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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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해적 만물상 떴다

인터넷에 프로그램·게임 등 불법 복제물 홍수 … 저작권 논란에도 ‘정보 공유’ 논리에 힘 실려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2-12-27 10: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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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버 해적 만물상 떴다
    영화 마니아 양희철씨(28·서울 동작구 사당동)는 거의 매일 퇴근하자마자 곧장 컴퓨터 앞으로 달려간다. 출근 전 내려받기 시작한 영화 파일이 잘 도착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양씨가 최근 다운로드 받은 영화는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등 간판을 막 올렸거나, 또는 개봉을 앞둔 작품들이다. 양씨처럼 네티즌들은 조금만 ‘마우스 품’을 팔면 갓 개봉한 영화를 극장에 가지 않고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사이버 해적’들이 영화를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 인터넷을 통해 유포시키기 때문이다.

    중학생 김모군(15)은 같은 반 친구들에게 ‘컴도사’로 통한다. 김군은 학생들이 비싼 정보이용료 때문에 접근하기 힘든 인터넷 성인방송, 외국 포르노 사이트의 ID와 패스워드를 단돈 1000원에 가르쳐준다. 월 30달러 정도의 이용료를 받고 있는 포르노 사이트에 김군이 건네준 패스카드(ID+패스워드)를 입력하면 공짜로 포르노를 볼 수 있다. 김군은 FTP라고 불리는 정보공유 서버에서 ‘와레즈 도사’들이 올려놓은 패스워드 검색프로그램을 내려받아 친구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없는 게 없다.” 네티즌들이 와레즈(Warez) 사이트를 두고 하는 말이다. ‘와레즈’ 또는 ‘웨어즈’로 불리는 ‘Warez’는 ‘Where is it’의 약자로 ‘쓸 만한 것을 찾아다닌다’는 뜻(상자기사 참조). 최근엔 와레즈 사이트뿐만 아니라 P2P(peer to peer·개인 대 개인) 파일 공유 프로그램까지 기승을 부리면서 한국은 디지털 불법복제의 천국으로 간주되고 있다. 콘텐츠 개발자 네트워크인 데브피아 최우인 대표는 “월드컵을 통해 각인된 ‘정보기술(IT) 강국’이라는 국가 이미지와 자긍심이 불법 소프트웨어로 인해 크게 훼손됐다”고 밝혔다.

    소비자 입장에선 공짜 … 제작사는 억장 무너질 판

    소비자로서는 와레즈 사이트를 통해 프로그램을 무료로 사용하는 것을 마다할 까닭이 없다. 컴퓨터에 능통한 네티즌이라면 비밀번호나 백도어(Back Door·비밀 출입구) 정보가 올라오는 와레즈 게시판에서 얻은 패스카드로 ‘텔리포트’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해 유료 성인사이트의 내용을 쉽게 ‘퍼올’ 수 있다. 또 유즈넷 뉴스그룹 등을 통해 해적판 영화의 디지털 버전이나 최신 게임 소프트웨어를 다운로드 받을 수도 있다. 컴맹에 가까운 네티즌이라면 “고수님들, ○○의 아뒤(ID)와 패스 하나만 부탁해요.” “고수님들, ○○을 꼭 보고 싶어요.”라는 호소문을 와레즈 게시판에 남겨놓으면 곧 답장이 날아온다.



