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니니의 ‘다비드’ (1623~24)
독일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내가 살던 기숙사 옆에 큰 병원이 있었는데, 종종 거기서 커다란 비명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사망한 환자의 가족이 내지르는 절규다. 그러던 어느 날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게 땅을 뒹굴며 울부짖는 이들이 대부분 검은 머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지의 죽음에 격렬한 슬픔을 나타내는 이들은 라틴계나 동양계뿐이고, 금발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요란하게 우는 것은 거의 보지 못했다.
냉정과 열정
한국의 길거리에서 이따금 목격하는 게 있다. 다 자란 성인들이 서로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멱살을 잡는 장면이다. 특히 도로에서 접촉사고가 나면, 두 운전자가 벌컥 문을 열고 튀어나와 다짜고짜 삿대질을 한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에서 독일인들은 다르게 행동한다. 사고가 나면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나와 “구텐 탁!”이라고 인사를 한 뒤 경찰관이 올 때까지 도란도란 얘기하며 기다린다.
물론 이것이 반드시 동서양의 차이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동양에도 일본처럼 비교적 냉정한 문화가 있는가 하면, 서구에도 라틴계처럼 비교적 뜨거운 문화가 있는 것이다. 유학 시절, 주세페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이 친구랑 길을 걷는데, 갑자기 베를린공대의 못생긴 건물을 보더니 두 팔을 벌리며 외치기를 “오, 수학과 건물이여. 그대를 사랑하노라” 하는 것이다.
이런 감정구조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일본의 경우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 혹은 자본주의화에 성공한 나라다. 반면 서구의 라틴계 나라들은 문화적 보수성 때문인지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근대화에 늦은 축에 속한다. 이것으로 보아 감정을 자제하는 문화는 ‘근대화’의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앨버트 허시먼의 ‘열정과 이해관계’는 중세의 열정이 근대의 냉정으로 변하는 과정을 다룬다. 중세인들은 감정이 풍부했고 그것을 즉각적으로 표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 외향적 인성이 근대화를 거치면서 어느새 제 감정을 억누를 줄 아는 내성적 인간으로 변모한 것이다. 허시먼은 세 철학자의 텍스트를 재료로 하여, 서구인의 내면에서 벌어진 이 변화의 궤적을 추적한다.
폰 스테판 로흐너의 ‘성 빌립보를 조롱한 사람’(1450~51·왼쪽). 외르크 브로이의 ‘십자가를 진 예수를 조롱한 구경꾼들’(1501년경).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정복하기 전에 지도부터 만든 것처럼, 정념이라는 미지의 대륙을 정복하려면 먼저 정념의 지도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정념론’에서 데카르트는 인간이 가진 모든 정념을 일일이 나열한 뒤, 그것들을 비슷한 것끼리 묶어 체계적으로 분류한다. 아울러 육체에서 발생한 정념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지, 당시의 해부학적 지식에 기초한 생리학적 분석을 내놓는다. 가령 사랑이라는 정념에 관한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오성이 자기 앞에 사랑의 대상을 그릴 때, 이 사고가 일으키는 인상은 동물 정기들을 여섯 번째 부분의 신경을 통해 창자와 위의 둘레에 있는 근육들로 이끈다. (생략) 그 정기들은 사랑스런 대상에 대한 첫 생각이 거기에서 일으킨 인상을 강화하면서 정신으로 하여금 이 생각 위에 멈추도록 강요한다. 이로써 사랑이라는 정념이 성립한다.”
이성으로 정념을 극복하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철학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데카르트 철학으로 무장한 고전주의 비평가들은 감정을 즉자적으로 표출하는 바로크 예술을 싫어했다. 가령 이탈리아의 조각가 베르니니의 ‘다비드’는 당시 고전주의 비평가들에게 혹평을 받았다. 왜 그랬을까? 골리앗을 향해 돌을 던지는 다비드의 찡그린 얼굴에 격정이 표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정념으로 정념을 다스리라
하지만 데카르트의 말대로 정말 이성만으로 야생마 같은 정념의 힘을 억누를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그 행위의 후과를 몰라서 하는 짓이라고 말했다. 범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아무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어디 범죄자가 범죄가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라서 범죄를 저지르는가?
