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40

2006.06.20

“사상 자유 억압하는 국보법 독소조항 폐지해야”

전수안 대법관 후보 “여성 인권 보호, 소외계층 대변이 내 소임”

  •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6-06-14 1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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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 자유 억압하는 국보법 독소조항 폐지해야”
    이용훈 대법원장은 6월7일 법관 출신 4명과 검찰 출신 1명을 신임 대법관 후보로 제청했다. 이에 법조계에선 ‘무난한 인사’라는 평가가 나온 반면, 사법개혁을 희망하는 진보적인 시민단체에서는 ‘변화와 개혁의 퇴행’이라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다. 시민단체에서 그나마 위안을 삼고 있는 후보가 전수안 광주지법원장이다.

    전 원장은 법원노조와 시민단체, 여성단체로부터 동시에 추천받은 유일한 대법관 후보다. 그는 지난해 시민단체 기고문을 통해 법조계 전관예우 문제와 대법원장의 인사권 독점 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국가보안법 및 통신비밀보호법의 법률적 문제를 지적하면서 대법원장의 대국민 사과의 필요성까지 거론해 법조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민감한 현안 전향적 입장 예상

    2004년 서울고법 형사2부 부장판사 시절에는 국보법 개폐 문제로 시끄럽던 상황에서 국보법 위반혐의로 기소된 ‘민족통일애국청년회’ 회장의 해외연수를 허용함으로써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전 원장의 결정은 국보법 제정 이후 피의자의 해외출국을 허용한 최초 사례였다.

    전 원장의 개혁 성향과 여성이라는 점은 대법관 취임 이후 사법개혁 등 각종 민감한 현안에 전향적인 입장을 취할 것임을 예상케 한다. 전 원장 스스로도 “반평생을 여성 법조인으로 살아오면서 절감해온 사회의 비주류, 소외계층의 권익보호를 위해 기여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 5인의 대법관 후보 중 전 원장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다.



    -대법관 후보로 제청된 소감은?

    “훌륭한 선배나 동료가 많은데 민망하고 송구스럽다는 생각이 앞선다. 여성 법조인으로서 다른 분들보다 사회의 절반인 여성의 인권까지 더 많이 배려하고 보호하라는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잘 감당하도록 하겠다.”

    -대법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급심 재판에서는 특정 사건의 원고나 피고, 또는 피고인이나 피해자 등 당사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고죄하고 판결을 내린다. 대법관은 당사자는 물론이고 잠재적 재판 당사자인 전 국민을 상대로 판단하는 자리다. 대법관은 사회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시사하거나 어느 정도 방향도 제시할 수 있는 판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대법원에서 그런 역할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지적되고 있는데.

    “두 가지를 생각해봤다. 하나는 대법원 시스템의 문제다. 상당 수의 사건이 대법원까지 올라오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판단의 한계가 있었고, 또한 정책법원으로서의 역할에도 제약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사건의 판단에 여념이 없어서 모든 국민을 상대로 한 고민과 판단을 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스템의 변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또 하나는 시스템을 구성하는 소프트웨어의 문제다. 그동안 대법원은 인적 구성에서 다양하지 못하고 획일적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번 대법관 선정과정에서도 거론됐던 교수 출신이냐, 검찰 출신이냐, 여성이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계층을 두루 반영한 구성을 이루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사회 통념에 부합하는 통상적인 사고를 하는 대법관도 있을 수 있고, 마이너리티의 이해를 중시하는 대법관도 있을 수 있다. 그 속에서 균형 있는 결실을 이루려면 대법관들의 출신도 중요하지만 의식 면에서도 다양하게 구성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여러 차례 사법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난해 시민단체 기고문에서도 재차 강조한 바 있는데 현재 사법개혁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다고 보는가.

    “대법원장의 인사권을 법원별로 자치 이양해야 한다는 점과 전관예우를 막기 위해 마지막 근무부서의 사건에 대해 일정 기간 수임을 금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가운데 인사권은 이용훈 대법원장 취임 이후 상당 부분 고등법원장에게 이양되고 있다. 하지만 전관예우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별다른 대책이 없는 상태다.”

    -현행법 중 사문화된 것이 많고 불합리하다는 지적을 받는 조항도 많다. 가장 시급하게 개정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먼저 양성평등에 저해가 되는 관련 법규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일례로 성폭력범을 처벌하는 법으로 ‘성폭력 처벌에 관한 특별법’ 이외에도 ‘형법’이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강도범은 구형량이 5년부터 시작하는데 강간범은 3년부터 시작한다. 처벌의 경중에서 강간이 강도보다 피해가 덜하거나 범죄 사실이 덜 중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처럼 양성평등의 관점에서 검토해보면 문제가 될 부분이 상당히 많다.

    사상이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규에 대한 개정도 필요하다. 기회가 되면 재판을 통해 소신을 적극적으로 피력할 생각이다.”

    -지난해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해 법리적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국가보안법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가.

    “국가보안법 제7조 5항(이적표현물 제작·배포·소지)은 여야 정치권이나 진보-보수 간의 갈등과 직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상당 부분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악용될 소지가 큰 규정이다. 실제로 적을 이롭게 하기도 전에 이적물을 소지하기만 해도 ‘적을 이롭게 할’ 목적이 있다면서 처벌하는 규정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대다수 형법학자들의 지적이다. 유엔 인권위원회도 문제점이 명백하다며 개폐를 권고한 바 있다. ‘문서를 소지하면 그 같은 목적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바뀌어야 한다.

    제7조 5항은 폐지돼야 한다. 국가보안법의 나머지 조항 중에도 시대상황이나 남북협력관계에 맞지 않는 조항은 최소한 개정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보법 개정에 대해서는 법조계 내부와 정치권뿐만 아니라 국민 여론도 크게 대립돼 있는데.

    “한때 개정을 둘러싸고 정치권에서 논란이 일고,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에 법관으로서 발언을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언급한 것은 원론적인 측면이다. 하지만 조항 자체가 태생적으로 문제가 많다. 입법 의도는 물론 법 형식에도 문제가 있다. 그로 인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견해까지도 잘못 나왔을 정도다.”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을 꼽는다면?

    “사건이나 판결보다는 재판 당사자였던 사람들의 얼굴이 늘 기억에 남는다. 한번은 재판이 끝난 뒤 실형을 선고받은 재소자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경찰과 검찰, 1심 재판부 앞에서 자신은 하나의 사건이거나 기록에 불과했는데, 내게 재판을 받으면서 비로소 사람 대접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나는 그 사람을 더욱 엄하게 처벌했었는데, 당사자는 수형생활을 하면서 새 길을 찾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그런 편지들이 법관의 길을 걸어오는 데 큰 버팀목이 됐다.”

    -대법관으로서 앞으로 어떤 부분에 가장 많은 힘을 쏟을 계획인지.

    “법관은 우리 사회에서 분쟁의 종식, 상처의 치유, 화해, 나아가 평화를 추구하는 직업이다. 나는 여성 법관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여성 인권 보호에 밑거름이 되고,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자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 내가 대법관을 맡게 된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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