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핵실험(지난해 10월9일) 직후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 씨가 북측 인사를 만나면서 개통된 ‘비선라인’의 실체는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다. 지난 6개월간 권력 핵심부에서 벌어진 일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서울-평양-베이징을 오가며 이뤄진 남북간의 줄다리기는 출렁거리는 한반도 정세만큼이나 반전을 거듭했다. 180일에 걸친 드라마의 주연들과 그 전개 과정을 먼저 톺아본다. - 편집자
제20차 남북 장관급회담이 열린 3월1일 이재정 남측 수석대표(왼쪽)와 권호웅 북측 수석대표가 평양의 명소 옥류관에서 냉면으로 점심식사를 한 뒤 대동강변에서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있다.
3월11일 베이징에서 김하중(주중대사)이 주최한 만찬이 열린다. 나흘간의 평양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이해찬(전 국무총리)과 이화영(열린우리당 의원)은 달떠 있었다. 일행이 중국 선양(瀋陽)을 거쳐 북한 고려민항편으로 평양에 들어간 건 3월7일.
이들은 김영남(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만나는 등 평양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정을 소화했다. 3월12일 이해찬 일행이 인천공항에 도착한 뒤 근거 없는 추측과 분석이 뒤를 이었다. 이해찬과 이화영이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애드벌룬을 띄웠기 때문이다.
“남북정상회담은 6자회담의 성공적인 합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남북이 당사자가 돼 협정을 체결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며, 이르면 올해 안에 이뤄질 수도 있다.”(이화영)
“4월 이후에 한번 검토해볼 수 있다. 이것은 내 의견이다.”(이해찬)
언론은 이들의 발언에 분석을 곁들여 호들갑스럽게 전했다. 6·15 남북정상회담 7주년인 6월15일 혹은 광복절인 8월15일에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겠느냐는 추측도 나왔다. 2·13합의 이후 불어온 훈풍과 맞물리면서 소문은 날개를 달았다.
이해찬 일행의 방북과 관련한 남북정상회담 관련 기사를 스크랩하던 권오홍은 분노했다. 대북 희비극의 주연인 안희정(대통령 최측근), 이호철(대통령 국정상황실장), 이화영, 이해찬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추악한 정치적 화장질이다. 절대 가서는 안 될 길이라고 만류하던 그 길로 가버렸다. 정치가 이런 거라면, 그런 정치는 개한테나 줘야 한다.”
권오홍과 이들의 인연은 지난해 9월 시작됐다.
핵실험, 안희정을 몸달게 하다
2006년 10월9일, 북한의 핵실험이 터진다. 김대중(DJ) 정권 이후 계속 작동해오던 통일부-통일전선부 간의 ‘통-통 체제’는 묵묵부답이었다.
“당시엔 어떤 라인도 연결되는 게 없었다. 국정원 쪽도 꽉 막혀 있었다. 다른 라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이화영)
핵실험으로 한반도 상황은 급변했다. 2, 3차 핵실험 풍문도 떠돌았다. 서울의 권력 핵심부는 당혹스러워했다. 권오홍이 뚫어놓은 라인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던 서울이 급해진 것은 그 시점부터다.
“안희정에게 연락해 빨리 진행하라고 할게요. 잘 좀 도와주십시오. 좀 급하잖아요.”
10월15일, 이호철이 권오홍에게 신호를 보낸다. 권오홍은 서울의 A씨를 통해 이호철 안희정 등 권력 핵심부에 선을 대놓은 터였다.
안희정은 10월20일 베이징행 비행기에 오른다. 주중대사관 국정감사팀이던 이화영도 동행했다. 쿤타이호텔(昆泰大飯店)은 권오홍의 이름으로 예약돼 있었다. 리호남(참사)은 복통을 핑계로 한 시간 반 늦게 약속 장소에 나왔다. 안희정이 리호남에게 말했다.
