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40

2006.06.20

연애 못하면 바보? 당신도 연애인?

세대 초월·성별 초월 온통 ‘리얼 로망스’ … 사생활 아닌 대중문화 영역으로 개념 확대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6-06-14 14: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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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 못하면 바보?  당신도 연애인?

    현대 대량생산 시대의 사랑의 본질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한 로버트 인디애나의 ‘러브’. 광고 같은 문자와 현란한 색, 매끈한 표면은 상품화된 남녀관계를 풍자한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면, 나 없이도 가정과 회사와 동창회가 잘 굴러가는 것이 화나고 월드컵 이후 닥칠지도 모를 정신적 공황 상태가 두렵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연애가 아닐까?’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이라던 드라마 ‘연애시대’의 대사가 귀에 꽂혀 사라지지 않고, 서점을 점령한 연애 전략서들을 들춰보며 연애를 하고 있지 않은 자신이 비정상적으로 여겨지거나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연애가 맞기는 한지’ 의심스럽다면, 당신 역시 연애와 사랑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

    연애는 이제 사생활에서 대중문화의 영역으로 넘어와 수많은 연애상품을 생산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달뜨게 한다. 사람들이 연애를 꿈꾸는 것은 축구에 미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그러나 남녀 간의 사랑이 세상과 함께 ‘언제나’ 존재해왔다는 점, 그리고 연애의 속성상 ‘나’에게만 특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연애를 ‘문화’와 ‘상품’으로 포장하는 일이 새삼스럽고 또 모순돼 보이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연애가 초등학생에서부터 노인까지 세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의 일상에 침투해 1년 내내 연인들의 세리머니가 이어지고, 타로점 같은 영적 영역에서 헬스클럽까지 모든 공간을 지배한 적은 없었다. 대학 교수들과 정신과 의사들은 앞다퉈 연애를 분석하고, 연애 카운슬러들은 수백, 수천 가지의 연애 전략을 쏟아낸다.

    우리나라에서 연애란 단어 첫 등장은 1910년대 초



    연애 못하면 바보?  당신도 연애인?

    한창 연애 중인 듯, 꿈꾸는 듯한 남녀의 얼굴을 하트 모양이 감싸고 있다. 연애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과 관련 있다는 서구적이고 낭만적인 생각을 보여준다. 1923년 1월2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것을 ‘연애의 시대’에서 재인용.

    언론에 ‘연애학’ 교수로 소개된 한 대학 강사는 “마치 보이지 않던 불씨에 기름을 끼얹은 듯하다. 연애에 대해 사람들이 이처럼 열광할지 몰랐다. 기혼 남녀들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연애를 하거나 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예전과 달라진 모습”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영화와 드라마의 주제는 언제나 연애와 사랑이었으되, 지금의 추세는 그 전과 확연하게 구별된다. 영화 ‘연애의 목적’ ‘연애술사’ ‘광식이 동생 광태’ ‘달콤 살벌한 연인’이나 드라마 ‘연애시대’ ‘소울메이트’처럼 연애를 ‘단층촬영’하고 심리적으로 분석한 연애물들이 붐을 이루고 있다. 이런 ‘메타멜로’적이고 ‘하드보일드’를 표방한 연애물에 대해 멜로드라마의 전통적 소비층인 40대 여성들은 ‘재미없다’고 하는 반면, 남성들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인기가 높다는 점도 흥미로운 현상.

    ‘연애시대’의 한 남성 시청자(42)는 “이혼한 부부가 연인처럼 지내며 각자 또 다른 상대를 만나는 스토리 설정이 윤리적 문제는 피하면서 ‘늦게 찾아온 진짜 사랑’을 기대하는 유부남들의 은밀한(?) 꿈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이런 드라마들은 사랑에 빠진 극중 남녀와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관객을 유도하기보다는, 연애를 하는 남녀가 얼마나 계산적이고 내숭인가를 보여줌으로써 사랑에 대한 환상을 보란 듯이 깨뜨린다. SBS TV 오락물 ‘리얼로망스, 러브레터’가 미혼 연예인들의 짝짓기를 다루면서 ‘이건 진짜’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연애의 메커니즘’에 있음을 입증한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

    연애 못하면 바보?  당신도 연애인?

    드라마 ‘연애시대’.

    ‘연애’는 사랑(love)이라는 폭넓은 개념 중에, 특히 서양문화에서 태어나 일본을 통해 수입된 ‘남녀 간의 사랑만을 번역한 개념’(권보드래, ‘연애의 시대’)이다. 우리나라에 ‘연애’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10년대 초로 알려져 있다. 처음엔 외국 소설을 번역하거나,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열렬한 연애로 결혼한 사이’라는 식의 외신 기사에 등장했다. 연애는 한국과 일본, 중국 등 한자문화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이라는 것. 1921년 ‘근대의 연애관’을 쓴 일본의 구리야가와 하쿠손은 “영어나 프랑스어에 있는 ‘러브’의 감정이 일본어에는 없다”고 불평했다.

