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43

2004.07.15

거듭된 이변 ‘그리스 신화’라 부른다

유로2004 ‘앙리 들로네’컵 첫 입맞춤 … ‘4-2-3-1’ 맹위 스트라이커 몰락 세대교체 물결

  • 입력2004-07-08 19: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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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반 12분, 안겔로스 바시나스가 오른쪽에서 알맞은 높이로 올려준 코너킥을 카리스테아스가 뛰어올라 골망을 세차게 흔들었다. 디펜딩챔피언 프랑스와 치른 8강전에서 후반 20분 테오도로스 자고라키스의 크로스를 머리로 받아 넣어 1대 0 승리를 이끈 주역도 그였다. 카리스테아스는 경기 직후 “매우 기쁘다. 우리가 유럽 챔피언이고 최고의 팀이다. 오늘의 이 기쁨을 만끽하라고 그리스 국민에게 말하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리스본은 기적을 원했다. 영웅은 지네딘 지단(프랑스)도 루이스 피구(포르투갈)도 데이비드 베컴(잉글랜드)도 아니었다. 그리스가 유로2004(2004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 개최국 포르투갈을 꺾고 우승컵 ‘앙리 들로네’에 입을 맞췄다.

    이번 대회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는 카리스테아스. 개막전에서 포르투갈을 2대 1로 꺾은 것을 시작으로 이변을 거듭하며 유럽 정상에 올라선 그리스의 메가톤급 태풍은 카리스테아스의 짜릿한 결승골로 마무리됐다.

    카리스테아스 ‘생애 최고의 날’

    프랑스 아트 사커의 총사령관 지단은 그리스와 치른 8강전에서 패한 후 “한 사이클이 지나갔다”고 한탄했다. 이 말은 자신으로 대표돼온 한 시대가 마감됐음을 암시한다. 도도한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내듯 4년 주기로 ‘세대교체의 실험장’이 돼온 유럽축구선수권의 순환법칙에 따라 지단은 새로운 세대들에게 자신의 왕관을 넘겨줄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리스의 우승으로 마감된 ‘별들의 전쟁’ 유로2004. ‘뜨는 별’과 ‘지는 별’ 사이의 명암 대비가 어느 대회보다도 뚜렷했던 이번 대회를 통해 카리스테아스, 웨인 루니(잉글랜드),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포르투갈), 밀란 바로스(체코) 등 새로운 플래티넘 세대들은 선배들의 배턴을 넘겨받을 준비를 마쳤다.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패배 뒤 맥없이 그라운드에서 고개를 떨구는가 하면 주목받지 못했던 무명선수들이 연달아 골을 넣으며 그라운드를 달궜던 유로2004를 되짚어보자.

    유로2004는 ‘레알 삼총사’가 한자리에 선 마지막 무대다. 이번 대회는 지단을 비롯해 피구 베컴으로 대표돼온 ‘트레센테 에이지(삼총사 시대)’가 한 대회에서 뛰는 마지막을 지켜보는 자리였다. 지단은 그리스전 패배 후 대표팀 은퇴 의사를 시사하며 2002년 월드컵 후 밝힌 “다시는 월드컵에 출전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뜻을 재차 확인했다. 조별 예선 최고의 빅매치였던 잉글랜드전에서 0대 1로 뒤지고 있던 후반 종료 직전 2골을 몰아넣으며 ‘3분의 기적’을 이뤄낸 것은 지단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기적’이었다. 하지만 우승후보 1순위로 꼽히던 프랑스가 8강전에서 그리스에 어이없이 패하자 모든 비난의 화살은 지단에게 쏟아졌다. 프랑스의 한 일간지는 지단의 플레이를 두고 ‘Impotente(성불능)’라는 자극적인 단어로 비아냥거렸고, 지단은 “대표팀에 잔류할지 떠날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면서 은퇴를 시사했다.



    ‘오른발의 마법사’ 베컴은 이번 대회 최고의 불운아로 꼽힌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오른발로 패널티 킥(PK)을 두 차례나 실축하며 잉글랜드 탈락의 역적이 됐기 때문이다. 프랑스전의 PK 실축은 결국 역전의 빌미가 됐고, 포르투갈과 치른 8강전 승부차기에서의 어이없는 슛은 잉글랜드 언론의 표적이 됐다. ‘선데이 미러’가 유로2004 기간에 아내 빅토리아와 수차례 싸우며 이혼 위기에 휩싸였던 것을 부진의 이유로 보도하는 등 끊임없이 구설에 휘말리고 있다. 베컴은 레알 마드리드의 부실한 훈련체계에 책임을 돌렸다 소속팀한테서도 비난을 듣고 있다.

    피구는 이번 대회에서 황금 세대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내기는 했다. 89년과 91년 세계청소년대회를 2연패했던 포르투갈의 ‘부활 세대’ 중 유일하게 주전으로 뛴 피구는 ‘에우제비오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몸을 불살랐다. 그러나 그리스에 패배하면서 2002년 월드컵에서 실추된 명예를 되살리겠다는 꿈은 스러졌다. 팀은 역대 최고 성적인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그는 과거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대회 직전 브라질 출신 귀화선수 데코의 대표팀 차출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오명을 얻었고, 급기야 데코의 출전을 두고 포르투갈 스콜라리 감독과 불편한 관계에 빠지기도 했다. 피구는 이번 대회를 통해 자신도 세대교체의 대상이라는 점을 실감해야 했다. 유로2004는 스트라이커의 무덤이었다. 크리스티안 비에리(이탈리아) 라울 곤살레스(스페인) 등 득점왕 후보들이 단 한 골도 넣지 못하고 고국행 비행기를 탈 것으로 예상했던 사람은 대회 전까지 거의 없었다.

