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사의 한 전직 임원은 “밖으로 드러난 게 이 정도고, 내부 사정 복잡한 건 말로 다 못한다. 공기업 시절 구태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라며 착잡해했다.
꼭 A사와 같은 형태는 아니어도 모든 조직에는 이른바 ‘사내(社內) 정치’라는 것이 존재한다. 미국·일본 등 외국도 마찬가지여서 ‘오피스 폴리틱스(Office Politics)’라는 용어가 공공연하게 쓰이고 있다. 사내 정치 혹은 사무실 정치란 정부 조직이나 기업체의 구성원인 개인 또는 집단이 자신의 기득권과 입지를 공고히 하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행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그런 만큼 사내 정치가 만연한 조직은 업무 효율이 저하되고 과도한 스트레스가 양산된다. 한편 적정 수준을 유지할 경우는 조직의 발전을 촉진하는 순기능도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미국·유럽에선 ‘오피스 폴리틱스 컨설턴트’ 활약
사내 정치가 순기능화하려면 미국이나 유럽처럼 처방전을 공개적으로 제시하거나, 조직원이 당연히 익혀야 할 처세술 중 하나로 교육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외국에서는 직장 내 인간관계나 사내 정치로 고민하는 직장인들을 위한 ‘오피스 폴리틱스 컨설턴트’들이 활약 중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분명 있는 것을 “없다”고 강변하며 쉬쉬하기 바쁘다. 그런 가운데 갈등은 더욱 내재화하며 그로 인한 문제 또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사내 정치란 사실상 임원급 이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파워 게임의 성격을 갖는 만큼, 회사의 중요 결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인사들이 관련돼 있는 까닭”이라고 설명했다. 특정 ‘이너 서클’에 속한 사람들이 리더를 중심으로 주요 포스트를 장악, 유리한 인사 결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일반적 행태다. 그는 “그러나 임원들 중 자신이 ‘사내 정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라며 “그저 지연, 학연, 상사-부하직원의 연을 맺은 사람들끼리의 의리를 실천하는 것쯤으로 여기기 십상”이라고 말했다. 어쨌거나 이는 특정 파벌이 형성되는 계기가 지연, 학연, 혈연, 같은 부서 근무 등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2004년 6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일자리 창출을 위한 투자전략 보고회’에 참석한 이건희 삼성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최태원 SK 회장(왼쪽부터).
공기업에서 민영화한 한 대기업의 전직 임원은 “웬만한 공기업 혹은 민영화한 공기업 임원들은 저마다 국회의원 몇 명, 정치인 몇 명쯤은 후원자로 두고 있다”고 했다. 임원과 정치인은 말 그대로 상부상조,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다. ‘평화 시’에 청탁을 하는 쪽은 정치인이다. 임원들은 정치적 힘을 회사 안위에 활용한다는 명분 아래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요구까지 힘껏 도와준다. 그러나 인사철 등 ‘전시(戰時)’가 도래하면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진다. 임원들이 정치권을 등에 업고 반대파를 척결하거나 입지 확대에 나서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빽’이 없으면 일정한 수준의 능력을 갖고 있더라도 승진이나 보직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부작용으로 이어진다. 한국전력의 모 부장은 “우리 회사는 아직도 명절이 되면 상사의 집에 선물을 들고 인사 가는 문화가 살아 있다”고 했다. “10여년씩 승진을 못해 고생하다가도 외부 유력인사의 적절한 ‘코멘트’만 있으면 거짓말처럼 소원이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공기업에선 외부 정치세력과 결탁
공기업 사내 정치의 또 다른 특징은 퇴출된 임원의 상당수가 격렬히 저항한다는 점이다. 때로는 요로를 상대로 한 투서 행위를 넘어서 법정 다툼으로 비화하기도 한다.
2004년 3월 강원랜드는 정기 주주총회에서 ‘업무능력 미비’를 이유로 한장석 경영지원본부장과 김종량 카지노본부장을 해임했다. 두 본부장이 “강원랜드 김진모 대표가 잘못된 업무 지시로 회사에 28억여원의 손실을 끼쳤다”며 이사회에 대표이사 교체안을 상정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이어 김 사장은 춘천지검 영월지청에 두 사람을 명예훼손 및 무고 혐의로 각각 고소했다. “대표이사 교체안의 이사회 상정으로 명예를 훼손했음은 물론, 다른 이사와 청와대, 산업자원부 등에 익명의 투서를 배포하는 등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것이었다. 구세력과 정부의 낙점에 따라 ‘낙하산’을 타고 온 신임 사장과의 한판 승부에서 신진세력이 승리한 경우다.
반면 ‘오너’가 있는 일반 기업들은 누군가가 외부 세력을 등에 업고 내부 입지를 강화하려 하면 오히려 불이익을 주는 경우가 많다. SK그룹의 한 임원은 “국회의원 등을 동원해 섣불리 ‘운동’을 하면 한 번은 살지 몰라도 그 다음 인사에선 반드시 죽는다”고 했다. 대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오너(대주주)의 의중’이다.
이른바 ‘주인이 있는’ 회사에서의 사내 정치는 최종 인사권자인 오너에게 집중된다. 그런 만큼 임원들에게는 그의 눈에 들거나 아니면 ‘찍히지’ 않는 것이 주 관심사가 된다. 그러나 그 양태는 회사가 어떤 기업문화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크게 다르다.
오너의 스타일에 따라 때로 ‘술 잘 마시는 것’도 경쟁력으로 인정받는다.