    문학평론가 권보드래 씨는 1920년대 초 2~3년의 짧은 기간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연애 시대’였다고 설명한다. 연애는 신여성, 신가정, 신학문 등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 시기의 연애란 “‘사랑은 하나님께 하였다 함보다도 그 처녀의 환상 앞에 고개를 숙’(나도향, ‘청춘’, 1920)이는 불신자, 신과 민족보다 이성(異性)을 절대시”하는 상황을 상징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무정부주의와 유토피아에 대한 선망이 세계를 휩쓸었던 아주 특이한 시기에 우리나라에도 연애가 문화와 예술의 원천이 됐다. 당시 연애는 ‘목숨을 건 열정’이었고 이후 자기 표현의 방식, 남녀관계, 가족의 재구성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권보드래)

    낭만주의와 퇴폐적 경향이 강했던 당시의 열정적인 연애에 비하면, 오늘날의 연애는 연습하면 할수록 더 좋은 점수를 받는 게임과 흡사하다. “앞으로 연인을 바꾸는 것은 직업을 바꾸는 것과 비슷해질 것”이라고 한 뮌헨대학 울리히 벡 교수(사회학)의 예언도 연애의 현대적 의미와 특징을 잘 포착하고 있다.

    연애 못하면 바보?  당신도 연애인?

    드라마 ‘소울메이트’.

    팝 칼럼니스트에서 연애 카운슬러로 변신한 김태훈(‘내일도 나를 사랑할 건가요’의 저자) 씨는 “연애는 게임이다. 게임은 즐거워야 하고, 기왕 하는 게임이라면 승리를 위한 전략과 전술이 있어야 한다”며 “게임의 첫 번째 규칙은 상대에게 이것이 게임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신문에 ‘러브패러독스’라는 칼럼을 연재하는 연애 카운슬러 ‘캣우먼’은 “돈의 괴력은 곧잘 힘없는 연애를 무너뜨린다”고 강조한다. 이들 ‘선수’ 카운슬러들의 책을 읽다 보면, 연애란 ‘판돈’을 두고 덧셈·뺄셈과 잔머리 굴리기에서 승리하는 게임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연애 게임의 룰은 속고 속이고, 서로 속고 있음을 모르는 척하는 것

    백화점에 여자친구의 생일선물을 사러 온 한 직장 남성은 “밸런타인데이에 여자친구에게 초콜릿과 넥타이를 선물 받고, 화이트데이에는 사탕만 선물했더니 화를 내더라. 그 다음부터는 내가 받은 선물의 2배 가격 정도의 선물을 사준다”고 말했다. 실제로 1, 2년 전부터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을 주는 화이트데이의 매출액이 전통적 연인들의 날인 밸런타인데이의 매출액을 역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화이트데이가 여자가 밸런타인데이에 뿌린 선물값을 회수하는 세리머니이며, 그 액수로 애인의 애정을 평가하는 날이란 사실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또,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화이트데이에 싸우는가.

    연애 못하면 바보?  당신도 연애인?

    연애전략서의 인기가 출판계 흐름을 바꿔놓고 있다. ‘LOVE IS’라는 연애전략서들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책’과 나란히 놓여 있는 것도 흥미롭다(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흥미롭게도 거의 모든 연애전술서들이 여자는 ‘놀아본 티를 내지 말 것’이며, 남자는 ‘한 번 놀려는 게 아니라 상대가 진짜 마음에 든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라’고 충고한다. 연애라는 게임의 룰은 속고 속이면서, 서로 속고 있음을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인간관계(‘연애학’으로 소개된)를 가르치는 교수들이 보는 연애의 세태도 이와 비슷하다. 연세대에서 ‘청소년 갈등과 자기이해’를 강의하는 김인경 교수는 “머리로 생각해서 연애를 시작하고, 손해보기 전에 연애를 끝내려는 학생들이 많다”면서 “특히 자식의 미래를 학원 공부시키듯 속전속결 식으로 결정했던 부모들이 연애에 대해서도 ‘성장지향적 코멘트’를 한다. 그러나 연애만큼 직접 겪어봐야만 배울 수 있는 것도 없다”고 아쉬워했다.

