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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칼럼

‘간판 문화’는 가라!

  • < 김성곤 / 서울대 교수·영문학 >

‘간판 문화’는 가라!

‘간판 문화’는 가라!
똑같은 순간에 두 여자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실려온다. 그런데 한 여자는 신체는 멀쩡한데 뇌가 죽었고, 또 한 여자는 사지가 떨어져 나갔지만 뇌는 아직 살아 있다. 의사는 남편들의 동의를 얻어 살아 있는 뇌를 훼손되지 않은 신체에 이식하고, 그렇게 해서 새로운 여자가 탄생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 두 남자가 모두 살아난 여자를 자기 아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그 여자는 과연 누구의 아내인가? ‘외모(육체)인가, 아니면 내용(정신)인가’ 하는 문제를 현대 의학윤리와 접목시켜 다룬 이 이야기는 예전에 방영된 어느 미국 텔레비전 심리극의 내용이다. 이 영화에서 여자는 물론 자신의 두뇌가 기억하는 남편을 따라간다. 그러자 살아난 여자가 분명 자기 아내의 모습인데도 다른 남편은 그녀를 포기하고 떠나간다. 정신을 담고 있는 그릇인 육체는 사실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외모·학벌·재력만 따질 텐가

그러나 한국사회의 기준은 언제나 외모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외모가 자기 아내인 남편은 끝까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것이고, 또 다른 남편 역시 새로 생긴 아내가 미모를 갖추고 있는 한 절대 그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새 아내가 예전 아내보다 못생겼다면 우리는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할는지도 모른다.

간판은 한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취직과 결혼에 간판이 좋지 못하면 찬밥 신세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기업들이 면접에서 실력보다 먼저 출신대학과 인물과 피부색을 보며, 신랑 신부들이 결혼을 앞두고 애정보다 먼저 상대방의 간판과 조건, 외모를 따진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간판이 초라한 사람이나, 한번 발을 잘못 들여놓은 사람은 그 어두운 과거를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슬픈 현실이다. 우리는 불행히도 인간을 존엄성을 가진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간판으로 규정하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의 정신이나 내용, 실력보다 외모와 학벌, 재력이 중요시되는 간판사회에서 성형외과가 번창하고 명문대학 입시가 전쟁터가 되며, 어떻게든 돈을 벌기 위해 사기와 부정이 횡행하는 것은 사필귀정이다. 또 간판이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패거리 문화가 발생한다. 한국의 고질적 풍토병인 파벌 형성과 타자의 배제는 아직도 정계와 재계는 물론 학계와 문단에도 만연해 있고, 학연 지연 혈연을 통해 마치 복잡하게 얽힌 모세혈관처럼 온 나라를 뒤덮고 있다.

패거리와 인맥을 동원해야만 일이 이루어지는 사회라면 뇌물 수수와 부정부패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또 만일 인간을 연구하고 올바른 인성을 가르친다는 인문학 전공자들이 같은 간판 아래 모여 패거리를 이루고 서로를 정통과 비정통으로 나누어 다툰다면 인문학의 위기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작가와 평론가들이 새로운 문학 창출에는 관심이 없고 당파를 만들어 문학권력만 행사하려 한다면 문학의 위기 또한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인문학이나 문학의 본질은 바로 그렇게 하지 말자는 데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정통이니 주류니 하는 용어들이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정치정당에는 아직도 주류와 비주류가 있어 서로 다투고 있다. 주류가 먼저 정착한 사람들을 지칭한다면 그건 ‘원주민’이나 ‘토착민’일 뿐이고, 많은 숫자를 의미한다면 그건 ‘다수’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 정치인들은 주류와 비주류의 대립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 정치인 중 단 한 사람만이라도 상대방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아량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국민은 바로 그런 사람에게 표를 몰아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간판 문화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인적자원부가 최근 각종 규제를 풀고 학교장의 재량권을 강화한 것이나, 형식적인 2월 수업을 없앤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내친김에 수업일수까지 외국처럼 학교장 재량에 맡기기 바란다. 또 간판을 중요시하지 않으면 월드컵 경기의 승패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꼭 이겨야 한다는 ‘간판’보다 세계 각국과 흥겨운 한판 잔치를 벌인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도 신동엽 시인의 시처럼 외칠 수 있어야만 한다. “껍데기는 가라!”고.



주간동아 328호 (p100~100)

< 김성곤 / 서울대 교수·영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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