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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의 시네마천국

전우를 위한 전쟁 역사는 사진에 속았다

‘아버지의 깃발’

전우를 위한 전쟁 역사는 사진에 속았다

전우를 위한 전쟁 역사는 사진에 속았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으나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것을 다루는 도구가 곧 사진이다. 내 사진은 당신이 보지 않는 것을 표현한다.



모든 것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시작됐다. 1945년 종군기자였던 조 로젠탈의 바로 그 사진. 마치 무덤처럼 보이는 철근과 자갈투성이의 돌밭을 힘차게 딛고, 6명의 병사가 힘을 모아 기울어진 미국 국기를 바로 세우는 그 사진. 조 로젠탈의 ‘유황도’는 그해 퓰리처상을 받았고 사진은 삽시간에 전 미국을, 아니 전 세계를 휩쓸었다.

이오지마, 한자로 유황도라 부르는 이 섬은 일본 본토에서 약 967km떨어진, 아무 특징도 없던 불모의 땅이었다. 그러나 일본 본토를 폭격할 수 있는 중간기착지였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과 미국은 한 치 양보 없이 이곳에서 격돌했고, 곧 유황도는 이름처럼 화약과 피비린내 가득한 지옥도가 됐다.

조 로젠탈의 사진은 바로 자신의 아들이, 남편이, 애인이 그곳에서 승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국 국민으로 하여금 확신하게 했다. 아니, 미국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남자들이 목이 잘리고 팔이 절단되는 전쟁의 화마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사진 속 병사들은 곧 본국으로 소환됐고,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들은 대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된다.



전 세계 휩쓴 조 로젠탈의 ‘유황도 성조기 게양’ 사진

제목부터 ‘아버지의 깃발’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신작은 바로 이오지마의 사진 한 장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뜻밖에 제목에서 감지되는 보수우익적 스토리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가 슬며시 고개를 든다. 살아 돌아와 국채판매 운동을 벌였던 병사들은 갑자기 찾아온 벼락인기에 얼떨떨해하면서 죽은 동료들에 대한 죄의식에 시달린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깃발’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아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고전 서부극을 해체한 그가 이번에는 동일한 방식으로 전쟁영화 속에 자리잡은 미국 신화를 해체한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거대한 전투 장면을 놓고 이스트우드와 스필버그 두 감독의 연출 방식을 비교해보라.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전쟁 한가운데서 관객을 또 한 명의 미군 병사로 만든다면, ‘아버지의 깃발’은 전례 없이 일본군의 시점으로 전쟁을 뒤집어본다. 그리하여 미군에게 덫을 놓고 있는 일본군의 총신에 바짝 긴장하면서도 여전히 2차대전을 ‘참선’하게 되는 것은 이스트우드의 금욕주의에 힘을 얻은 바 크다.

오히려 이오지마 전투보다 먼저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은 헛된 상징으로서 혹은 싸구려 전선물로서의 이오지마다. 이오지마의 국기 게양은 하나의 이벤트로서 애국과 대중에 대한 호소라는 전략으로 병사들 에게 끊임없이 되풀이해 강요된다. 의미심장하게도 인디언 출신인 아이라 헤이즈만이 진실을 직시한 채, 운동장 안에 놓인 이오지마의 수리바치산 꼭대기를 본뜬 모형을 가리키며 “저 종이반죽 모형에 국기를 꽂으라고요?”라고 반문한다.

혹은 이오지마의 사진은 아이스크림으로도 변형돼, 병사들이 그것을 디저트로 먹어야 한다. 아이스크림 위에 흩뿌려지는 딸기시럽. 그 빨간색 액체를 보며 병사들은 무엇을 연상했을까? 영웅이라 불리며 끊임없이 이오지마가 호출하는 잔혹한 지옥의 기억에 소환당하는 그들은 영화 마지막에 가서는 탈신화화되고 탈역사화된 병사의 맨얼굴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그러고 나서 유황도 사진이 찍히는 실제 전장의 순간은 너무나 찰나적이고 허망할 뿐이다. 병사들은 그저 두 번째 국기 게양에 아무런 생각도 없이 우연히 동참하고 사진작가 역시 우연히 셔터를 누르고,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역사적 순간은 휙 지나가버린다. 이스트우드는 역사란 우연의 연속이며,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이 오직 인간의 일임을 깨우쳐준다. ‘미스틱 리버’에서 딸의 죽음으로 헛된 복수를 다짐하는 인간의 비극이나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피를 나누지 않았어도 생사고락을 함께한 한 여성 권투선수와 트레이너 간의 유사가족 관계처럼, 이오지마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전우, 혹은 또 다른 유사가족들 때문에 싸움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그는 휴머니즘에 기초한 가족주의를 시종일관 우직하게 밀고 나간다. 이것이 이스트우드의 세계이며 방식이다.

역사란 우연의 연속 … 의미 부여하는 인간 조명

이스트우드의 다음 행보는 무엇이었을까. 놀랍게도 ‘아버지의 깃발’에 짝패가 될 수 있는 완벽한 카운터파트의 영화, 일본군의 관점에서 똑같은 유황도 전투를 그린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만들었다. 결국 아카데미 작품상에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올랐지만, 두 영화는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로 전쟁의 참상을 서로 비춰준다. 실제 어떤 전투 장면은 두 작품에서 똑같이 묘사된다. 이스트우드는 전쟁영화라기보다는 전쟁에 관한 영화, 혹은 전쟁 이후에도 계속 전쟁을 치러내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영화를 만든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물결을 타고 아우라를 얻은 한 장의 ‘위대한’ 사진이 낚을 수 없는 진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테렌스 맬릭이 ‘신 레드 라인’에서 전쟁으로 철학을 했다면, 이스트우드는 ‘아버지의 깃발’을 가지고 기호학자가 됐다고 할 수 있겠다. 정말 이런 방식의 영화 만들기는 드물다. 장중하고 비극적인 방법으로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현재 살아 있는 미국의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임을 입증하고 있다. 동시에 자신이 언젠가 스페인의 사막에서 얼굴을 찌푸린 채 총을 겨누던 건맨 출신임을 완전히 잊게 만든다. 2월15일 개봉 예정.



주간동아 574호 (p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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