    MBC TV ‘소울메이트’의 노도철 PD는 “사람들이 소울메이트에 열광하는 이유는 연애가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 아닐까? 사랑을 위해 노력하기는 귀찮으니 나를 위해 모든 것이 맞춰진 사람이 나타나면 결혼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사고방식 같다. 소울메이트니까 상대가 한눈팔 걱정도 없을 거라고 한다. 이 드라마를 기획한 건 의지로 ‘만들어가는 사랑’과 ‘운명적 사랑’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묻고 싶어서였다. 소울메이트에 대한 환상을 깨고 싶다”고 말한다.

    생물학에 사랑은 ‘DNA가 파놓은 함정’

    ‘맞춤형’ 연애 상대인 소울메이트를 둘러싼 논쟁은 인문학자와 과학자, 즉 진화생물학자들 사이에서도 장구한 세월을 두고 벌어졌다. 생물학에서 보면 사랑은 ‘DNA가 파놓은 함정’이다. 이에 대해 인문학자 측의 주장은 “인간은 DNA의 명령에서 벗어나고 이탈하는 데 특별한 재주를 가진 동물”(도정일,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사람은 ‘눈이 예뻐서’ ‘마음이 착해서’ 등 수천 가지 이유로 돈도, 힘도 없는 상대를 연인으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생물학도 지지 않는다. 암컷은 ‘경험법칙상’ 여러 특징 중 하나만 잘 골라도 성공했기에, 새끼를 낳아 기르는 데 유리한 - 젊다거나, 착하다든가 - 수컷을 고른다고 한다. 생물학에서 보면 소울메이트는 진화에 유리한 상대이고, 인문학에서는 본능을 거부하고‘자유의지’로 고른 상대다.

    그래서 로버트 무질 같은 소설가는 “사랑은 인간의 모든 것을 의미했다가 어떤 때는 동물적 본능을 드러낸다”고 말했던가. 울리히 벡 등 사회학자들은 “현대가 연애 전성시대인 것은 육체와 성이 금기에서 해방됐을 뿐 아니라 종교나 정치적 이데올로기 등 다른 정신적 믿음 -막스 베버가 말한 ‘선도적 가치’- 에서 삶의 목적을 찾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절충안을 내놓기도 했다. 실제로 1920년대의 연애 열풍이 3·1운동의 실패에서 촉발됐다는 사실을 현재의 정치 현실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군국주의 일본을 배경으로 엽기적 섹스 행각 실화를 다룬 영화 ‘감각의 제국’이 학자들의 극찬을 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가 산업화, 정보화할수록 개인이 다른 사람이나 조직, 세계를 이해하고 소통하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하지만 연인의 손을 만지고, 함께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고, 섹스하는 일은 ‘아직까지’ 개인의 영역 안에 놓여 있다. 연애 상대와 ‘관계 맺기’를 통해 내가 누구이며, 왜 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K대 봉사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한 대학생은 “동아리에 와서 금세 여자친구를 사귀게 됐다. 2주일 정도 지나니 여러 커플들이 생기더라. 같은 과 친구들과는 교류도 별로 없고 어쩐지 불편한데, 연애는 경쟁이나 이해가 없는 순수한 즐거움을 준다”고 말했다.

    연애 못하면 바보?  당신도 연애인?

    현대인들에게 종교적 기념일이란 다른 커플에 지지 않게 ‘연애 의식’을 치르는 날. 올해 밸런타인데이에 마닐라에서 열린 2000쌍 키스 대회.

    그런가 하면 결혼을 유지하면서 네 번째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다는 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지나고 나면 누굴 만나고, 연애하고, 헤어지는 게 다 비슷하죠. 하지만 연애를 하지 않으면 뭘 할지도 모르겠고, 금방 늙어버릴 것 같아요. 무엇보다 ‘아무도 없는 상황’을 견디지 못할 것 같고….”

    문화평론가 난나 씨는 “결혼 등 제도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는 한국 사회에서 각종 담론들이 ‘연애’를 하라고 부추기면서 ‘순수한 연애’에 대한 환상과 열병은 점점 더 심해진다”고 말했다.

    친구들 사이의 은밀한 수다에서부터 알랭 드 보통 같은 소설가의 날카로운 분석과 학자들이 내린 역사적 추론까지, 결론은 ‘현대인은 특정 상대가 아니라 연애에 대한 생각 그 자체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연애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최후의 보루이며, 현대인의 새로운 종교”(울리히 벡)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한다’던 연인들이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싶다’는 모순되는 말로 이별을 고할 때, 두 가지 진술은 모두 진실이다. “연애에 신물나고 고통받으면서도 그 진흙탕에 자꾸 빠지는 건, 그 안에서 자신이 만든 환상을 보기 때문”(권보드래)이라는 것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의 말은 인간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연애에 빠진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연애가 얼마나 강렬하고 눈부신 감정인가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하기도 어려울 듯하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당신이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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