“특사를 파견하는 문제, 정상회담을 하는 문제 이걸 의논하러 왔습니다. 이거 지금 다 했으면 좋겠고요. 방법은 공식라인(통-통)을 살려서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대통령께서 ‘어린 동업자’라고 부른 사람입니다. 수시로 뵙니다. 사실 거의 매일 뵙습니다. 그 뜻을 전하려고 온 겁니다.”
안희정은 ‘통-통’을 복원하려고 이 자리에 나온 듯했다. 권오홍이 보기에 안희정의 발언은 핀트를 잘못 맞춘 것이었다. 그가 공식라인을 거듭 언급하자 리호남은 메모장을 덮어버렸다. 리호남은 한 시간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결렬이었다.
이튿날 오전 6시 평양이 역제안을 해온다. 특사와 정상회담을 심도 있게 협의할 확정회담을 따로 갖자는 것이었다. 날짜는 11월9일 혹은 11월11일. 10월21일 오전 8시 안희정과 이화영은 쿤타이호텔 뷔페에서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뭐 좀 나온 게 있습니까?”
그동안 각종 추측보도가 난무하던 안희정의 ‘북측 인사 접촉설(說)’ ‘대북 특사설’의 전말은 이렇다. 안희정은 리호남을 만난 뒤 “이런 방식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고 이화영은 전한다. 현 정권 핵심부의 ‘원칙주의’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당시 안희정은 북측과 비공식 만남을 갖는 자체를 꺼렸다. 공작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는 걸 싫어했다.”(이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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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수상한 오보(誤報)
안희정은 10월2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권오홍을 다시 만난다. 권오홍은 중간 상황이 담긴 CD를 안희정에게 건네주었다. 11월11일로 예정된 확정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권오홍은 11월6일 베이징으로 되돌아갔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11월9일 ‘오마이뉴스’가 보도한 “노 대통령, 정상회담 대북특사 파견, 북한 6자회담 복귀, 사전 통보받았다’는 제하의 기사가 그것이었다.
“소설 수준이었으나 안희정의 베이징 방문을 알고 쓴 기사였다. 새로운 라인이 뚫리는 것을 꺼리는 세력이 정보를 흘린 것이다.”(권오홍)
권오홍은 안희정-리호남 라인에 어깃장을 놓은 이 보도를 이렇게 의심했다. 이화영의 회고도 권오홍의 당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마이뉴스의 보도는 완전 오보였다. 안희정-장성택 만남 운운한 이후의 보도도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결국 확정회담은 무산됐다. 평양이 서울의 진의를 의심했기 때문이다. 11월11일 리호남이 베이징에 나왔다. 이튿날 아침 권오홍이 들은 평양의 반응은 구체적이었다. 리호남은 곤혹스러워한다.
“다른 라인으로부터 정상회담을 포함한 모든 내용에 대한 제의가 따로 도착했다. 그쪽 인사는 이번 일의 추진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안희정이 대통령의 동업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고 이번 일은 노 대통령이 직접 챙기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대단한 혼선이 벌어졌다.”
리호남의 처지에서 서울이 연출한 일련의 상황은 프로답지 못한 것이었다. 리호남은 권오홍에게 제3의 제안을 해온다.
“현시점에서는 베이징 혹은 제3의 장소에서의 미팅(확정회담)이 의미를 잃었다. 안 선생(안희정)이 차라리 평양으로 와서 만날 사람들과 모두 만나는 것으로 결정해주길 바란다.”
11월12일 오후 2시 권오홍은 베이징발 서울행 비행기에 오른다. 비행기는 40분 연착했다. 권오홍이 약속 장소인 서울 강남구 르네상스호텔 뒤편의 일식집에 도착한 건 오후 7시30분. 그는 리호남의 제안을 안희정에게 전했다. 그러나 안희정은 10월20일 베이징 첫 접촉 때로 되돌아가 있었다. 안희정은 베이징에서 돌아온 뒤에도 새 라인에 대해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된 바에는 아예 공식라인으로 하면 어떻습니까?”
