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된 범죄영화로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범죄의 재구성’(오른쪽), 1200만 관객을 동원하고 세계 시장으로 진출한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
둘째, 추리물이든 전쟁영화든, 코미디든 조폭영화든 장르 영화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한국 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씩’ 끌어올린 영화라는 평을 듣는다. 셋째, 잘 팔린 상업영화라는 점. 한마디로 대중성과 비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이전 영화들에 비해 세련된 스타일로 만들어진 ‘뭔가 다른 흥행 영화들’인 것이다.
네 번째 공통점으로는 아마도 이 영화들의 기획에 삼성맨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기획을 맡은 경우도 있고, 기획과 투자·배급에 삼성 인맥이 엮여 있기도 하다.
물론 현재 삼성이 영화 사업을 하지는 않는다. 1995년 7월부터 99년 1월까지 잠시 존재했던 삼성영상사업단(이하 사업단) 구성원들이 ‘한국 영화의 적재적소에 들어가 자기 몫을 해낸 결과’(김은영 전 삼성영상사업단, 현 키플러스픽처스 대표 및 PD)가 한국 영화 점유율 50% 시대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경영·관리인력 배출한 사관학교
강제규 필름 최진화 대표이사, 키플러스픽처스 김은영 대표 & 프로듀서, 노종윤 싸이더스 제작이사(왼쪽부터).
‘삼성이 만들면 다릅니다’라는 카피처럼 삼성맨들이 만든 영화에도 뭔가 다른 점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삼성이라는 아우라가 이들을 과대평가하게 한 것일까. 마지막 질문. 왜 ‘삼성영상사업단’은 ‘지펠’ 냉장고나 ‘래미안’ 아파트 못지않게 세계적인 ‘웰 메이드’ 브랜드가 되지 못한 것일까.
사업단 출신 영화인들에 대한 영화계 내부의 평가는 ‘투명한 경영’과 ‘멀리 내다본 기획’으로 모아지는 듯하다. 김혜준 영화진흥위원회 사무국장 같은 이는 삼성을 “영화 경영과 관리 인력을 양성한 사관학교”에 비유한다.
“삼성이 충무로에 들어오기 전에 영화란 한 사람의 비즈니스였다. 기획, 운영, 투자, 배급을 오너 한 사람이 판단했다. 그러나 대기업이 들어온 이후 역할을 나누고, 재무제표도 작성했다. 시스템이 갖춰지니 오늘날 창업투자사, 은행, 개인 등 다양한 자금이 안심하고 영화 펀드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거다.”(노종윤 전 삼성영상사업단, 현 ‘싸이더스’ 제작이사, ‘범죄의 재구성’ ‘지구를 지켜라’ 등 기획)
한 사업단 출신 인사는 “우선 감독들에게 일종의 경상비를 지급해야 한다고 경영진을 설득했다. 영화가 나오든 나오지 않든, 생활이 안정돼야 충무로 사람들이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고 말한다.
삼성 이전까지 영화와 극장업은 전근대적인 가업이었다. 영화의 완성도는 감독 한 사람에게 달려 있었고, 흥행을 예상하는 것은 점쟁이 수험생 당락 맞추기처럼 ‘감’에 의존했다. 흥행에 성공해도 누가 돈을 가져가는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극장에서 입장객 수를 세는 ‘입회인’을 매수해 관객 수를 줄이는 행태는 거의 관행이었다. 제일기획이나 일신창투 같은 기업이 막 충무로에 진입했을 때도 매출금을 그냥 떼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대기업은 투명한 회계와 감독, 배우, 예산에 따른 정교한 예상 관객 수를 요구했고, 사업단에서 이를 체득한 영화인들은 사업단 해체 뒤 충무로에서 이를 기획의 필요조건으로 만들어놓았다. 영화 제작에서 기획의 비중이 엄청나게 커진 것이다. 사업단 단장이었던 최완 대표의 아이엠픽처스가 투자하고, 한국 영화 담당이었던 노종윤 제작이사의 싸이더스가 기획한 ‘범죄의 재구성’은 3년에 걸쳐 ‘다듬고 다듬어’ 내놓은 영화다.
한국 영화 상영관 앞에 길게 늘어선 관객들.
재계 1위라는 든든한 배경 때문인지 사업단은 당시에도 꽤 ‘공격적’이었다. 해외 외화 수입시장에서 ‘봉’이라는 비판을 받아도 찍어놓은 영화는 반드시 샀다. 지금 세계 시장을 내다보고 한국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 가운데에도 삼성 출신이 많다.
