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 대학의 한 칼리지.
옥스퍼드 대학의 최고의사결정기구는 대학의 모든 교수가 참가하는 교직원 총회다. 일상적인 업무는 부총장과 보직교수 등이 모이는 평의회에서 결정된다. 지난해 10월 구조개혁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존 후드가 이 대학의 부총장에 취임했다. 총장은 명예직이어서 부총장이 학교 행정을 책임진다. 존 후드는 뉴질랜드에 있는 오클랜드 대학에서 각종 보직을 맡으며 대학 개혁을 진두지휘한 실전 경험 보유자. 그는 취임 이후 전통을 고수하는 옥스퍼드 대학을 좀더 경쟁력 있는 상아탑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중 하나가 교수 본인과 교수가 속해 있는 단과대학, 대학교 3자가 참여해 정기적으로 교수의 학문기여도를 평가하는 연구평가제 도입이었다.
7년에 한 번씩 학과별 성적 평가
영국의 모든 대학은 7년에 한 번씩 정부로부터 학과별로 성적을 평가받는다. 정부는 교수가 저명 학술지에 기고한 논문과 저술 등을 종합평가해 성적을 매기는데, 이를 토대로 각 대학에 지원금을 차등 지급한다. 옥스퍼드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옥스브리지·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를 함께 일컫는 말)의 경우 많은 학과가 좋은 성적을 얻어 정부 지원금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런데 후드 부총장이 정부가 7년에 한 번씩 모든 대학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평가 외에 학교 자체에서 교수의 연구실적을 평가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교수들에게 더 많은 동기를 부여하고, 우수 교수를 더 지원하겠다는 의도다. 이를 통해 옥스퍼드 대학을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만들겠다는 야심 또한 엿보인다.
그러나 박봉에도 자부심을 갖고 학문에 매진하는 교수들의 생각은 사뭇 다르다. 이들은 교수연구평가제가 “학문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들은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세계적으로 저명한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자율적으로 많은 연구업적을 발표해 대학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따라서 이번에 제안된 연구평가제는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것이란 얘기다. 또 이들은 “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 질이 떨어지는 논문을 마구 발표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부총장을 지지하는 쪽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기업에서 인사평가는 상식이다. 대학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결국 논란을 거듭한 끝에 교수평가제는 최근 열린 교직원 총회에서 반대 351표, 찬성 153표로 부결됐다.
또한 이보다 더 논란이 되었던 사외이사 도입은 안건으로 상정조차 되지 않고 올해 말까지 계속 논의하기로 결정됐다. 이 문제 역시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심각한 조치로 인식되고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은 옥스퍼드 대학보다 앞서 대학 개혁을 논의해오고 있다. 우선 미국인 교수를 부총장에 임명했다. 2003년 10월 미국 예일 대학에서 인류학을 가르치던 앨리슨 리처드 교수가 케임브리지 대학의 부총장으로 임명됐다. 보수적인 케임브리지 대학이 사상 처음으로 여성 부총장을 맞은 것이다. 리처드 교수는 예일 대학 교무처장으로 재직하면서 건실하게 학교를 운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딕풍의 옥스퍼드 대학 캠퍼스(위)와 케임브리지 대학의 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인 부총장 앨리슨 리처드.
사회 현실 무시 비판 목소리 커
리처드 부총장이 취임한 지 2년이 돼간다. 그동안 그녀는 중국 대학과의 학술교류를 강화하는 등 대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다. 하지만 대학 개혁과 관련,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는 모두 3552명이다. 학과에 소속돼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와 각 단과대에 소속돼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 등 중세 때부터 이어온 독특한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칼리지’라 불리는 단과대학은 우리나라처럼 과목에 따라 설립된 학교가 아니다. 칼리지는 대학 설립 직후부터 순차적으로 설립됐다. 당시에는 학과가 없었고 칼리지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이제는 기숙사와 연구비를 제공해주며 학생들을 관리한다. 칼리지는 자체적으로 교수를 고용, 학생에게 개인 교습을 한다. 옥스브리지에만 있는 전통이다.
옥스퍼드 대학은 모두 39개의 칼리지, 케임브리지 대학은 32개의 칼리지를 거느리고 있다. 칼리지마다 재정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학생 복지나 교습도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이런 칼리지 모두 최고의 인재를 교수로 뽑는다고 자부하고 있다. 보통 1년에 한 번씩 3년 계약의 교수요원(펠로우·fellow)을 선발한다. 1명 선발에 수백명이 지원할 정도다. 선발된 연구원은 전임강사 정도의 봉급을 받으며 주로 연구를 하거나, 칼리지 소속의 학생들을 개인 교습한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교수요원에 응시한다. 학과 교수는 더 말할 나위 없다. 따라서 그들 처지에서 보면 교수연구평가제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조치다.
두 대학이 이처럼 칼리지 학생에게 개인 교습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부자’이기 때문이다. 13세기에 설립되어 왕에게서 많은 땅을 하사받았거나 졸업생에게서 많은 기부를 받았다. 옥스브리지는 영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대학들이다.
그러나 미국의 하버드나 예일 대학 등과 비교하면 옥스브리지 재정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하버드나 예일 대학은 거액의 기부금을 받아 세운 재단의 금융 이자가 전체 재정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살림이 넉넉하지만, 옥스브리지는 10% 정도다. 기금 운영 비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정부 등 다른 기관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자체 기금으로만 대학 운영이 가능하다.
옥스브리지는 800년에 가까운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시절, 이곳을 졸업한 수많은 학생들이 영국의 정가와 재계, 학계에서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 이곳은 대개의 경우 새로 건물을 짓기보다 수리해서 쓰는, 무엇보다도 전통을 중시하고 그것을 가꿔나가는 곳이다. 그러나 상아탑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급변하는 사회 현실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영국의 대학은 전통과 현실 사이에서 접점을 찾으려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