서울의 답변이 나오기까지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11월13일 오후 5시께 이화영은 권오홍에게 (안희정의 방북이) 조건부로 컨펌(confirm)됐다고 전한다.
“조건부로 컨펌된 거라고 생각하십시오.”(이화영)
“조건부라는 게 다른 의미가 있습니까?”(권오홍)
“사실상 오케이된 겁니다.”
“회장(대통령)의 뜻까지 포함됩니까?”
“네, 그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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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핵심부, 오락가락하다
권오홍의 기획으로 시작돼 희비극으로 끝난 드라마의 서울 측 주연은 4명이다. 이호철 안희정 이화영 이해찬. 노무현(대통령)은 적어도 이 라인에서만큼은 조연이다. 노 대통령은 권오홍 라인과 공식라인의 줄타기에서 공식라인 쪽에 무게를 실었다. 기존 라인과 밀접하게 정보를 공유한 이호철의 인식도 노무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우리끼리만 아는 걸로 하죠.”(안희정)
“누구 누구요?”(이화영)
“나하고 이 의원, 이 실장, 이 총리, 대장(대통령) 이렇게 다섯만 하죠. 비서실장은? 빼죠! 많이 알면 안 좋아요.”
권오홍이 기록한 안희정과 이화영의 대화다. 이병완(당시 대통령 비서실장)도 비선라인의 구축과 전개를 몰랐던 셈이다. 11월14일 이화영이 전화로 권오홍을 찾는다. 그가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번 방문(안희정의 방북)을 한 템포 늦춰 바깥에서 한 번 더 만나보고 진행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뜻을 전했다.”
당시 리호남 라인에 대한 권력 핵심부의 인식은 “과연 믿을 수 있느냐”에 모아졌다고 한다. 베이징에서 공작하듯 리호남과 접선한 안희정도 그랬다.
‘안희정, 이호철이 과연 핫라인으로 기능해온 공식라인의 틀을 넘어설 수 있을까?’
‘통-통 체제’는 박찬욱(영화감독)이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묘사한 그것과 비슷하다. 권오홍은 이를 ‘화장질’이라는 원색적인 단어로 폄훼한다.
권오홍은 고민한다. 미룰 것인가 진행할 것인가. 권오홍에게 비친 안희정도 마찬가지였다. 권력 핵심부는 한여름 소나기를 연상케 하듯 오락가락했다.
“이해찬을 포함해 외부에서 한번 보라.”(11월15일 오전)
“안희정이 원래대로 밖에서 보고, 이해찬이 특사로 가는 것으로 협의하라.”(같은 날 오후)
권력 핵심부는 이즈음 기존 라인과 새 라인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개 라인을 함께 돌렸다”(이화영)고도 볼 수 있다. 새 라인 대한 인식은 다소 부정적이었다. 이화영이 노무현의 반응을 권오홍에게 전한다.
“회장(대통령)이 특(특사)으로 갈 사람을 포함해 한 번 더 외부에서 만나보라고 해 고민이다.”
특사는 안희정에서 이해찬으로 변경돼 있었다. “안희정은 신분이 그렇다 보니 밖에서 만나라는 것이 대통령의 의견이다. 밖에서 만나더라도 원래 안대로 특사는 이해찬 전 총리가 들어간다. 제3의 장소에서 다시 한 번 더 만나라는 것은 대통령의 뜻이다. 우리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노출이 됐는데도 일이 잘 안 되었을 경우 안희정의 부담이 너무 크다.”
권오홍의 전언을 들은 리호남은 당혹스러워한다. 이미 조정된 내용을 통째로 바꿔야 했기 때문이다. 평양에선 이런 말도 나왔다고 한다. “여기도 사람 사는 덴데, 와서 아무것도 못 가지고 갈 걱정이나 하고. 우리가 뿔 달린 짐승인가!”
권오홍은 “제3의 장소에서의 미팅 제의를 평양이 거부하고 있다”고 서울에 전한다. 11월17일 서울의 결론은 간단했다.