“돈으로 보면 삼성전자 반도체 한 달 판 돈이 한국 영화 전체 시장과 맞먹는다. 그러나 영화는 국가 사이의 전쟁이 되었다. 문화의 파급력이란 말로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왜 미국 전체가 스크린쿼터에 그렇게 매달리겠나. 이제 한국 영화는 ‘웰 메이드’로 ‘크게’ 가야 한다. 그게 삼성의 생각이었고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최진화 강제규필름 대표이사)
삼성이 만든 ‘서울단편영화제’ 출신 감독들의 눈부신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서울단편영화제’는 사업단이 남긴 가장 큰 긍정적 유산이기도 하다. 삼성이 1994~97년 네 차례에 걸쳐 주최한 ‘서울단편영화제’는 당시 분출구를 찾던 영화학도들의 욕구를 끌어들인 히트작이다. ‘친구’의 곽경택, ‘세친구’의 임순례, ‘해피엔드’의 정지우, ‘거미숲’(제작 중)의 송일곤, ‘여고괴담’의 박기형, ‘목포는 항구다’의 김지훈 등의 감독들이 모두 서울단편영화제 수상 감독들이다. 현재 키플러스픽처스에서 정지우 감독과 후속작을 제작하고 있는 김은영 대표는 당시 서울단편영화제 기획자였는데, “삼성이 충무로의 도제 시스템을 붕괴시켰다. 덕분에 곽경택 등 유학파 감독들이 진입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 서울단편영화제 한 해 예산이 1억5000만원이었다. 당시 기획서에 ‘이 정도 비용으로 삼성은 5~10년 뒤에 엄청나게 큰 결과를 얻을 것이다’라고 썼다”
김대표의 예상은 정확하게 실현됐다. 단지 삼성 대신 CJ와 오리온이 그 결과를 거두고 있을 뿐이다. 사업단의 문제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삼성 역시 ‘한 사람의 비즈니스’였다는 데 있다. ‘한 사람’이 충무로의 노회한 영화사 사장에서 재벌기업의 총수로 바뀐 것이었다. 사업단이 독립 법인이 아니라 차출 인력으로 구성된 태스크 포스팀이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아침 7시에 출근했지만 충무로엔 그 시간에 잠들어 있는 사람이 더 많다.
“사업단 자체보다 그 속에 있었던 사람들이 영화계에서 쌓은 경험이 오늘날 한국영화계에 어떤 의미를 준다고 본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업의 영화 사업이란 총수의 의지에 의해 시작되고, 추진력을 얻으며, 끝나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김혜준 영화진흥위원회 사무국장)
알려진 것처럼 ‘소소한’ 적자 때문에 사업단이 해체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최근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일본 유학 시절부터 동시상영 극장에 즐겨 다니고 지금도 가족들과 영화를 보러 다니는 영화팬이란 점은 유명하다. 그러나 구조조정 시기 내부 경영 감사에서 사업단(영화뿐 아니라 음반, 방송, 게임 등으로 이뤄져 있었다)의 한 부서에서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발견되자 이회장이 몹시 화를 냈으며, 이는 바로 사업단 전체가 사라지는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관행 때문에 ‘PR비’가 필요하다고 해명(?)했지만 이 회장은 “회사 전체를 오염시킨다”며 해체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 전엔 삼성이 세계 시장의 파트너로 교섭하던 영화감독 스필버그가 “삼성은 반도체밖에 모른다”며 제일제당(현 CJ)으로 가버려 자존심을 구겼다. 이회장으로선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엔터테인먼트 업계 사람들의 ‘비합리적’ 성향에 거부감을 느꼈을 수 있다. 오너의 마음이 떠나자 삼성 내부에서도 영화가 미래 콘텐츠 산업의 핵심이라든가, 기업 이미지를 제고한다는 논리는 설득력을 잃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사업단 해체가 공식화한 직후 사업단에서 투자한 ‘쉬리’가 공전의 히트를 했다. 뒤늦게 삼성은 “한국 영화 제작만 재개한다”고 밝혔으나 그땐 이미 사업단 멤버들의 마음이 떠난 뒤였다.
사업단의 근본적 한계를 인식했기 때문인지, 삼성에서 나와 충무로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업단 해체가 “한국 영화계를 위해선 잘된 일”이라고 주장한다.
삼성영상사업단은 투자자에 머물렀지만, 뒤이어 들어온 CJ와 오리온, 롯데 등 재벌 기업들이 영화제작에서 배급, 극장에까지 수직적 계열화를 통해 영화산업을 독점화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에서 1940년대에 ‘반독점법’을 금지한 것으로, 영화인들은 “대기업의 영화산업 수직계열화에 의한 독점이 필연적으로 영화 제작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손쉬운 배급업 중심으로 기울게 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한다.
삼성영상사업단의 해체는 2조~3조원의 부가가치를 가진 황금알 낳는 오리의 목을 조른 것과 같을 수도 있고, 젊은 한국 영화 제작자들이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셈이 된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사업단 사람들이 충무로에서 일하면서 영화는 ‘뭔가 다르게 만들어야 하는 상품’임을 깨달았고, 삼성맨이면서 충무로 사람이기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사업단 출신 영화인들이 정기적 모임을 갖는 데다, 기획 투자 배급에서 활동이 두드러지자 간간이 ‘재건설’이 나오기도 한다. 그들은 “이미 삼성에선 상처를 많이 받았고, 다시 모이기엔 인적으로 너무 많이 컸다”며 웃어넘긴다. 노종윤 싸이더스 이사는 이렇게 덧붙인다.
“삼성사업단이 해체될 때 아무런 갈등도 없었다. 영화를 6, 7년 하다보면 영화인이 된다. 그것이 영화의 매력이다. 나이로 봐도 대부분 마지막 직업이기도 했다. 그때 삼성이 아니라 영화를 선택한 사람이라면, 영화판에서도 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