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3일 서울대병원 한 병실에서 어머니 김경은씨(가명)가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 이현수군(가명)에게 영양제를 맞히고 있다.
의료급여 2종 수급자인 박모씨(52·여)는 퇴행성 관절염과 당뇨로 고생하고 있지만, 치료약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값도 비싼 이 질병의 치료약은 본인 부담금 비용이 높기 때문. 박씨가 약값을 지불하지 못할 것이라 지레짐작한 대부분의 약국에서는 “그 약은 우리 약국에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이미 동네 약국에서 만성 질환을 앓는 수급자로 낙인이 찍힌 박씨에게 돌아오는 것은 약사들의 따가운 시선뿐이었다. 의료급여 1종 수급자인 김모씨(56·여)는 얼마 전 찾아간 병원에서 “의료급여 수급자들의 진료기간이 지났다”는 말을 듣고 관절염 치료를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병원의 해명이 의료급여 수급자의 진찰을 피하기 위한 거짓말임을 뒤늦게 알고 분통을 터뜨렸다.
빈곤계층 보호 그러나 의료 차별
이처럼 빈곤계층의 의료권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가난한 사람들의 치료받을 권리를 위협하고 있다. 의료급여 대상자라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당하고,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한 일부 환자는 급기야 죽음을 결심하기도 한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 최소한 보장돼야 할 ‘의료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은 ‘유전유생 무전무생(有錢有生 無錢無生)’의 현실을 절감하고 있다.
빈곤층의 의료권을 위협하는 제도적 차별은 곳곳에 널려 있다. 미숙아(임신 37주 미만·2500g 미만 출생아)는 인큐베이터에서 정성 어린 치료를 받으면 건강해질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치료비는 건강보험의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다. 수천만원의 돈을 감당할 수 없는 부모는 아이의 생명을 포기하기도 한다. 출산율의 감소로 출산장려금 정책까지 논의되는 이 시점에서 국가는 이미 태어난 아이들의 생명조차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예쁜 아이를 어떻게 포기해요? 미숙아로 태어난 우리 현수의 희귀병이 보험 혜택만 받더라도 조금 수월해질 텐데….”
4월23일 오전 서울대병원 어린이병동의 한 병실에서 김경은씨(36ㆍ여·가명)가 14개월 된 아들 이현수군(가명)을 꼬옥 껴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현수는 지난해 2월, 8개월 반 만에 1460g의 적은 몸무게로 태어난 미숙아다. 3개월간 인큐베이터에서 자란 현수는 만 1살이 넘었지만 몸무게는 4.6kg밖에 나가지 않는다. 입으로 음식을 삼킬 수가 없어, 엄마는 하루에도 여러 번 현수의 뱃속으로 영양제와 음식물을 넣어준다.
현수의 어머니는 밀린 병원비 영수증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왼쪽사진). 4월23일 정말련 할머니(가운데)가 홈 헬퍼인 최귀자씨(왼쪽)와 사회복지사 장계순씨의 방문에 반가워하고 있다.
미숙아들 건강보험 혜택 절실
“현수가 처음 태어났을 땐 과연 살 수 있을까 염려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집안도 넉넉지 않은 상황이니까요. 그래서 출생신고도 몇 달 늦어졌죠. 하지만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현수는 좁은 기도로 거친 숨을 내쉬었지만, 연신 방글방글 해맑게 웃는다. 그러나 아이를 바라보며 미소짓는 김씨의 얼굴 한켠엔 근심의 그늘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3개월째 아들 김민호군(가명)을 인큐베이터 에 둔 채 지켜봐야 하는 어머니 강모씨(22)는 “치료비가 더 이상 없으면 아들의 치료를 포기하라”는 복지사의 이야기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첫째 아이인 민호는 1900g으로 태어났지만 3개월 새 좀처럼 자라지 않았다. 강씨는 “가난한 엄마 밑에서 건강하지 못한 채 태어나도록 한 것이 정말 미안하다”고 했다.
2003년 11월24일 오전 서울역 앞에 자리를 깔고 누운 노숙인들. 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 및 공공의료기관 확충을 요구하며 집회를 하고 있는 전국보건의료 노조 조합원들.