“특사로 이 전 총리가 바로 가는 일정을 협의해달라.”
안희정은 “내가 움직이는 것은 어렵다”고 못을 박았다. 서울이 ‘앞도 뒤도 없는’ 외교적 프로토콜을 만든 셈이다. 안희정이 방문할 것으로 여겼던 리호남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평양은 권오홍에게 “특사 이전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특사로 건너뛸 수는 없다”는 뜻을 전한다. 이 즈음 정부 내 ‘공식라인’은 평양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리호남도 중국에서 ‘공식라인’의 인사를 만났다. 권오홍에게도, 권력 핵심부에도 교통정리가 필요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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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50만 달러를 요구하다
11월18일, 리호남과 권오홍은 대안으로 이화영을 점찍는다. 안희정이 개인 사정으로 못 가게 됐다는 편지를 써주고, 이화영이 이 문제를 처리할 것이라고 밝히면 프로토콜은 갖추게 된다는 판단이었다. 리호남과의 논의를 마무리한 권오홍이 서울과 접촉한다.
“찬(이해찬) 선생의 서신이 필요하다. 안(안희정) 선생이 지난번 만난 사람 앞으로 보내는 서신도 필요하다. 찬 선생의 서신은 가볍게 쓸 말 쓰면 될 것 같고, 안 선생의 서신은 ‘개인 사정으로 못 가게 되어 추진하던 모든 일은 화(이화영) 선생이 전권을 가지고 하니 잘해달라’는 내용이 들어가면 될 것 같다.”
안희정이 머뭇거릴 때 평양의 고질병이 튀어나왔다. 평양 쪽의 체면이 깎였으니 성의를 보여달라는 거였다. 안희정과 이호철, 이화영이 오락가락하면서 원래 없었던 옵션 50만 달러가 붙은 것이다. 서울이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특히 안희정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이런 식으론 절대 안 된다.” 이호철의 인식도 마찬가지였다.
11월21일 저녁 권오홍은 롯데호텔 중식당으로 향했다. 이화영은 먼저 나와 있었다.
“힘들죠?”(이화영)
“제가 이 전 총리를 직접 만나 설명드려야 하지 않을까요?”(권오홍)
안희정이 도착했다.
“고생 많으시네요. 저쪽의 입장은 그대로입니까?”(안희정)
“네, 제가 보내드린 대로입니다.”(권오홍)
“변할 기미는 없습니까? 우린 그렇게는 못하는데…. 그런 옵션이 안 붙으면 제가 갈 수도 있어요. 옵션을 수용하는 건 안 됩니다. 이건 대통령과 소주를 마시면서 한두 번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안희정이 처음부터 평양의 제안을 따랐다면 옵션은 붙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즈음부터 안희정은 주연에서 조연으로 바뀐다. 리호남의 처지에선 서울이 오락가락해 일을 꼬이게 만든 셈이다. 이튿날 이화영은 서울의 최종 의견이라면서 권오홍에게 이렇게 전했다.
“위의 뜻은 이렇다. 원칙을 지켜라. 현금이 아닌 원하는 현물을 보내주겠다. 어떤 경우라도 ‘책잡힐’ 일은 하지 마라.”
11월26일 첫 비행기로 이화영이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는 쿤타이호텔 스위트룸에 권오홍의 이름으로 투숙했다. 문제의 핵심은 안희정이 평양행을 거부하면서 불거진 옵션이었다. 이화영과 리호남은 정오께 만났다. 리호남이 돼지농장 얘기를 꺼낸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돼지농장은 할 수 있나요? 1만 두짜리로.”(리호남)
“그건, 가능하죠.”(이화영)
리 참사는 면담이 끝나자마자 평양과의 소통을 위해 베이징 북한대사관으로 갔다.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평양은 11월27일 이화영과 권오홍의 이름이 적힌 초청장을 보내온다. 돼지농장이 옵션이 된 셈이다.
