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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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넘길 권력이나 있었나

이라크 주권 이양 놓고 美 언론도 비아냥 … 현지 보안체제 허술•군벌 등장 우려 ‘살얼음판’

  • 워싱턴=이흥환/ KISON 연구원 hhlee0317@yahoo.co.kr

    입력2004-07-08 15: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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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 이라크에 정치 주권을 넘겼다. 이른바 주권 이양이다. 1997년 영국이 중국에 홍콩의 주권을 이양했을 때는 행사가 요란했다. 팡파르가 울리고 폭죽이 터졌다. 돌려받는 중국은 싱글벙글 입을 다물지 못했고, 서운하긴 했겠지만 넘겨주는 영국도 있는 대로 생색을 냈다. 홍콩의 주권 이양은 그래서 축제였다. 미국의 이라크 주권 이양은 영 딴판이다. 축제이기는커녕 ‘야밤 월장한 치한 도망치듯’ 미국은 이라크를 허겁지겁 빠져나왔다. ‘밀실 이양’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양식은 행사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바그다드의 미군 통제지역인 보안 지역(Green Zone) 내 방 한구석에서 5분 만에 후닥닥 해치워버렸다.

    점령국 미국이 공식적으로 ‘점령국’ 딱지를 떼는 주권 이양 예정일은 6월30일이었다. 이날의 행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취재진 몇 명에게 미군정 당국이 느닷없이 중요 행사가 있다며 통보한 때는 이틀 전인 28일 오전 9시50분. 밑도 끝도 없이 30분 후 중요 행사가 있다고만 했다.

    이양식 5분 만에 속전속결 해치워

    30분 후, 휴대전화 사용도 금지당한 채 3중의 보안 점검을 마친 취재진은 ‘중요 행사장’으로 안내됐다. 이동전화 사용 금지는 사전보도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10시21분, 평범한 사무실 안에는 폴 브리머 미 군정관과 이라크 과도정부의 가지 알 야와르 임시대통령, 알라위 임시총리를 비롯한 이라크 관리들 여남은 명이 앉아 있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덕 스트럭 기자는 이 사무실 분위기를 “비즈니스 계약하러 온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이 사무실이 바로 주권 이양식장이었다. 먼저 이라크 임시대통령이 한마디했다. “역사적인날이다. 기쁜 날이다. 온 이라크 국민들이 기다려온 날이다.” 임시총리도 “역사적인 날”이라고 한마디하고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브리머 군정관에게 공식 서류를 넘겨달라고 했다. 브리머가 나서서 “먼저 인사말을 하고 싶다”며 어색해진 분위기를 수습한 뒤 서류를 넘겼다. 10시26분. 주권 이양. 상황 끝. 그리고 브리머는 그 길로 바그다드를 빠져나갔다. 미 일부 언론은 ‘브리머의 탈출’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럴 만했다. 주권국 이라크로 부임하는 신임 미 대사 존 네그로폰테가 바그다드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곳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던 것이다.

    이라크 주권 이양에 대한 미 주류 언론들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다. ‘뉴욕타임스’의 고정 여류 칼럼니스트인 머린 다우드는 “진짜 권력 이양이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이양하고 말 권력도 없다”는 뜻이다. 아무튼 무장 저항세력의 예상되는 집중 테러를 피해 이틀 앞당겨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주권 이양은 이라크에서 미국이 처해 있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 되고 말았다. 주권 이양 이후 이라크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우선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 침공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린 이라크의 기존 보안체제가 현재의 이라크를 통제해나갈 수 있을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새로운 이라크 체제가 성공적으로 버텨나갈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한 언론은 ‘일단 임시총리 알라위가 살아남고, 미군의 도움을 받아가며 이라크 군을 재건하고 사회를 안정시킬 수만 있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 ‘임시총리가 살아남는다면’이란 단서가 붙었다. 그만큼 이라크 내부 사회가 불투명하고 어지럽다는 말이다.



    사회 보안체제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군벌의 등장이다. 지금까지는 미군정이라는 강력한 통제력이 작용했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군부가 분열되고 여러 분파가 정치세력화를 꾀할 경우 이라크의 사회 안정은 갈수록 멀어진다. 더구나 이라크는 선거와 정부 구성이라는 정치 일정을 앞두고 있다. 앞으로 6개월간이 이라크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험 기간이다.