의료보호제도의 그늘에 놓인 또 다른 이들은 바로 차상위 계층이다. 서류에 가족이 있거나, 일할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의료급여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의료급여 대상자들보다 더 빈곤한 삶을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정말련씨(78·여·서울 성동구 성수동)는 정신지체를 앓는 40대의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른바 차상위 계층이다. 정씨는 아들과 함께 산다는 이유로 의료급여 수급자 대상에서 제외됐지만, 그를 돌보는 아들 역시 장애 때문에 직장을 얻기 힘든 여건이다. 정씨는 관절염, 척추질환, 심장질환 등 7가지 질병에 시달리고 있지만 병원에는 되도록 가지 않는다.
“얼마 전에 한 번 죽을 뻔했어. 일주일 내내 참다가 너무 아프니까 아들이 날 병원으로 데려갔지. 참다가 병만 더 키웠수. 병원비가 워낙 많이 나오니 걱정이오. 늙었으니 이제 죽어야지.”
4월23일 기자가 정할머니의 반지하방을 방문했을 때, 그는 전기요금이 아깝다며 불을 끈 채 누워 있었다. 정할머니를 돕고 있는 홈 헬퍼 최귀자씨(57ㆍ여)는 “국가에서 서류만 보고 의료급여 수급대상자를 판단하니 문제”라며 “차상위 계층이 오히려 의료급여 수급자들보다 의료권의 사각지대에 있다”고 말했다. 독거노인 등 소외계층을 돕는 복지단체 ‘성동희망나눔’의 이일순 사무국장은 “서울 성동구 노인들의 30%가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도 보건소조차 가지 못한다”며 “이들의 건강을 정기적으로 검진해줄 공공의료 서비스가 더욱 확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04년 3월 현재 의료급여 대상자는 146만명, 이들을 위해 쓰이는 금액은 연간 1조8806억원에 이른다. 보건복지부는 올 들어 기초수급권자의 기준을 조금 넘는 차상위 계층이나 6개월 이상 희귀성 난치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의료급여를 지원하겠다고 밝혔으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의료권은 먼 이야기다. 의료급여 대상자의 경우에도 질병에 따라 환자의 본인부담금 비율이 20~50%에 이르고, 일부 병원은 의료급여 대상자들에게 입원 보증금 지불을 요구해 이들의 치료를 원천 봉쇄하기도 한다.
“정책 의지 있으면 재원 부족 해결”
신분이 불확실한 노숙인은 아예 ‘의료권’에서 배제돼 있다. 일정 거주지가 없는 노숙인들은 2개월 이상 쉼터 등에서 머문 기록이 있어야 의료급여 대상자가 될 수 있고, 주민등록이 말소된 노숙인들은 아예 의료 혜택을 받기가 힘들다. 노숙인들을 위한 소수의 무료 진료소가 있지만 이들의 만성질환이나 중병을 본격적으로 치료해주는 데는 역부족이다.
2002년 겨울 건강세상네트워크 사무실로 안타까운 소식이 들어왔다. 서울 영등포에서 퍽치기를 당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한 40대 남성이 발견됐지만, 신원불명이란 이유로 병원에서 치료를 거부당한 것. 차선책으로 행려병자를 치료하는 서울시립동부병원으로 옮기려 했으나 출동한 119는 동대문구가 자신의 관할지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운행을 거부했다. 결국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이 남자는 다음날 숨지고 말았다.
‘노숙인 복지와 인권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문헌준 대표는 “현장에서 바라보면, 119구급대의 이송 거부나 병상 부족 때문에 노숙인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며 “의료급여법의 특례조항을 확대 적용해 수급권자가 아니더라도 노숙인이나 쪽방 생활자 등에게 의료보호를 적용해 그들이 스스로 선택해 병원에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의료권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의 건강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민주노총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는 4월22일 ‘건강보험 적용 확대와 의료개방 저지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현재 50%에도 못 미치는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80%까지 확대하고, 건강보험 본인부담금 상한액을 연간 200만원으로 정해 초과시 정부가 부담하자는 주장이다. 하지만 재원 부족은 공공의료 시스템을 확충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에 대해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의 우석균 정책국장은 “정부의 정책의지만 있다면 재원 부족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의료 접근권은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기본권리입니다. 의료비 중 공적 재원에 의한 환자 지원율이 45%인 한국은 의료보험 보장률이 80% 가 넘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가 중 최하위죠. 이윤을 추구하는 사적 의료기관이 의료보험 재정을 탕진하도록 제도적으로 방치해선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