(이화영은 12월16일 평양을 방문해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한국방정환재단 명의로 민화협과 돼지농장추진합의서를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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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영, 평양 눈구경 가다
12월16일 오전, 이화영은 권오홍과 함께 11시30분 평양으로 출발하는 JS152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축구선수들과 뒤섞여 탑승 수속을 밟았다. 리호남이 “나는 게이트를 열어주는 사람이니, 이제 이 선생이 잘해야 한다”면서 웃었다.
한 시간 반쯤 날았을까? 비행기의 창을 통해 속살을 드러낸 평양의 하늘은 눈부셨다. 순안비행장 VIP실로 마중 나온 사람은 민화협의 박경철 부회장. 그는 이화영을 서울과 금강산에서 두 차례 만난 적이 있다.
“화영 선생, 오랜만입니다. 기억나시죠? 금강산에서도 뵈었죠. 우리 같은 테이블에 있었으니까. 그때 인상이 참 좋았어요.”
서울에 17번 넘게 다녀왔다는 김성혜(참사)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화영 일행은 개선문에 잠시 들렀다가 고려호텔로 이동했다. 고려호텔 3층 식당의 저녁 만찬에서 박경철은 대남사업 일꾼답게 너스레를 늘어놓았다.
이화영이 “지금까지 평양에서 노 대통령의 의견이라며 전달받은 것 대부분이 대통령과의 독대를 통해 얻어진 게 아니며, 임의성이 가미된 것”이라고 말하자 평양 측 인사들은 얼마간 놀라는 눈치였다. 이화영은 서울의 권력 핵심부에 대해 설명해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호철 실장을 잘 모릅니다. 대통령께서 부산에서 변호사로 일할 때, 그 사람의 담당 변호사였어요. 당연히 자주 만나고, 그러다가 나이는 어리지만 그 사람에게 마음에서 우러난 감화를 받은 것이죠. 그래서 중용하는 겁니다. 나는 그 사람을 ‘호빵형’이라고 부르는데 참 괜찮은 사람입니다. 한번 같이 (평양으로) 초청해주셔도 좋습니다.”
권오홍의 기록에 따르면 이화영은 이날 노무현의 뜻이라며 크게 네 가지를 전달한다.
1. 개인적으로는 일전에 보낸 편지가 (김정일 위원장에게) 잘 전달됐는지 반드시 확인하고 싶다. 또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싶다는 걸 전하라. 방식이나 자리는 어떻든 관계없다. 개성도 좋고 금강산도 좋다. 개성이라면 왔다 갔다 하면서 수시로 봐도 좋다.
2. 뜻을 정확하게 교환하기를 바란다면 특사를 받아라. 12월 말이나 1월 초에 받고, 이후 한 달 이내에 정상회담을 하자.
3. 무엇을 토의하고 결정해도 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다.
4.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본질적 협력을 해보자. 그러기 위해 필요한, 크든 작든 할 수 있는 일을 찾자. 정치든 경제든 할 일이 많다.
고려호텔의 만찬이 끝날 무렵 눈이 내렸다. 12월17일 아침엔 폭설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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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민에 빠지다
12월20일 오전, 평양은 돼지농장 고찰단이 1월21일부터 중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방정환재단 명의의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권오홍에게 요청한다. 그러나 이화영은 고찰단에 보낼 초청장은커녕 평양에 보내기로 한 방문감사 편지도 보내지 않았다. 이화영 또한 앞으로의 포지셔닝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장(대통령)이 대단히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화영은 12월26일 전화통화에서 권오홍에게 이렇게 말했다. 평양 방문이 특사 및 정상회담과 관련해 알맹이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즈음엔 기존 라인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권오홍이 화장질에 익숙해졌다고 폄훼하는 그 ‘공식라인’이다.