    그러나 게임 제작사나 영화 제작사 입장에선 억장이 무너질 노릇. PC게임 개발사 및 유통사 관계자들은 불법복제물에 이미 백기를 든 상태라고 말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와레즈 사이트 및 P2P 파일 공유 프로그램이 번성해 ‘락(보안장치)’을 걸어봐야 수일을 버티지 못하고 해킹 당하기 일쑤”라고 말했다. 소프트웨어 유통업체 한빛소프트의 경우 PC용 게임 ‘워크래프트3’를 출시하자마자 해적판이 인터넷을 통해 돌아다녔다고 한다. 해적판은 미국 P2P 사이트를 통해 국내에 유입된 이후 3~4일 만에 인터넷을 통해 유통됐다. 동영상은 물론 한글 패치(외국판 게임의 한글자막)와 CD키 생성기까지 완벽하게 갖춘 이 해적판은 정품과 큰 차이가 없는 데다 손쉽게 구할 수 있어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최근 해커들에게 공격당해 곤욕을 치르고 있는 미스코리아 출신 탤런트 성현아씨와 성씨의 소속사인 EMG네트워크는 대표적인 해킹 피해자다. 성씨의 누드사진 170여장은 사이트 오픈 직후 해커들에 의해 유출됐다. 누드사진들은 인터넷 사이트 오조숍(www.ozzoshop.com)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사이트 문이 열리자마자 네티즌들이 몰려들어 서버가 다운됐고, 서버 증설과 해킹 방지를 위해 약 4억원을 들여 사이트 보수에 나선 사이 100여명의 ‘최고수 해커’들이 집중 공격, 누드사진 전체를 훔쳐 갔다. 이렇게 해킹 당한 누드사진들은 13일 오후 서너 단계의 와레즈 도사들을 거쳐 인터넷 공유 사이트와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일반 네티즌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최근엔 성씨의 누드사진을 돈을 받고 보여주는 해적 사이트까지 만들어졌다.

    한편 EMG네트워크는 누드사진을 유료로 공개하면서 최대 100억원 이상의 수익을 예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EMG네트워크 오재헌 대표는 “밤새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번 일로 누구보다도 성현아씨가 상처를 받았다”고 전했다. 해킹 사건 이후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있는 성씨는 시사월간지 ‘신동아’ 2003년 1월호에 실린 인터뷰를 통해 “한마디로 참담하다. 포르노 사이트에서 내 사진이 떠돈다고 생각하니 잠이 안 오더라. 회사측에서 보안을 이중삼중으로 했다기에 해킹을 당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심경을 밝혔다.

    사이버 해적 만물상 떴다

    성현아씨의 누드사진 170여장은 사이트 오픈 직후 해커들에 의해 전부 유출됐다.

    그렇다면 ‘와레지언’들은 어떻게 ‘해적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와레즈 그룹은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고 있어 그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다. 개봉 영화를 인터넷 동호회에 올리고 있는 와레지언 김철민씨(가명)는 영화동호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와레즈에 입문했다. 김씨에 따르면 상영중인 영화의 복제 파일을 만드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선 홍콩 등지에서 불법으로 만들어지는 DVD 타이틀을 인터넷으로 주문한다. 이틀 남짓 걸려 타이틀이 도착하면 DivX 압축 프로그램을 이용해 컴퓨터에서 사용할 수 있는 형식으로 타이틀을 변환한다. 김씨는 “혼자 보기 아까워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시작했다”면서 “계급이나 자본에 관계없이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게 인터넷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미국에서 만든 파일을 내려받는 경우도 있다. 미국 와레지언들은 고가의 첨단장비로 무장, 영화 개봉 직전이나 소프트웨어 출시 직후 파일을 인터넷에 뿌린다고 한다. 이들은 수억원대의 고가 장비로 디지털 파일을 만들어내는데, 미국 내 와레즈 그룹들이 공유 서버에 파일을 올리면 삽시간에 이 서버에 연동돼 있는 다른 서버를 통해 전 세계로 퍼진다. 해커 박만수씨(가명)는 “미국 와레지언들이 만들어 유포하는 영화 파일의 경우 전 세계에 퍼지는 데 한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며 “이들이 사용하는 FTP 서버(일종의 공유 서버) 주소를 확보하면 국내 네티즌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데 반나절이면 충분하다”고 귀띔했다. 이런 방식으로 웹을 돌아다니는 영화 파일이 2만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와레지언 대부분 돈보다는 실력 과시 목적

    사이버 해적 만물상 떴다

    와레지언들은 경쟁적으로 개봉 영화의 동영상과 한글자막을 유포시킨다.

