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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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푸른 희망을 다시 노래하자

시대의 아픔 담아냈던 ‘노찾사’ 20년 … 인간 가치 일깨우는 전령사 기대

  • 김창남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입력2007-05-29 15: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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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푸른 희망을 다시 노래하자

    서울 서초구 양재동 한 연습실에서 ‘87년 민주화항쟁 20주년’ 기념콘서트를 위해 노래를 연습하고 있는 노찾사 멤버들. 콘서트는 5월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동덕여대 공연예술센터에서 열렸다

    벌써 20년이다. 세월은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리 지나간다. 내 20대 끝자락을 소용돌이처럼 휘감고 갔던 함성과 격정, 감동과 눈물의 경험이 엊그제처럼 생생한데 20년의 시간 너머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 시절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이후 세상은 어떻게 변해왔는지 새삼 옮길 필요는 없겠다. 그저 각자의 머릿속에 각인된 20년 전 기억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한 갈피만 들춰 지금의 눈앞에 꺼내본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동안 내 삶의 과정, 지난 세월의 자국이 새겨져 있을 터다. 내 경우 그 기억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하 노찾사)이다.

    치열한 80년대 상징 아이콘

    노찾사가 처음 생긴 것은 1984년 겨울이다. 그 한두 해 전부터 대학을 졸업한 노래패 출신이 모여 조금씩 공연도 하고 노래도 만들고 글도 쓰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김민기 씨의 도움을 받아 만든 음반 제목이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이다. 이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최초의 노찾사인 셈이다. 그 이름이 80년대를 상징하는 한 아이콘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후 1987년까지 우리는 ‘노래모임 새벽’이란 이름으로 공연활동을 하거나 불법음반을 제작하고, 노동자 노래모임 같은 조직활동을 하고 노래운동을 이론화하는 글을 쓰면서 보냈다. 87년은 우리에게도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주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공개된 장소에서 입장료를 받는 합법 공연을 하기로 했고, 논란 끝에 노찾사를 공연 주체의 이름으로 정했다.

    그때 우리는 노찾사를 노래운동과 대중공간을 연결하는 일종의 전술 단위로 설정했다. 노래운동권에서 다양하게 창작되고 불리는 민중가요의 대표작을 합법적 공간에서 대중에게 알리는 일을 노찾사가 맡는다는 생각이었다.



    종로5가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노찾사의 첫 공연은 그야말로 감동과 눈물의 도가니였다. 관객이 몰려들었고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 경험이 이후 노찾사의 활동을 이끈 동력이 됐다.

    처음 노찾사는 노래패 출신 직장인과 전업 음악인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뒤섞인 팀이었지만, 일이 늘고 전문화되면서 점차 전업 활동가들로 채워졌다. 1989년 노찾사는 80년대 ‘노래모임 새벽’이 만든 대표적 민중가요를 중심으로 합법 음반을 제작했다. 이 노찾사 2집은 엄청난 판매액을 기록하며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사계’ 같은 대중적 히트곡을 만들어냈다.



    ♬ 노찾사 - 사계


    이후 90년대 초반까지 노찾사가 전성기를 누린 시기는 그대로 한국사회에서 진보 담론이 만개한 시기와 일치한다. 80년대 내내 억압됐던 대중의 진보 욕구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던 시기이며, 노찾사의 인기는 바로 그 시점의 대중의 욕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90년대 초반을 넘기면서 세계는 탈냉전, 탈이념의 시대로 빠르게 전환했다. 한국에서는 오랜 군사정권이 끝나 문민정권이 수립됐고, 정보화·세계화의 구호가 민주화를 대신해 지배 담론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또 서태지 신드롬으로 표상되는 신세대 문화가 대중문화권을 장악했다.

    대중은 어느새 정치와 이념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대중문화는 자본과 시장 논리의 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진지하고 성찰적인 문화 대신 가볍고 쾌락적인 문화가 각광받은 것은 물론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노찾사의 역사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80년대적 시대정신을 어떤 식으로든 지켜내고자 안간힘을 쓴 시간이었다.

    중년의 가수와 관객, 그날 열정

    97년 외환위기는 한국사회가 지난 수십 년 간 지속해온 발전 방식과 성장주의 모델의 한계를 극명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과 사회문화적 가치관 전반을 성찰하며 대안적 사회시스템을 지향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국가 주도의 경제주의가 낳은 파탄을 신자유주의라는 또 다른 경제주의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본과 시장 논리가 사회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시대로 진행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노찾사의 진지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점점 줄었다. 90년대가 끝나갈 무렵 노찾사는 마침내 활동중단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2002년 무렵부터 노찾사가 다시 조금씩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한 것은 2005년이다. 노찾사의 노래를 즐겨 듣던 관객들이 그런 것처럼 노찾사의 구성원도 더는 청년이 아니다.

    ‘중년이 돼버린 그들이 지금 다시 부르는 노래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이 질문이 결국 ‘우리에게 80년대는, 아니 87년은 무엇이었나’ 하는 질문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80년대는 우리에게 자본과 권력보다 인간의 가치가 더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시대이고, 87년은 그런 정신이 푸른 희망의 불꽃으로 타올랐던 해다. 날이 갈수록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비정규직이 늘어만 가고 양극화가 심화되며 나와 내 가족의 행복만 최고 가치가 된 현실에서, 80년대의 시대정신은 새롭게 조명돼야 할지언정 버려지거나 망각돼서는 안 된다.

    나는 노찾사의 노래가 바로 그런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우는 전령이 돼주기를 바란다. 20년 전 같은 환호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그 노래에서 잊어버린 인간의 얼굴을 기억하고 희망의 눈빛을 되찾게 될 것이다.

    노찾사를 거쳐간 사람들은

    故 김광석, 안치환, 권진원 … 활발한 활동 여전


    그래, 푸른 희망을 다시 노래하자

    1992년 동교동 연습실에 모인 멤버들. 이때는 거의 매일 모였다.

    그동안 노찾사를 거쳐간 사람은 200명에 이른다. 노찾사는 단순한 밴드나 그룹사운드가 아니라 스스로 창작과 연주, 기획과 홍보, 그리고 운영과 정책까지 해결하는 운동집단의 성격을 가진다.

    그 가운데는 음악인으로 이름을 각인시킨 사람도 많다. 가수 김광석은 노찾사 1집 음반(1984년)부터 참여한 최초 노찾사인 중 하나로, 이후 솔로로 활동 하며 한국 포크 음악의 중추 구실을 하리라는 기대를 모았지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990년대 초반 노찾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안치환과 권진원은 각자 솔로로 나서 성공적인 음악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문진오(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가영 신지아(앞줄 맨 왼쪽) 등은 여전히 가수, 작곡가로 음악활동을 펼치고 있다.

    80년대 노래운동에서 핵심 구실을 했던 작곡가 문승현은 러시아와 프랑스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돌아와 현재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에 재직하고, ‘광야에서’의 작곡가 문대현은 방송음악인으로 활동한다. 노찾사 대표를 지낸 김보성은 문화정책과 기획 분야 전문인으로 성장해 경기문화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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