“대통령은 많은 기대를 했던 듯하지만 결과가 없다 보니 ‘에이 집어치워라!’는 식으로 나온 모양이고, 이호철은 ‘또 당한 것 아니냐’는 반응이었다고 한다.”(권오홍)
이화영은 헷갈렸다. 그럼에도 권오홍 라인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안(안희정)은 벌써부터 빠져 있었고, 이호철 실장은 당시 우리 라인에 부정적이었다. 요로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은 터였다.”
평양에서 ‘좋은 소식’이 나오지 않으면 이화영의 처지가 곤란해질 수 있었다. 이화영이 권오홍을 의도적으로 멀리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올해 1월3일 김성혜는 리호남을 통해 초청에 대한 재확인과 함께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요구해온다.
이튿날 오후 7시30분. 권오홍은 A씨와 함께 이화영의 지역구인 중랑구로 찾아간다. 이화영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술이 제법 돌았을 때 이화영이 말했다. “다 잘될 겁니다, 권 선생 바라는 대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십시오.”
이날 이화영은 초청장 초안을 권오홍에게 보낸다. 내용은 이랬다.
‘2007년 1월15일부터 10일간 돼지사육장 고찰과 관련하여 귀측의 대표단 6명이 중국 지역을 방문하는 데 대해 우리 재단은 항공비를 포함해 체제비 일체를 담보함을 재차 확인드립니다. 좋은 고찰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화영이 보낸 초청장과 편지에 대한 평양의 반응은 1월5일 나온다. 고찰단의 중국 방문 일정은 1월25일로 재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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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공식(公式)대로 가다
“묘한 일이 있는데요. 다른 쪽에서 치고 들어왔어요. 자기네들 템포도 있으니 거기에 맞춰달라고 하네요. 개입하는지 좀 번거롭네요.”
1월5일 오후 4시30분께 이화영이 권오홍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안 되죠. 거기가 끼면 또 복잡해질 텐데. 해도 좋지만 그런 식은 아니죠. 언제 그랬나요?”(권오홍)
이화영은 또 오락가락 행보를 보인다. 1월10일께 이화영은 협상라인의 정리를 요청받았다고 권오홍에게 말한다. 그러나 이화영은 권오홍을 배제한 채 라인을 계속 살려놓는다.
“거창한 프로젝트에서 열린우리당 차원의 별도 라인으로 바뀐 셈이죠. 어떻게 보면 우리가 ‘물먹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이화영)
1월17~19일 베를린에서 열린 북-미 셔틀회담은 분수령이었다. 한반도에 순풍이 불어왔고 권오홍이 깎아내리는 기존 ‘공식라인’은 탄력을 받았다. 비선의 가치가 떨어진 셈이다. 노무현은 이 즈음엔 비선라인을 사실상 버린 것으로 보인다
“(남북정상회담은) 지금 이 시기에 잘 이뤄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순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6자회담과 남북정상회담은 순서대로 이뤄져야 한다. 지금은 6자회담이 잘되도록 분위기 조성 수준에서 미국과 북한에 대해 나쁜 소리도 하고, 이렇게 하면서 6자회담이 잘되도록 하는 게 우리 정부가 할 일이다.”
1월25일 노무현의 이 발언에서 미뤄볼 수 있듯, 권력 핵심부에선 송민순(외교부 장관)의 드라이브가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적어도 12월 말부터 노무현이 생각하는 대북 루트는 ‘통-통 라인’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이호철도 마찬가지였다(그러나 권오홍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는 노무현이 ‘송민순 드라이브’가 시작된 뒤에도 비선라인을 의미 있게 돌렸다고 말한다).
1월26일, 베이징 시각은 12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화영 일행이 단호한 표정으로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이화영의 관심은 고찰단이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들고 올 사람에게 있었다. 돼지 프로젝트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원하는 답변을 못 들으면 서울로 돌아가버리고 이 라인 자체를 정리할 사람 같아 보였다.”(권오홍)
이화영의 우려와 달리 김성혜는 맨손으로 나오지 않았다. 남북한 관계의 굵직한 일을 들고 나왔다. 평양이 이해찬의 방문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공식라인에 매몰된 서울의 아마추어리즘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 사냥개를 삶아 먹다
이화영은 1월27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권오홍을 버린다. 평양 방문 때 만난 아태 인사를 통해 선양의 통전부(통일전선부)와 이해찬 방북 협의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화영의 주장은 조금 다르다.
