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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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세계야 게임의 세계야

  • < 김시무/ 영화평론가 > kimseemoo@hanmail.net

    입력2003-08-01 13: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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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의 세계야 게임의 세계야
    어쩌면 올해 제작된 한국영화 가운데 최고의 화제작이 될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하 ‘성소’)이 마침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시사회장은 성황을 이루었다.

    일반 극영화 가운데 최고의 제작비를 들인,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결정판이라는 점이 먼저 관심을 끌었다. 제작사인 기획시대는 “총 제작기간 4년에, 92억원의 제작비가 들었다”고 밝혔다. 기획 당시 예산은 33억원이었지만 제작하면서 액수가 과다하게 초과된 것. 그러나 완성도 있는 작품만 나올 수 있다면, 사실 제작비 초과가 문제겠는가.

    ‘성소’가 화제작이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여주인공 임은경 때문. 광고계에서 ‘베일에 싸인 요정’으로 여겨졌던 그녀가 마침내 이 영화를 통해 대중과의 접속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현실의 세계야 게임의 세계야
    임은경의 극영화 출연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녀가 광고를 통해서 보여주었던 신비한 이미지를 영화 ‘성소’에서 고스란히 가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임은경이라는 한 배우의 연기자로서의 자질보다는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던 모종의 후광이 더 중요한 캐스팅 조건이었다는 것이다.

    만약 임은경이 없었다면 ‘성소’의 프로젝트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이렇게 볼 때 ‘성소’는 광고와 영화 간의 경계를 허문 최초의 극영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말하는 경계 허물기의 실례를 ‘성소’는 영화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성소’를 화제작으로 만든 결정적인 요소는 바로 장선우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공동 작업의 산물인 영화에서 감독의 존재는 이중적이다. 제작팀을 이끄는 지휘관의 임무와 작품에 영혼의 숨결을 불어넣는 예술가로서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세계야 게임의 세계야
    대부분의 평범한 감독들은 제작팀을 이끄는 지휘관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머무른다. 보통 한 편의 상업영화를 제작할 때 잘 쓰여진 시나리오가 주어져 있고 각 분야에 능력 있는 스태프가 포진해 있다면, 감독은 누가 맡아도 상관없다. 통솔력만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작품에 영혼을 불어넣는 과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모호한 구석이 많은 이 과제를 제대로 실현해온 감독들을 우리는 특히 작가라고 부르고 있다. 나아가 한 개인의 독창성, 스타일 그리고 내면세계가 아우러진 영화를 우리는 작가주의 영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 영화판에서 이런 작가라는 이름에 걸맞은 감독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작가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몇 안 되는 감독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이가 장선우다..

    현실의 세계야 게임의 세계야
    사실 ‘성소’는 100억짜리 프로젝트답게 철저하게 상업영화의 길을 걸었어야 했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지휘봉을 움켜쥔 사람은 철두철미하게 자기만의 개성과 스타일을 고집해온 장선우 감독이었다. 말하자면 상업주의와 작가주의가 충돌한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불가피하게도 곳곳에서 균열을 드러내고 있다.

    ‘성소’는 음미하는 영화가 아니라 대중의 취향에 영합해야 하는 상업영화답게 즐기는 영화가 되어야 마땅했다. 머리로 보는 생각하는 영화가 아니라 즐기는 영화여야 했다는 말이다.

    현실의 세계야 게임의 세계야
    제작사측도 ‘즐기는 영화’에 목표를 두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마치 게임에 빠져들듯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이전의 한국영화에서는 맛보지 못했던 흥미로운 영상체험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영화는 극중 현실과 극중 주인공들이 벌이는 게임을 중심축으로 하여 전개된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현실의 세계이고 어디까지가 게임의 세계인지에 대한 명쾌한 경계는 없다. 게임이다 싶으면 현실이고 현실이다 싶으면 게임이다. 말하자면 ‘성소’는 광고와 영화 간의 경계 허물기를 넘어 게임과 영화 간의 경계마저 허물고 있는 셈이다. 당연히 관객은 헷갈리기 십상이다. 영화가 너무 어렵게 다가온다.

    현실의 세계야 게임의 세계야
    감독은 “이 영화는 한 번 보고 말 그런 종류의 영화가 결코 아니다”고 말했다. 좀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여러 번 보고 음미해야 한다는 것. 그런 차원에서 감독은 영화 곳곳에 게임을 풀어가는 힌트를 깔아놓고 있다. 장자(莊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을 연상시키는 나비와, ‘모든 모습이 모습 아님을 본다면 본디 그러한 모습을 보리라(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라는 ‘금강경’ 구절의 등장이 그렇다.

    이 밖에도 게임과 영화의 본질적 차이에서 오는 괴리를 드러내는 곳이 적지 않다.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은 같은 종류의 게임을 한 번 하고 끝내지는 않는다. 처음에 서툴렀던 게임도 자꾸 하면 할수록 기술이 늘고 요령이 생겨서 더 많은 점수를 얻어내며 그 게임에 매료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다르다. 아무리 게임을 소재로 했다 해도 영화 속 게임은 관객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다. 바로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단판 승부’를 해야 하는 상업영화의 속성과 반복 실행을 해야 재미가 배가되는 게임 간의 어쩔 수 없는 괴리감. 어쨌든 감독은 ‘성소’라는 게임에 관객의 동참을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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