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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를 가다①

문화의 길, 역사의 땅 ‘1만km 대장정’ 출발!

‘깐수’ 정수일과 함께 시안에서 카슈가르까지 … 동서 문화교류 확인·우리 역사의 관련성 찾기

  • 글·문건영 변호사 / 사진·서해성 작가

문화의 길, 역사의 땅 ‘1만km 대장정’ 출발!

문화의 길, 역사의 땅 ‘1만km 대장정’ 출발!

페허로 변한 교하 고성들.

장이머우(張藝謨) 감독의 영화 ‘행복한 날들’에는 아버지에게서 버림받고 의붓어머니의 구박을 받으며 사는 눈먼 소녀가 나온다. 무능한 중년남자 라오차오는 소녀의 의붓어머니에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으로 소녀를 데려와 돌본다. 그러다 나중에는 진심으로 소녀를 보살피게 된다. 아버지의 편지를 애타게 기다리는 그녀를 위해 라오차오가 대신 쓴 편지는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새 삶을 찾아 혼자 길을 나선 소녀의 재산이라고는 라오차오에게서 받은 애정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그건 결코 작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 생활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주는 에너지는 얼마나 큰가.

그런 의미에서 실크로드 여정은 나날의 갑갑함에 짓눌린 내 생활에 새로운 탈출구를 마련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나를 기다리는 건 사막의 거대한 사구처럼 쌓여 있는 ‘일’뿐이었다. 결국 내 여행은 일상으로부터의 순간적인 탈출이었거나, 현실과 거리가 먼 두터운 장벽 너머의 새 공간을 잠시 구경한 것에 불과했다. 에너지가 충전되기는커녕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었고, 주위의 공기는 사막보다 더 건조하게 느껴졌다. 사랑이 식어버린 연인을 마주하듯 일상을 참아내고 무시하면서 묵묵히 밥을 먹고, 잠자리에 들며 며칠을 보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게 문학의 힘이다. 여행으로 인한 업무 공백이 조금씩 정리될 때쯤 이노우에 야스시의 ‘누란’과 ‘홍수’, 김별아의 ‘삭매와 자미’ 그리고 윤후명의 ‘둔황의 사랑’을 읽었다. 실크로드의 사막을 배경으로 그곳에서 생활했던 옛사람들의 삶을 그리거나 서역의 문물과 우리의 관계를 소재로 삼아 쓴 소설들이다. 허구적인 구성임에도 막 그곳 땅을 밟고 돌아온 내게 그 이야기들은 긴박한 현실처럼 느껴졌다. 서역에 관한 다른 정보들로부터 결코 받지 못했던 감정이입을 경험했다.

실크로드 여행은 움직이는 여로 자체에 묘미

마치 내가 서역의 오아시스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이거나 오래전 살다 간 그들의 선대가 되어버린 듯했다. 주도권 다툼을 하며 끊임없이 번갈아 공격해왔던 흉노와 한나라 군대의 모습을 모두 목도해버린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여행에서 돌아와 새삼 실크로드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실크로드라는 말은 1877년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이 처음 사용했다. 부드러운 그 이름은 애당초 중앙아시아 지역의 사막에 놓인 길을 한정해서 부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 뒤 실크로드가 사막뿐 아니라 초원과 바다로도 이어졌고, 사막에도 여러 갈래의 길이 더 있었음이 밝혀졌다. 사막에 난 길은 점점이 박혀 있는 오아시스 도시를 연결한 길이라고 해서 오아시스로(路)라고도 한다. 우리가 간 곳은 시안(西安)에서 카슈가르(지금의 카스)까지로, 현재 중국 영토 내에 속해 있는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전역을 다닌 셈이다.

중국의 서쪽은 죽음의 땅, 타클라마칸사막이 자리 잡고 있다. 투르크어로 ‘들어가면 당신은 나오지 못하리라’는 뜻이다. 사막의 남쪽은 쿤룬과 카라코람 산맥이, 북쪽은 톈산산맥이 위용을 자랑하며 가로막고 서쪽은 파미르고원이 버티고 있다. 트여 있는 동쪽은 고비사막으로 이어진다. 사방 어디로도 접근이 어려운 타클라마칸사막을 점잖게 타림분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아시스는 산의 만년설이 녹아들어 지하수로 솟는 사막의 가장자리를 따라 동서로 점점이 박혔다. 그 점과 선을 따라 톈산산맥의 남쪽 뿌리 부근으로 난 길을 서역북로, 쿤룬산맥의 북쪽으로 인접하여 난 길을 서역남로라고 한다. 상세히 들어가면 더 많은 갈래의 길이 있고, 이름도 얼마든지 더 붙일 수 있다.

우리는 시안에서 시작해 둔황, 투르판, 쿠차를 따라 서역북로를 밟으며 서쪽으로 가다가 타클라마칸을 남쪽으로 종단해서는 민펑, 호탄으로 이어지는 서역남로를 밟았다. 그리고 중국 서쪽 끝의 관문 카슈가르까지 간 뒤 비행기로 우루무치와 시안을 거쳐 돌아왔다.