    추락한 미국 이미지 아직 그대로

    주권이 이라크에 넘어갔다 해서 미군의 실질적인 이라크 ‘점령’이 바뀌지는 않는다. 미군정 하에서는 펜타곤이 점령의 주체였지만, 주권 이양 이후에는 미 국무부가 전면에 나선다. 바그다드 함락 이후 지난 14개월 동안 이라크 내의 모든 상황은 폴 브리머 군정관이 펜타곤에 보고했다. 이제는 주 이라크 대사인 존 네그로폰테가 국무부에 보고해야 한다. 주 이라크 미 대사관은 미 국무부 역사상 최대 규모이며, 네그로폰테 대사가 그 대사관을 지휘하는 영광을 얻었지만, 전 세계 미 외교공관 중 가장 위험한 지역 공관장이라는 부담도 떠안았다.

    국무부 리처드 아미티지 부장관은 주권 이양이 이루어진 후 몇 시간도 안 돼 공영 라디오 방송에서 “이제는 국무부가 이끌어간다. 우리 목소리가 커질 것”이라고 국무부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예고했다. 지금까지 이라크를 통제한 연합군 임시행정처(CPA)의 지휘체계에 대해 국무부는 불만이 컸다. 펜타곤 관리들, 군수업체의 납품업자들, 각 행정부처의 파견자들에다가 외교관까지 합류한 이질적인 혼성 집단이 연합군 임시행정처였다. 지휘 체계도 불분명했고, 일도 더뎠다. 임시행정처가 이라크 점령 후 혼란만 가중시켰다는 비판을 받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포로 학대 사건 등으로 이미 추락할 만큼 추락한 미국의 이미지가 주권 이양 후 회복될 기미도 지금으로선 보이지 않는다. 유럽, 아시아, 아랍권에서 미국은 ‘실패한 신(神)’이 되어버렸다. 미국 내 보수 진영에서조차 부시 행정부가 ‘이제는 현실을 직시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재선을 노리는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고 죽을 맛이다. 공화당은 11월 대통령선거 때 이라크 문제가 부각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만 14만명의 병력이 이라크에 주둔하는 한 이라크 문제는 대선의 핵심 쟁점이 될 게 뻔하다. 게다가 부시 행정부가 유권자들에게 ‘4년 더’를 외칠 만큼 탄탄대로만 걸어왔다면 모를까, 이라크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대(對)테러전의 명분은 퇴색할 대로 퇴색했다. 부시 대통령이 최근 3개월 사이 다른 모습을 보이는 이유도 이런 위기감 때문이다. 특히 이라크 문제에서 부시는 급격히 현실주의자로 돌아섰다. 최근 그의 발언에서 도덕교과서의 냄새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펜타곤이 이라크 점령 이후 만능 해결사라도 되는 것처럼 끝까지 이라크 지도자로 내세우려 했던 이라크 망명자 찰라비의 퇴진은 국무부 내 온건파의 힘에 밀린 매파 신보수주의자들의 판정패로 봐야 한다.

    제임스 만은 지난 4월에 이미 이런 변화를 주시했다. ‘부시, 현실주의로 변하고 있다’는 제목의 ‘뉴욕 타임스’ 칼럼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전 세계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려 드는 매파 관리 그룹인 부시 행정부 내의 신보수주의자들은 기세가 주춤해진 듯싶다. 이라크 문제에 에너지를 소진한 탓이다. 이들을 대신해 현실주의자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조짐이 보인다. 요즘 들어 콘돌리자 라이스와 체니 부통령을 포함해 이라크 침공을 지지한 대부분의 고위 관리들은 공화당 내에서 미국의 가치보다 국익에 바탕을 둔 현실주의 외교 정책의 사도들인 헨리 키신저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의 전통적인 노선을 따라가고 있다.”

    라이스는 이라크 침공에 대해 이견을 보이고 있던 스코크로프트에게 다시 자문을 구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체니는 포드 행정부 때부터 동료이자 때로는 적이기도 했던 헨리 키신저와 대화를 나눴다는 보도도 있다. 부시 대통령은 바그다드를 함락했을 때 ‘임무 끝(Mission Accomplished)’이라고 외쳤다. 주권 이양 때 한 번 더 외쳤을 만도 한데 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이라크 주권 이양, 이후는 부시 행정부의 현실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알 수 있는 시험 기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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