    득점왕 0순위였던 프랑스의 티에리 앙리는 약체 스위스전에서 2골을 터뜨렸을 뿐 그리스와 치른 8강전에서 숱한 골 기회를 놓치며 패배의 책임을 져야 했고, 잉글랜드의 마이클 오언 역시 1골에 그쳤다. 그나마 네덜란드의 반 니스텔루이가 4골을 터뜨렸지만, 느슨한 플레이는 네덜란드 팬들에게 실망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지단빮풉툞베컴 같이 뛴 마지막 무대

    스트라이커들이 부진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우승 후보들이 이번 대회에 대비해 선보인 4-2-3-1 포메이션과 연관이 있다. 상대 오프사이드 트랩을 효과적으로 돌파하기 위해 원톱 스트라이커를 포진하되 그 뒤에 공격형 미드필더 3명을 배치한 이 시스템은 유연성이 가미되지 않은 ‘미완성의 작품’으로 남으며 스트라이커들을 고사시켰다는 지적이다. ‘로이터’는 예전에 비해 스트라이커들의 헤딩 기술이 현저히 떨어진 데다 이번 대회 공인구인 ‘로테이로’가 워낙 반발력이 커서 오히려 골을 줄였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신개념 미드필더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이번 대회의 또 다른 특징이다. 2002 월드컵 당시 독일의 대중잡지 ‘빌트’는 신개념의 미드필더가 등장했다’는 기사를 통해 전략가의 의미로 ‘데어 스트라테게(Der Stratege)’라는 개념을 선보였다. 한국의 유상철, 독일의 미하엘 발라크 등 강한 체력과 필드 장악력을 갖고 있는 미드필더들이 지단 피구 베론 등으로 대표돼온 패스워크와 테크닉 위주의 플레이어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체코의 파벨 네드베드는 유로2004를 통해 새로운 미드필더의 전형을 보여줬다. 그는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사나이’라는 별명답게 종횡무진 그라운드를 누비며 축구강국 체코의 부활을 이끌었다. 특히 조별 예선 3경기에서 모두 선제골을 내주고도 역전승을 거둔 데는 지난 10년간 체코 최고의 축구선수로 뽑힌 네드베드의 활약이 절대적이었다. 비록 결승에 오르지 못하며 눈물을 떨궜지만 그의 플레이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네드베드를 필두로 독일의 발라크, 잉글랜드의 스티븐 제라드 등이 신개념의 중원사령관으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이번 대회를 앞두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토티는 결국 최악의 플레이어로 꼽혔다. 토티는 덴마크와 치른 예선 1차전에서 상대 수비수인 크리스티안 폴센의 얼굴에 침을 뱉어 세 경기 출전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탈리아는 8강에도 오르지 못했고, 토티는 단 한 경기 출전으로 이번 대회를 마감했다. 특히 토티는 “더워서 침을 뱉었을 뿐이다”는 변명으로 일관하며 2002년 월드컵 한국전에서 퇴장당한 후 어설프게 늘어놓은 변명을 연상케 했다.

    최고의 스타로 뜬 잉글랜드 루니

    유로2004가 배출한 최고의 신세대 스타는 뭐니 뭐니 해도 잉글랜드의 루니. 루니는 이번 대회에서 4골을 터뜨리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특히 루니는 스위스전에서 유럽선수권 최연소 득점(18살 7개월 24일)을 기록했다. 루니는 포르투갈과 치른 8강전에서 전반 27분 발 골절상을 입으며 유럽선수권 사상 최연소 득점왕의 꿈을 접어야 했지만 주가는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루니는 이번 대회를 통해 이적료가 1100억원까지 치솟으며 명문팀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루니와 동갑내기로 지난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했던 포르투갈의 호나우두는 이번 대회를 통해 ‘피구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베컴의 ‘7번’을 넘겨받은 호나우두는 네덜란드와 치른 준결승전에서 선제 헤딩골을 터뜨린 데 이어 두 번째 골을 어시스트하며 세계적인 스타의 반열에 올라섰다. ‘프라하의 마라도나’로 불렸던 체코의 밀란 바로스는 4경기에서 5골을 터뜨리는 폭발적인 공격력을 보여주며 스트라이커 부진의 늪에서 발군의 기량을 뽐냈다. 바로스는 4경기 연속으로 골을 터뜨리면서 고감도 슛 감각을 이어갔지만 그리스와 치른 준결승에서 무득점에 그쳐 아쉬움을 남겼다.

    네덜란드의 아르옌 로벤은 타고난 왼발 기술로 3도움을 기록하며 ‘플라잉 더치맨’ 오베르마스를 이을 측면 공격수로 주목받았다. 로벤은 스웨덴과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 승리를 이끄는 마지막 왼발 슛을 성공시키며 유로1992 덴마크와 치른 4강전 승부차기에서 무릎을 꿇으면서 시작된 네덜란드의 승부차기 징크스를 12년 만에 걷어냈다. 유로2004의 열기를 뒤로한 채 새로운 시즌을 준비할 이들 ‘샛별’은 2년 후 독일월드컵에서 다시 한번 자웅을 겨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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