말은 쉬워도 지도를 놓고 다닌 도시들을 이어보면 그 길이가 만만치 않다. 인천국제공항까지 포함하면 1만km에 이른다. 낙타 200~300마리를 몰고 다녔다는 대상들이 제아무리 서둘러도 하루에 30~40km 넘게 가지 못했을 터. 그 걸음으로는 10개월 가까이 걸어야 했던 거리다.

그 길을 주파한 열흘 동안 기차와 버스에서 보낸 시간이 적지 않았다. 이틀 내리 기차에서 잠을 자는가 하면, 매일 아침 짐을 다시 싸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여행 직후 여행지로부터 격리돼버렸던 내 감정은 어쩌면 우리의 일정과도 무관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한 곳에 머무르는 시간이 짧으니 그 낯선 장소들과 살갑게 애정을 나눌 기회는 그만큼 줄어들었다.

문화의 길, 역사의 땅 ‘1만km 대장정’ 출발!

① 호탄 시장 전경. ② 사차지역에서 만난 마차 행렬. ③ 멀리서 바라본 둔황 석굴. ④ 호탄 인근의 엘라메 소녀들. ⑤ 둔황의 명사산에서 낙타를 타고 포즈를 취한 필자.



문화의 길, 역사의 땅 ‘1만km 대장정’ 출발!

둔황 인근에 위치한 옥문관(오른쪽). 쿠차 고성에 위치한 키질석굴.

일행 10명 중엔 실크로드 전문가만 여럿

그런데 뜻밖에 소설이 내 마음을 다스려주어 허구적이나마 그들과의 동화감을 느꼈다. 지나고 보니 실크로드 여행은 움직이는 여로 자체에 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도 겨울에.

일행은 모두 10명이었다. 선두에는 실크로드의 세계적 권위자 정수일 선생이 섰다. 일제강점기 때 옌볜(延邊)에서 태어나면서 일본어를 시작했고, 베이징대학에 입학하면서 중국어에 능통했다. 중국 외교관으로, 이집트에 가서 아랍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된 그의 모국어는 한국어다.

출발하면서 그는 여행의 목적을 두 가지로 내세웠다. 하나는 동서 문화의 교류를 확인하고 의미를 캐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서역에서 우리 역사의 관련성과 흔적을 찾는 노력이었다. 그는 실크로드가 신라의 경주까지 확장돼야 완전하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해외에 산재한 우리 역사의 숨결을 준문화재라는 개념으로 살리려고 애쓰는 모습도 기억이 새롭다.

여행이 시작되기 전 내 머릿속에 중국의 서쪽은 먼지만 뽀얗게 쌓인 채 비어 있었다. 스웨덴의 스벤 헤딘이나 영국의 오렐 스타인, 독일의 폰 르콕, 프랑스의 폴 펠리오,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 같은 사람들이 20세기 초 이 지역에 들어와서 과거의 도시들을 파헤치고, 목숨을 건 채 사막을 돌아다니며 엄청난 양의 유물들을 거둬갔다는 것도 급히 읽은 피터 홉커스의 ‘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얻은 지식에 불과했다. 정수일의 ‘한국 속의 세계’를 읽고 나서 서역으로부터 받은 구체적인 영향에 대해 궁금증이 커져 있던 정도였다.

무엇보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나는 가슴속에 미리 거대한 사막을 펼쳤다. 그 중간 중간에 모래바람에 희미하게 형체를 드러내는 작고 소박한 도시들을 세웠다. 밤이면 모래언덕에 올라 온몸으로 달빛을 맞는 내 모습을 그렸다. 그 달빛만 먹고살아도 1년쯤은 족히 버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동과 서의 문화 내지 문명의 교류에 대해 눈으로 보고 좀더 트인 시야를 얻을 수 있다면, 그건 덤일 뿐이라 여겼다.

그런데 여행단의 면면이 만만치 않았다. 안내자를 포함해서 실크로드에 대한 전문가만도 여럿이고 대부분 학구적이었다. 게다가 정수일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여행의 기회가 아무에게나 생기는 것인가 싶어 뒤늦게 공부에 욕심을 냈다. 결국 열심히 보고 듣고 적어 실크로드에 대해 이런저런 지식을 얻게 되었다. 정리되지 않은 그 내용들은 여행 전후에 읽은 책의 내용과 뒤엉킨 채로 머릿속을 뒹군다.

어쨌든 처음의 의도만을 기준으로 하면 서역의 흐린 밤하늘 때문에 다소 뒤틀려버린 여행이었고, 그래서 여행기는 군데군데 멈칫거린다. 하지만 그 겨울의 여정에 따라 경험과 상념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달빛이 따라오나 뒤돌아보면서.



주간동아 529호 (p48~50)

글·문건영 변호사 / 사진·서해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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