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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아이들 만화 이대로 안 된다

  • 손영미 원광대 영문과 교수

아이들 만화 이대로 안 된다

아이들 만화 이대로 안 된다
솔직히 나도 몰랐다. 놀기에 바쁘고, 살기에 바쁘고, 고민하기에 바빠서 우리나라 꼬마들이 어떤 문화를 접하며 하루를 보내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니, 그게 문제라는 생각을 했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가끔, 더 많은 국민들이 좀더 세련된 방식으로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떠들어대고, 지방분권의 영향으로 문화의 하드웨어는 어느 정도 갖춰졌지만 거기서 벌어지는 행사를 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한탄도 했지만, 아이들이 집에서 뭘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는 관심 밖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내가 갖고 있던 안이한 환상, 아이에게 충실하다는 착각이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미처 말도 하기 전부터 만화영화를 즐겨 보던 딸이 이제 자기가 보는 애니메이션을 만화로 그린 책들을 시리즈로 사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각 시리즈는 열 권 이상의 만화책으로 이뤄져 있었고, 각 권마다 네댓 개의 에피소드가 들어 있는데, 문제는 아무리 눈을 씻고 뒤져봐도 선뜻 사줄 만한 책이 단 한 권도 없다는 것이었다.

곳곳에 나오는 폭력도 폭력이려니와, 대부분의 책이 ‘두근두근 쭛쭛의 고백’에서 시작해 ‘쭛쭛이 커플 일기’ ‘새콤달콤 러브 스토리’ ‘쭛쭛처럼 예뻐지는 10kg 날씬 다이어트’ 같은 그야말로 선정적인 제목의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들 책인데 크게 해로울 거 있겠어?’ 하며 아이가 고른 책들을 별 생각 없이 사주던 내게 벼락이 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엔, 딸이 푹 빠져 있는 애니메니션에서 이런 장면이 나왔다. 루이 16세풍으로 꾸며진 저택의 한 방에서 30세가량의 여성이 열두어 살 된 여주인공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아이 예뻐, 어쩌면 이렇게 예쁠까”를 반복하고, 누군가가 방에서 나오면서 그 장면이 원경으로 물러날 때 애무를 받은 소녀가 화면 중앙에 놓이는데, 그때 보인 그녀의 가슴에는 ‘골짜기(cleavage)’가 또렷이 그려져 있었다. 화들짝 놀란 쪽은 아이가 아니라 오히려 나였다.

교육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성격이나 습관이 취학 훨씬 전에 어느 정도 완결된다고 본다. 그런데 이 중요한 시기에, 인류 사회의 미래를 만들어갈 아이들은 이런 책들을 보고 있었다. ①물리적인 힘이 유일한 법인 세계에서 주인공은 반드시 무찔러야 할 적들과 대결 구도를 유지하며 나날을 살아가는데, 매 에피소드는 주인공의 승리로 끝난다. 주인공이 승리하는 이유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적보다 강해지거나, 적의 무기보다 강한 무기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 유일한 선은 힘이고, 대화나 타협은 생각할 수도 없다. ②환상과 마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주인공은 놀라운 초능력으로 우주나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들을 물리친다. 이때 악당들은 그녀가 상대하기에 너무 강해 보이지만 주인공의 마법이 그보다 훨씬 강하므로 승리는 언제나 그녀의 것이다. ③미모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대개 초등학생이거나 중학교 1학년 정도의 여주인공은 한 남학생을 때로는 다정히, 때로는 차갑게 대하면서 어른들 연애 못지않게 질투와 번뇌, 방해 공작, 육체적 접촉과 관련된 설렘 등에 시달린다.



초·중등 학생들이 보는 만화가 여러 면에서 도를 넘어선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월간만화 잡지의 표지에는 그야말로 수박만한 가슴에 수박씨만한 땀방울이 맺혀 있고, 아찔한 옷을 입은 여주인공들이 무시로 등장한다. 하지만 유아나 저학년이 보는 만화까지 그렇다면 문제 아닐까. 이들이 너무 어리고 현실과 허구의 세계를 구별하기 힘들어서도 그렇지만, 이때야말로 인간의 감성과 성격, 지적 능력이 형성되는 시기라서 더욱 그렇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마법적인 무원칙과 섹스와 폭력이 난무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자. 하지만 토끼같이 귀엽고 순진한 우리 자식들이 서너 살 때부터 그런 내용으로 가득 찬 만화를 보며 바로 그런 세계를 확대 재생산해갈 것을 생각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열이 오른다.



주간동아 2005.09.20 503호 (p168~168)

손영미 원광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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