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 만성백혈병의 유일무이한 치료제인 글리벡의 보험적용과 가격인하를 주장하면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백혈병환우회 회원들.
문제는 평가원 측이 ‘의료진이 정해진 용법에 따라 투약하지 않았다’며 보험으로 지불되는 진료비를 2억6000만원이나 깎으면서 불거졌다. 병원 측은 “융통성 없는 평가원의 기준을 따랐더라면 박군은 과다 출혈로 사망했을 것”이라고 반발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죽어가는 한 소년을 살려내는 대가로 병원 측은 2억6000만원의 손해를 입은 셈이다.
의료시장 ‘지각변동’ 불 보듯
비록 환자 본인은 단 한 푼의 진료비를 내지 않았지만 혈우병 환자들의 모임인 한국코엠회(이하 코엠회)는 평가원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하기로 하는 등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김성근 코엠회 사무국장은 “약값 자체가 비싼 혈우병 환자의 진료비를 평가원이 근거 없이 깎으면서 병원들이 혈우병 환자의 치료를 기피하고 있다”며 “평가원이 진료비를 많이 삭감하는 직원을 포상하는 상황에서 이는 불 보듯 뻔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평가원은 이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쪽이다. 이런 주장은 혈우병 환자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으로, 이 요구를 다 들어주다 보면 수만 가지 질환에 대해서도 모두 사정을 봐줘야 한다는 게 그 이유다.
정부조직이나 제약사 등 의료 공급자들의 ‘배부른 대응’은 혈액제제로 인한 혈우병 환자의 에이즈와 간염의 감염 문제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피해 인원이 극소수인 데다 질환 하나에 국한된 것이라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진행 중인데도 제약사는 물론 정부까지도 이들 환자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런 ‘각개격파’의 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전국에 흩어져 있는 환자단체 20여개가 연합한 국내 최대의 의료소비자단체가 5월 중 발족할 예정이다. 가칭 한국질환단체총연합(이하 총연합)이 바로 그것. 지금껏 수백 가지의 개별 질환별 환우회가 자체 활동을 벌여왔지만 보건의료 서비스의 소비자 주체인 질환자들이 직접 공식적인 대표 조직을 구성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총연합의 출현으로 의료 서비스의 공급자 측인 병원과 의사, 간호사 단체만 있어왔던 의료시장에 일대 ‘지각변동’이 예상된다.
총연합에는 반드시 환자와 그 단체만이 가입하는 게 원칙이어서 기존 환자단체들을 지원했던 보건의료단체나 환자가 아닌 회원은 모두 배제됐다. 현재 참여가 확정된 단체는 한국백혈병환우회, 재생불량성빈혈환우회, 다발성골수종환우회, 코엠회, 폐암환우회, GIST(위장관기저종양)환우회, 위암환우회, 가온회(혈관기형장애환우회), 날개달기(백혈병소아암), 새울터(에이즈), 간사랑동호회 등이며 유미애(유방암), 암과 싸우는 사람들, 암사연 등 각종 암 관련 단체는 참여 절차를 논의하고 있다. 이들 단체 가운데 5개 단체는 곧 통합사무실을 운영할 예정.
총연합 발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권성기 한국백혈병환우회 사무국장은 “보건의료 서비스가 의료 소비자가 완전히 배제된 상황에서 공급자와 정부의 의도대로 일방적으로 강요됨으로써 많은 질환자가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며 “외국의 경우 소비자 문제의 가장 큰 부분이 보건의료인 데도 우리의 소비자시민단체는 이 부분을 간과하거나 무시해왔다”고 비판했다.
사실 지금껏 의료 소비자 운동은 소비자 자신이 아닌 양심적 공급자단체나 보건의료 노동자의 지원과 후원에 의존해 진행되면서 많은 한계를 보여왔다. 강주성 건강세상네트워크 공동대표는 “의료 소비자의 입장에서 도움을 주던 보건의료 관련 사회단체나 노조들도 자기 자신 또는 소속 회원들이 도덕적·재산적 피해를 입게 되는 경우에는 자신들의 직능별 위치, 예를 들면 간호사나 의사 등 공급자의 입장으로 돌아서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최근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대한적십자사의 총체적 혈액관리 부실과 그로 인한 수혈사고와 관련해 적십자 노조와 상급단체인 보건의료 노조가 의료 소비자의 입장이 아닌 철저하게 공급자인 적십자사의 편에 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혈액관련 내부 비리를 고발한 공익제보자가 민주노총 소속이 아니라는 이유로 오히려 그들에게 징계를 요구하고, 혈액사고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언론을 맹비난하는 등 도덕적 해이를 그대로 드러낸 것.
이처럼 뿔뿔이 흩여져 있던 환자단체가 하나로 모이게 된 데는 당면한 연대투쟁의 필요성과 정보의 공유, 의료 소비자로서의 대표성 획득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개별 환자단체가 지금껏 벌여온 소비자운동의 승리가 큰 견인차가 됐다.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대규모 단체를 꾸릴 수 있는 동력이 된 셈이다.
2000년 7월 의사들의 파업으로 치료를 받지 못해 막막해 하던 환자.(위). 수혈사고 등 대한적십자사의 방만한 혈액관리에 항의하는 건강세상네트워크 김상덕 간사(백혈병 환자).
우석균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국장은 “한국 의료 소비자운동의 역사적 태동과 첫걸음이 더욱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이런 승리의 바탕 위에 연합체가 구성됐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의료 소비자를 대표하는 연합체가 탄생함에 따라 우선 의사와 약사에게 지급되는 보험수가와 제약사에 공급되는 약품값 등을 결정하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에서 이 연합체가 주도적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껏 건정심은 가입자 대표 8인, 의약계 대표 8인, 공익대표 6인으로 구성돼 있었지만 가입자 대표 8인 중 질환을 피부로 절감해온 대표는 한 명도 없었다.
공급자 측과 정부의 우려대로 총연합은 단체 발족과 동시에 ‘병원권력’과 ‘정부권력’에 대항해 한판 전쟁을 불사한다는 방침이다. 그동안 개별 단체의 싸움에서 무시당해왔던 문제들을 재정비해 대대적인 공격에 나선다는 방침. △혈우병 환자들의 의료비 삭감 △혈액제제로 인한 감염 △백혈병 및 암 환자와 같은 중증 환자들의 상급 병실료 △혈소판 등 수혈 △혈소판 검사비 이중청구 문제 등이 공세를 벌일 대상이다.
“이제 의료수가를 올리기 위해 의료 공급자가 파업을 벌인다거나 제약사가 환자의 목숨을 담보로 일방적으로 가격을 통보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의료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찾기 위한 기나긴 투쟁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강주성 건강세상네트워크 대표)
바야흐로 국내 의료시장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