    와레지언 간의 보이지 않는 ‘스피드 경쟁’도 치열하다. 1~2년 전만 해도 한 와레지언이 “특정 영화나 소프트웨어를 구해놓겠다”고 선포하면 다른 와레지언들은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엔 릴리즈 그룹(와레즈 파일을 공유하는 모임) 간의 ‘실력 전쟁’이 벌어지면서 ‘꾼’들 사이에선 ‘본 사람만큼 해킹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경쟁이 불을 뿜는다. 성현아씨의 누드사진의 경우도 해킹에 성공한 해커들이 수백명에 이른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개봉 영화 와레즈 파일의 경우엔 최소 10여개 버전이 존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와레즈 그룹은 동영상을 전문적으로 공유하는 그룹과 대본을 번역해 공개하는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들 사이의 경쟁 또한 치열하다. ‘동영상이 먼저 떴느냐, 자막이 먼저 떴느냐’를 놓고 자존심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 국내에 와레즈 영화가 만연하게 된 데는 ‘자막그룹’의 역할이 컸다. 최근엔 동영상을 구동하면 자동으로 웹에서 자막을 찾아 덧씌워주는 프로그램까지 보급돼 있다. 네티즌들은 와레즈 도사들이 만들어놓은 파일을 안방에서 느긋하게 즐기고 친구들에게 전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자막그룹으로는 C, S, P 등이 유명한데, 이들은 번역팀, 씌우기팀, 수정팀 등으로 나뉘어 분업 형태로 운영된다. 자막팀들은 “동영상과 달리 자막을 유포하는 것은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현행 저작권법 제27조는 “공표된 저작물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아니하고 개인적으로 이용하거나 가정 및 이에 준하는 한정된 범위에서 이용하는 경우에 그 이용자는 이를 복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 대본에 대한 권리가 없는 상태에서 멋대로 번역해 ‘유포’하는 행위의 경우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와레지언들은 왜 수사기관의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사실상의 불법행위를 저지르는 것일까. 와레지언들의 대다수는 영화·포르노·게임 마니아거나 실력을 과시할 목적으로 해킹에 나선 사람들이라 프로그램을 유포하면서 돈을 벌거나 이득을 취하지는 않는다. 또 한국 영화에 대해선 해킹을 자제하고, 국내에서 개발한 소프트웨어는 해킹하지 않는 것도 불문율로 통한다. 여기에 정보 공유를 주장하는 ‘카피 레프트’의 개념이 이들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사상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와레지언 이모씨(20대)는 “비정상적으로 가격이 부풀려진 소프트웨어를 돈을 주고 구입할 수밖에 없는 소비자들은 정보화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라며 “와레지언들은 소프트웨어의 소스 개방과 무료 사용을 촉구하는 카피 레프트 정신을 실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모씨(30대)는 “영화의 경우엔 저작권 측면에서 다소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컴퓨터 프로그램의 경우엔 업체가 가격을 현실화하지 않는 한 카피 레프트 운동은 정당하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일부 와레지언들이 개인간의 배포 행위를 넘어 해킹한 콘텐츠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릴리스 그룹에 의해 해킹된 소프트웨어가 웹상에서 거래되고 있는 것이다. 포르노 사이트의 ID 패스워드를 돈을 받고 거래하는 일은 이미 만연돼 있다. 인터넷을 통해 무단으로 상용 프로그램을 배포하고 유통하는 것은 불법행위임이 분명하다. 물론 이런 프로그램이나 파일을 내려받아 쓰는 일도 엄격히 따지면 불법이다. 와레즈 사이트를 독버섯에 비유하면, 독버섯에 양분을 주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네티즌들이다. ‘적잖은 돈을 주고 콘텐츠를 구입할 것인가’ 아니면 ‘공짜로 소프트웨어를 얻기 위해 검색창을 두드릴 것인가.’ 네티즌들이 계속 후자를 선택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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