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인 러브’
영화 속에서 피터 래빗은 눈을 깜빡거리고 귀를 쫑긋거리며 자신을 탄생시킨 작가에게 다가간다. 그러다 작가가 상심하거나 우울해하면 눈치를 보다 슬며시 꽁무니를 뺀다. 이 영화는 작가와 창조물들 간의 관계를 지나칠 정도로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있다. 문학 또는 예술가들의 전기를 그린 영화는 이처럼 창조자와 창조물의 관계를 소재로 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실 예술가들의 삶은 그 자체가 영화의 소재로 삼는 데 부족함이 없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는 다른 극적인 상황들이 연출되고 그 속에서 작품들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여자친구와 마차를 타고 빈 숲을 가로지르다가 주변의 소리들에서 영감을 얻어 ‘빈 숲 속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슈베르트는 여자친구에게 버림받고 쓰다 만 교향곡 악보를 쳐들며 “이 교향곡은 결코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는데, 그것이 바로 ‘미완성 교향곡’이다. 예술가들은 이처럼 인생으로부터 재료를 얻고, 그것을 작품에 반영한다.
천재음악가 모차르트의 곡절 많은 삶은 또 어떤가. 그런 것들이 고스란히 영화로 투영되는 과정에서 시나리오 작가나 영화감독에 의해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각색된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예술가의 이름과 작품만 도용할 뿐 그의 삶과는 전혀 무관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전기적 사실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아이디어의 기반으로 삼았다. 다시 말해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재료로 삼아 멋대로 그의 일생을 날조한 것이다. 영화는 시치미를 뚝 떼고 ‘로미오와 줄리엣’과 ‘십이야’ 등 불후의 작품들이 셰익스피어의 연애담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우긴다. 영화의 집필 과정을 보면 정말 교활하기 짝이 없는 문학적 장난이다.
나중에 어떤 아마추어 감독은 이 형식을 그대로 빌려 조지 루카스가 학생 시절 겪었던 일들이 ‘스타워즈’에 영감을 주었다고 우기는 ‘조지 루카스 인 러브’라는 단편을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전기보다 그것을 기반으로 한 허구가 영화를 만드는 데 더 많은 자유와 기회를 주는 측면이 있다. 영화감독이나 작가들은 주인공으로 그리는 예술가들의 삶을 전지전능한 신의 위치에서 멋대로 조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틴 스코시즈가 ‘인생수업’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 예술가가 그림 한 편을 완성하는 과정을 그의 인생과 맞물려 보여줄 수도 있고, ‘허니와 클로버’에서처럼 주인공의 심리를 반영하는 예술작품들을 시퀀스마다 하나씩 창조할 수도 있다. 반대로 그 예술작품에 맞게 그 예술가의 삶을 조절하는 것도 가능하다. 조금 심해지면 존 카펜터의 ‘매드니스’에서처럼 한 작가가 창조한 세계가 세계 종말을 가져왔다며 시치미 뚝 떼고 우길 수도 있다. 상상은 자유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