“나는 통전부(공식라인)가 아니라 김성혜 라인을 그대로 활용했다. 권오홍을 배제한 건 북쪽에서 요청해왔기 때문이다.”(이화영)
이화영의 주장은 평양의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또 한국의 국회의원이 첫 기획자보다 아태 한 인사의 얘기만 듣고 권오홍을 배제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 대목에서 “딴 쪽에서 치고 들어왔다”는 1월5일 이화영의 발언을 떠올려보자. 권오홍의 표현대로라면 화장질이 대세(大勢)가 된 것이다.
2월13일 5차 3단계 6자회담에서 2·13합의문이 발표됐다. 이제 ‘공식라인’은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복원됐다. 통일부는 2월14일 “남북 쌍방은 제20차 장관급회담 개최를 위한 대표접촉을 15일 개성에서 하기로 했다”고 밝힌다. 남북 당국간 회담은 지난해 7월11∼13일 부산에서 열린 제19차 장관급회담 이후 7개월 만에 열리는 것이었다.
2월22일 권오홍에게 전해진 이호철의 포지셔닝은 이랬다. 이호철은 북한이 핵실험을 한 직후 서둘러 안희정을 베이징에 보낸 장본인이다.
“지난해 말로 특사와 관련된 문제는 모두 정리하고 공식라인을 재가동했다. 지금은 공식라인이 가동 중이므로 이 라인을 섞어서 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2월27일~3월1일 제20차 남북 장관급회담이 평양에서 열린다. 이재정(통일부 장관)은 3월2일 인도적 대북지원 규모와 관련해 “북측이 비료 30만t과 쌀 40만t의 지원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이는 공식라인이 완벽하게 부활했음을 알리는 공식적 신호였다.
이해찬, 도깨비처럼 방북하다
3월7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우리 민족화해협의회의 초청에 따라 위원장 리해찬을 단장으로 하는 남조선 열린우리당 동북아평화위 대표단이 평양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이화영의 설명대로라면 이해찬은 특사가 아니라 열린우리당 대표였다.
“이해찬이 라벨을 떼든 붙이든 그는 특사다. 잘되면 특사, 아니면 개인이라서 그렇지, 들고 가는 내용물은 대통령의 뜻을 담아서 간다는 점에서 그는 특사였다.”(권오홍)
이해찬은 평양으로 떠나기에 앞서 DJ와 밀담을 나눴다. 이해찬은 평양에서 DJ 방북 문제를 거론했다고 한다.
이해찬과 라인업을 형성한 북측 파트너는 아태평화위(아태)다. 이화영에 따르면 이해찬은 최승철(아태 부위원장)과 라인을 새로 뚫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권오홍이 평양의 실리론자와 협의해 추진했던 ‘남북상생 프로젝트’는 기존 라인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종전선언→(잠정) 평화협정→북-미수교로 이어지는 ‘송민순 드라이브’가 성공한다면 6·15 남북정상회담을 실현했던 공식라인에서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노무현을 매료시킨 ‘송민순 구상’이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선물을 가져올지는 미지수다.
권오홍은 탄식한다.
“나는 이제 지난 17년간, 젊은 날을 모두 바쳐 한반도가 가진 경계를 해체(解體)해보려 했던 자로서의 소명(召命)을 접고자 한다. 그동안 ‘입에 칼을 물고, 목숨을 여기저기 내맡기고 다녔던’ 이 길은 몹시 험했다. 홀가분해지고 싶다. 얼마나 남았는지 하늘만이 아는 이 생을 말이다. 새로운 삶이 어떤 것일지는 모르지만, 그곳에서도 또 해체할 것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