은 악연에 가까웠다. 이 코치는 1992년 삼성에서 은퇴했는데 당시 삼성 사령탑이 김성근 감독이었다.

    이 코치는 당시에도 걸쭉한 입담으로 유명했다. 그런 이 코치를 김 감독은 “분위기를 해친다”며 꺼렸다. 김 감독은 최근 “그때 만수가 하도 시끄럽게 해서 ‘작전 내는 데 방해되니 좀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는데, 그 뒤 두 달 만에 야구를 그만하겠다고 하더라”며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무뚝뚝했던 김 감독도 지난 2년간 일본 롯데에서 코치 생활을 거치며 180도 달라졌다. 여기엔 보비 밸런타인 롯데 감독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후문이다.

    그와 함께 2년을 생활하면서 김 감독은 ‘팬 서비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고 한다. 감독 취임 후 등번호를 선택할 때도 “광땡이 가장 좋으니 38번을 택했다. 그래야 팬들이 오래 기억할 것 아니냐”고 말했을 정도. 김 감독은 요즘 “만수가 떠들지 않고 조용히 있으면 오히려 불안하다. 심지어 ‘내가 쟤한테 잘못한 게 있나’ 걱정하게 된다”며 웃었다.

    팀을 이끌어가는 감독과 수석코치의 ‘팬 제일주의’는 선수들에게도 서서히 스며들고 있다. SK 선수들이 팬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려고 가발이나 복면을 쓰는 것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경기를 마친 뒤 기다리는 팬들이 있으면 반드시 사인해주고 사진 촬영에도 임한다. 무엇보다 SK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뛰는 것으로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고 있다. 덕분에 SK는 시즌 초반부터 줄곧 선두를 질주 중이다.

    SK의 스포테인먼트는 ‘팬이 없는 프로야구는 존재할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몸과 실력으로 보여주고 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