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24일 핀란드 헬싱키에서는 살해된 안나 폴릿콥스카야 기자를 애도하고 러시아의 열악한 인권 현실을 고발하는 집회가 열렸다
약속시간이 조금 지나 M 기자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가 호텔 현관문을 들어서 검색대를 통과하자 ‘삐익’ 하는 신호음이 울렸다. M 기자는 보안요원의 요청에 따라 소지품을 모두 꺼냈다. 그의 허리춤에서는 가스총이 나왔다. “기자들이 러시아 곳곳에서 물리적인 위협을 받으면서 호신용 도구를 갖고 다니는 게 습관이 됐습니다. 군인 출신인 사프로노프 기자가 ‘방어’에 소홀했던 게 아닌가 싶네요.” 러시아에서 기자 생활을 하는 것은 한편으론 전투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국제뉴스안전연구소(INSI)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러시아에서는 88명의 언론인이 각종 폭력으로 숨지거나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는 전쟁지역인 이라크(138명 사망)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치다. 러시아기자협회도 1993~2007년 모두 214명의 러시아 기자가 숨졌다고 밝혔다. 1년에 14명의 기자가 숨진 셈이다.
지난해 10월 러시아 남부 체첸 분쟁을 취재해오던 안나 폴릿콥스카야 기자가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숨진 뒤, 러시아 언론 현실에 대한 비판과 개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언론인 피해자는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이달 사프로노프 기자가 사망한 뒤에도 독살 위험에 처했다고 주장하는 한 여기자가 미국으로 망명을 신청했다. 러시아 일간지의 한 기자는 “취재하다 숨진 기자들이 워낙 많아 누가 죽었다는 얘기가 들려도 뉴스로 전달해야 할지 고민할 때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언론인은 청부살인 주요 타깃
‘코메르산트’지는 전쟁이 나지 않은 러시아에서 언론인 사망자가 많은 것은 “청부살인 희생자가 많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뉴욕에 본부를 둔 언론인보호위원회는 지난해부터 올 2월까지 러시아 기자 13명이 청부살해됐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2004년 9월 ‘포브스’지 러시아판 편집국장 폴 클레브니코프는 러시아 ‘100대 갑부 명단’을 발표한 뒤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이후에도 기자 청부살인 사건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청부살해로 희생된 기자들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분류하기는 힘들다.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쓴 기자에서부터 정부나 부유층을 옹호하는 기자들까지 희생자가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언론인들이 청부살인의 주요 타깃이 되는 이유도 뚜렷하지 않은데, 이는 대부분의 사건이 미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범죄분석가들에 따르면 연간 500~700건의 청부살인 가운데 진상이 밝혀지는 사건은 1% 미만이라고 한다.
러시아 경제지의 한 기자는 “자본주의 도입 이후 경제적 이해관계가 복잡해지면서 단순한 이권관계를 추적하는 언론인들이 청부살해의 희생자가 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며 한탄했다. 지난해 6월 모스크바 고급식당의 위생 문제를 취재하던 중 둔기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된 국영방송사 NTV 기자 일랴 지민 씨가 이런 유형의 대표적 희생자로 꼽힌다.
러시아에서는 킬러 고용 비용이 매우 저렴해 청부살인을 부추긴다. 지난해 9월 안드레이 코즐로프 러시아 중앙은행 부총재 청부살인 사건에서 킬러 집단이 받은 돈은 고작 1만 달러(약 930만원)였다. 살해 대상이 고위급 인사가 아닐 경우 킬러 고용 비용이 200달러 이하로 내려갈 정도다. 이와 관련해 러시아과학연구소 레오니드 콘드라츄크 연구위원은 최근 “킬러 고용비가 소송 비용보다 훨씬 적기 때문에 법보다 킬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집단이 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적발된 청부살해 집단에 대한 관대한 처분, 사회주의 붕괴 이후 국가 형벌권의 약화, 러시아 법정부패 등도 범죄를 줄이지 못하는 원인으로 꼽힌다. 소포 폭발로 숨진 일간지 기자 클레브니코프 씨 사망사건 수사와 재판도 3년째 표류하고 있다.
서방국가들은 러시아의 이러한 ‘살해 만연’ 풍조의 근본적인 이유로 러시아 사회의 인권경시 풍조, 민주주의 미성숙 등을 지적한다. 폴릿콥스카야 살인 사건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서방국가를 방문할 때마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럽 시민단체 행렬과 마주쳐야 했다. 그렇지만 러시아 국내에서는 이 같은 장면을 한 번도 볼 수 없다. 모스크바에 주재하는 한 독일 특파원은 “인권이 무시되거나 무고한 희생자가 나타나도 남의 일처럼 방관하는 자세는 스탈린 시대의 대학살과 보리스 옐친 대통령 집권 당시 무질서를 경험한 러시아인들의 관성”이라고 지적했다.
푸틴 정부의 언론통제와 시민사회의 무기력은 무고한 언론 희생자를 양산하는 구조적 요인으로 꼽힌다. 2001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사진기자 그레고리 파스코 씨는 러시아 해군이 핵폐기물을 동해에 버리는 장면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이 재판에 대해서도 ‘국경없는 기자회(RSF)’가 먼저 외국에 알렸기 때문에 일부 러시아인들이 관심을 보였을 뿐이다.
영국 출신의 한 모스크바 특파원은 “러시아의 언론 통제 정책은 ‘원시적 폭력’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일침을 놓았다. 신문사가 정부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보도를 하면 편집국장을 즉각 교체하는 게 공식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90년 전통을 자랑하는 신문 ‘이즈베스티야’는 지난해 석연치 않은 이유로 편집국장이 교체됐으며, 러시아의 마지막 민영언론으로 불리던 ‘코메르산트’의 소유자도 지난해 친(親)크렘린 인사로 바뀌었다. 시청률이 높았던 10여 개 TV 채널의 소유권 또한 정부나 정부투자기관으로 넘어간 상황이다. M 기자는 “일상적인 폭력 위협을 받으면서 정부의 부당한 보도통제와 싸우는 것은 이중 삼중의 전선을 형성한 전쟁과 다를 바 없다”고 한탄했다.
신문 구독·TV 시청 갈수록 저하
천편일률적인 친정부 언론보도에 대해 러시아 국민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갈수록 신문 구독률과 TV 시청률이 낮아지고 있다. 외국의 특파원들도 재미없기는 마찬가지.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차이퉁’의 한 특파원은 “하루빨리 러시아를 떠나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일본 ‘아사히신문’의 한 특파원은 “특파원들도 러시아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신변의 위험에 처할 수 있다”며 우려했다.
러시아 언론환경에 희망은 없는 걸까. 최근 한 주간지에서 변화의 신호가 엿보였다. 주간지 ‘블라스티’는 3월12일자에서 “러시아 관영TV가 반정부주의자들의 거리시위 장면을 보도하기 시작했다”며 흥분한 어조로 시위 분석 기사를 내보냈다. 관영TV에 보도된 내용은 3월11일 지방의회 선거를 앞두고 야당과 시민들이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에서 반정부 구호를 외친 장면. 이를 두고 일부 러시아 기자들은 “민주주의와 자유언론에 목마른 러시아 현실의 한 단면”이라며 씁쓸해하면서도 반가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