2001년 새로 임원에 오른 47명 중 2004년 말까지 회사에 다닌 사람은 25명에 지나지 않았다. 4년 만에 절반이 탈락했을 뿐 아니라 퇴직자 22명의 평균 임기 또한 겨우 1.5년이었다. 2002년 선임된 31명 중에서도 3년 만에 40%인 13명이 떨어져나갔다. 퇴직자 평균 임기는 1.31년이었다. ‘임원은 임시직원의 준말’임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다. 파격적 발탁이 많은 만큼 느닷없는 내침도 일상화돼 있다.
‘오너 눈에 들거나 찍히지 않거나’ 주 관심사
‘발탁’의 가장 극명한 예는 현재 현대차의 ‘실세’인 최한영 사장이다. 최 사장은 뛰어난 능력으로 정몽구 회장의 눈에 띄어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부장을 거쳐 ‘이사 대우’가 된 것이 1999년. 그런데 같은 해 12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사’를 건너뛰고 곧바로 ‘상무’로 승진한 것이다. 정 회장이 최한영 당시 이사의 개인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려다, 그에게 상무급 이상에만 주어지는 ‘방’이 없음을 알고 내린 특별 조치였다. 정 회장은 ‘문득 생각이 나면’ 현대차에 입사한 임원 자녀에게 파격 승진의 기회를 주기도 한다. 그래서 현대의 인사 스타일은 종종 ‘엘리베이터 인사’라 불린다. 정 회장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하는 말이 곧 인사 결과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재계의 한 인사는 “반면 특정 ‘라인’이 밀리면 거기에 속한 차장, 과장까지도 영향을 받는 것이 현대차”라고 말했다. 그는 “초고속 승진, 충격 탈락의 일상화로 그만큼 ‘인사권자를 향한 정치’가 성하다”면서도 “능력만 있으면 파격 승진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현대차만의 장점이자 저력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몇 년 전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한 4대 그룹 고위인사는 “현대차를 포함한 범현대그룹은 결속력이랄까, 집단의식이 대단히 강하다. 현대처럼 해외에서조차 학교나 지역이 아닌 ‘출신 회사’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 일종의 생활공동체를 꾸리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 사람들은 그곳에서도 서로를 회사 다닐 때의 직급으로 부르며 엄격한 서열을 지키고 있더라”는 것이다.
반면 LG그룹은 인사에 대한 오너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특한 주주 구성 때문이다. LG그룹의 한 고위인사는 “GS그룹과 분리된 지금도 주주 일가라 할 수 있는 이들의 수가 150여명에 이른다. 그들 대부분이 일정 수준 이상의 계열사 주식을 갖고 있다. 구본무 회장이 특정 인맥은 물론 특정 계열사마저 좌지우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설명했다.
점심식사 후 회사 밖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샐러리맨들.
삼성그룹과 SK그룹도 비교적 예측 가능한 인사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삼성그룹은 현대자동차만큼은 아니어도 임원 승진과 퇴출의 폭이 상당히 크다. 삼성전자의 경우 2000년 상무보에 오른 신진 임원 49명 중 18명이 2004년 말 이전에 중도 하차했다. 5년 생존율이 63%에 불과한 것이다.
밤 10시가 넘도록 업무에 열중하고 있는 한 금융사 직원들.
최고위층 간 ‘파워 게임’과 관련해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신한지주 최영휘 사장 경질이다. 금융권에서는 공공연히 신상훈 신한은행장과 최 사장 간 힘겨루기의 결과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신한은행과 조흥은행의 합병을 놓고 ‘완전한 화학적 결합’을 주창한 최 사장과 ‘신한 중심 합병’을 추진해온 신 행장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것. 이 와중에 역시 신한은행 출신인 라응찬 회장이 결국 신 행장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해석이다.
한 전직 은행장은 “이전부터 신한은행에선 ‘오사카 파’가 아니면 최고위층에 올라갈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결국 최 사장이 그 ‘오사카 파’에 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과거 은행은 사실상 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사내 정치가 무척 심했다. 대부분의 은행을 TK(대구·경북) 중심 세력이 장악했는데 핵심엔 역시 TK 일색인 인사부서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지점 수신고를 올리려면 똑똑한 직원이 필요하다. 지점장이 인사부와 잘 통하면 전화 걸어 ‘좀 괜찮은 애로 보내달라’는 식의 요청이 가능하다. 그런 식으로 특정 인맥이 인재들을 빨아들이는 과정에서 파벌이 형성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금융권의 이러한 분위기는 외환위기를 거치며 상당 부분 희석됐다. ‘실적이 아니면 죽음’인 상황에서 지역이나 학맥보다는 ‘실력 있는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최선이 된 까닭이다.
혹자는 “회사가 안정적이라면 ‘사내 정치의 일인자’는 곧 ‘리더십이 뛰어난 사람’이란 뜻이 된다”고 말한다. 정상적인 기업에서 최고위층의 ‘예쁨’을 받고 초고속 승진을 하는 이는 역시 실력과 성실성을 겸비한, 좋은 평판을 듣는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SK의 한 임원은 “몇몇 뛰어난 인물들의 활약으로 회사가 발전하고, 그런 가운데 주변의 우수 인재들이 혜택을 받는 형태라면 굳이 사내 정치를 나쁘다고 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예를 들어 손길승 회장의 경우 첫 근무지가 선경직물 공장이었다. 그런데 30년쯤의 시간이 흐르고 나니 당시 공장에서 손 회장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각 계열사의 사장 자리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꼭 사내 정치를 잘해 그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매우 뛰어난 능력을 지닌 ‘리더’ 주변에 역시 우수한 인재가 몰리면서 회사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