똑같은 얘기를 데카르트에 대해서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정념의 메커니즘을 아는 것만으로 과연 정념의 광포한 힘을 극복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격정이 왜 일어나며, 그것을 표출하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뻔히 알면서도 격정에 휘말리곤 한다. 따라서 ‘이성으로 범죄를 막을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처럼 ‘이성으로 정념을 극복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견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사뭇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정념은 그것과 반대되는 정념, 그것보다 더 강한 정념에 의하지 않고서는 억제될 수도, 제거될 수도 없다.” 한마디로 이성은 무력하기 짝이 없어 광포한 정념의 힘을 극복할 수 없다. 따라서 정념은 오직 그보다 더 강한 다른 정념으로써만 억누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술이라 할 수 있다.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에게 욕을 하는 민중(1480년경·오른쪽).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는 말은 ‘의식은 무의식의 노예’라는 프로이트의 명제를 연상시킨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가 ‘정신’ 혹은 ‘이성’이라 부르는 의식은 무의식의 명령에 따라 욕망을 실현하는 방도를 찾는 시종의 구실을 할 뿐이다. 때문에 이성이 감히 정념을 정복할 수는 없고, 정념을 극복하려면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다른 정념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흄은 ‘격렬한’ 정념과 ‘강한’ 정념을 구별한다. 대개 격렬한 정념은 냄비와 같아서 순간적으로는 달아올라도 열기가 오래가지 못한다. 우리의 행위를 그르치는 정념은 대부분 이 부류에 속한다. 반면 어떤 정념은 온돌처럼 차분하면서도 오랫동안 지속된다. 정념을 극복하는 흄의 전략은 이 ‘격렬하나 약한 정념’을 ‘차분하나 강한 정념’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탄생
그렇다면 문제는 ‘차분하고 강한 정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격정을 억누르게 해주는 이 강력한 정념. 앨버트 허시먼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이해관계(interest)’, 즉 무한한 물질적 소유의 욕망이라고 한다. 이해관계는 격렬하지는 않으나 어떤 것보다 강하여, 다른 모든 격정을 굴복시킬 수 있다. 이렇게 ‘이해관계’로 모든 격정을 억누르는 존재, 그것이 바로 근대인이라고 한다.
근대인은 그 모든 정념의 풍부함을 단 하나의 정념, 즉 이해관계에 종속시킨다. 이성이란 이 물질적 욕망의 실현에 필요한 노하우를 제공해주는 수단일 뿐이다. ‘이해관계’가 근대인을 움직이는 동력이라면, ‘이성’은 이 욕망의 전차를 조종하는 핸들이다. 이렇게 ‘이해관계’라는 단 하나의 정념에 차가운 계산능력을 가진 근대인이 바로 ‘호모 에코노미쿠스’다.
오늘날 세계의 모든 이들은 이미 ‘경제적 인간’이 되었으나 거기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고객의 요구가 도를 넘어섰다고 느끼면, 한국의 상인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더러워서 안 팔아.”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고객이 항의하면 무조건 “스미마셍”을 연발하며, 절대로 그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순간의 불쾌함을 참고 이익의 영원성을 추구하는 일본인은 한국인보다 더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가깝다.
캥탱 마시스의 ‘화폐교환사와 그의 부인’(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근대인의 무표정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실 한국인들은 근대화의 과정이 짧아서 그런지 아직도 쉽게 정념에 휘둘리는 편이다. 격정에 휘둘려 판단을 그르칠 때, 대개의 경우 불필요한 폭력이나 이해관계의 손실로 이어진다. 하지만 정념이 풍부한 게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가령 한국민의 그 격렬한 열정이 없었다면, 제 자신의 이해를 희생시켜서라도 표출해야 했던 그 고귀한 분노가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의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냉정한 태도로 합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맘껏 기뻐하고, 한껏 슬퍼하고, 무섭게 분노하는 것이야말로 생명활동의 본질이 아닐까? 기쁠 때 기뻐하지 못하고, 슬플 때 슬퍼하지 못하며, 분노할 때 분노하지 못하는 것을 어찌 ‘삶’이라 부르겠는가. 이익과 계산만으로 살아가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실은 삶의 대부분을 희생시킨 불행한 존재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