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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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랫줄에 휘날리는 ‘色다른 감동’

  • 글·사진=허시명/ 여행작가 www.walkingmap.net

    입력2004-04-29 15: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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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랫줄에 휘날리는 ‘色다른 감동’

    염색 체험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이 천에 황토염색을 들이고 있다(위).채현 천연염색전시관에 전시된 다양한 빛깔의 염색천들.

    경기 여주 땅에 가면 폐교를 리모델링해 세운 박물관이 있다. 여주군 강천면 굴암리에 있는 여성생활사박물관이 그곳. 박물관은 높으면서도 오목한 지형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야생초 하나, 잡초 하나 뽑지 않는다는 이곳 마당에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기운이 감돈다.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마당 끝에는 훤칠한 소나무들이 시원스럽게 서 있다. 겉으로 봐서는 시골 학교 그대로인데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사뭇 달라진다. 교실 문 대신에 한옥 대문이 달려 있다. 학교 외벽의 철제 창은 그대로 두었는데 실내에는 창문마저 모두 한옥의 띠살문으로 바꿔놓았다. 벽을 한 겹 새로 댄 것이다. 이것부터 일단 예사롭지 않다.

    1층 전시장 왼편부터 둘러본다. 전통 차를 마시는 다실이 있다. 전통 다기들부터 시작해서 한국 작가들의 요즘 작품과 외국의 다기들까지 전시돼 있다. 이곳에서 다도 체험과 다도 교육이 이뤄진다. 오른편은 전통염색 전시관으로 시작된다. 천장을 조각보를 붙여 꾸민 이곳에는 130여 가지 천연의 빛깔을 띤 천들이 전시돼 있다. 복합염을 한다는 이민정 관장이 만든 것이다. 무척 고급스런 문화 향기가 느껴지는 전시장이다.

    여성생활사와 관련한 전시물은 2층에 따로 마련돼 있다. 이곳에는 옛날 복식에서부터 온갖 반닫이와 삼층장, 옷장은 물론 물레나 베틀, 가마, 요강단지, 골무, 비녀, 화잠, 화관, 다리미, 댕기, 그리고 곱돌 주전자와 곱돌 약멧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전시물은 보존 상태도 좋고, 깔끔하게 정돈돼 있다. 이곳의 바닥은 짙은 밤색 목재로 돼 있으며 천장은 광목천을 교직하듯 엇갈려 짜 올렸다.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이다. 이쯤에 이르면 솔직히 서울 중앙통의 박물관과 견주어도 만만치 않은 미적 자존심을 읽을 수 있다.

    박물관을 돌아본 뒤에는 황토염색을 체험할 수 있다. 시골에서 살기 위해 전통 염색을 배운 지 열다섯 해가 되었고, 여주는 흙이 좋아 오게 됐다는 이관장에게서 직접 염색을 배운다. 이관장은 채현천연염색연구소도 운영하고 있다.

    황토염색은 흙을 채취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황토는 산에서 채취하는데, 입자가 가는 붉은 진흙이면 더욱 좋다. 채취한 황토를 굵은 체로 치고, 다시 가는 체로 열 번 정도 반복해 쳐서 밀가루보다 곱게 걸러낸다. 이 황토가루에 물을 부으면 황토염료 준비는 끝난다. 여기에 준비해간 흰색 면 티셔츠와 수건을 넣어 주물러준다. 30~40차례 빨래하듯 주물러 황톳물이 잘 배이도록 한다. 이 황톳물은 꼭 죽 같다. 부드럽고 입자가 고와 흙 알갱이가 전혀 만져지지 않는다. 뻘밭에서 장난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다 주무른 뒤에는 꼭 짜서 햇빛에 말린다. 농도가 진한 황톳물이 마르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다 마른 뒤에는 다시 담가서 주무르고 또 말리는데, 이런 과정을 열 번쯤 해야 황톳물이 제대로 든다. 마지막으로 말린 것을 소금물(소금이 매염제 역할을 한다)에 넣어 끓이면 염색이 안정된다. 그 뒤로 몇 번 입으며 세탁하는 동안 약간 물이 빠지면서 드디어 실내에서는 옅은 황토빛이고 해 아래에선 옅은 살구빛이 도는 묘한 빛깔을 얻을 수 있다.

    빨랫줄에 휘날리는 ‘色다른 감동’

    쪽물 들인 천을 널고 있다(위).여성생활사박물관에 전시된 옛 가구들(아래 왼쪽).울금염색한 천에 쪽물을 들이면 보라빛 나는 천이 만들어진다.

    황토염색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가장 인기 있는 염색 체험이다. 피부가 아토피성인 자녀를 둔 부모들이 황토염색을 많이 하러 온다. 황토염색 속옷을 입으면 적외선이 방출되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습기가 차지 않는다고 한다. 또 담배를 피우거나 공기가 맑지 않은 실내에서는 황톳물 들인 광목으로 커튼을 만들어 걸어두면 공기가 정화돼 한결 개운하다.

    이관장은 늘 염색작업을 한다. 그가 하는 염색작업을 지켜볼 수도 있다. 박물관 울타리 너머에는 쪽을 기르는 밭이 있다. 쪽물은 검은 빛이 도는 벽청(碧靑)이다. 여기에 명주 한 필을 서리서리 담아 치댄다. 요령은 빨래하는 것과 같다. 한자리에서 30~40차례씩 긴긴 명주를 치대다 보면 김장거리를 씻는 것처럼 힘이 든다. 섬유조직 속으로 미세한 염색 입자를 침투시키는 행위다. 이 명주를 장대로 받친 빨랫줄에 널어 말린 뒤 다시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 드디어 쪽빛 바닷물이 든다. 초록빛으로 물들이려면 황연이나 치자, 울금 들의 노란빛을 내고서 쪽물을 들이면 된다.

    이곳에서는 염색말고도 차 마시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이관장은 염료를 캐기 위해 산에 갈 때도 차 가방을 들고 나갈 정도로 차를 좋아한다. 그의 주변에는 그가 직접 해온 목련차나 연차, 생강나무차 등을 나누어 마시면서 그의 차 제자가 된 이들이 많다.

    여주의 여성생활사박물관에 들러 전시물을 둘러보고 황토염색을 한 뒤 차를 마시는 일은 색다르고 귀한 문화체험이다. 저마다 다른 빛깔을 내는 세상의 수많은 식물의 불에 탄 재 한 줌이 매염제로 다시 쓰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산야의 잎과 꽃들이 차로 변해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는 일도 경험하게 된다.

    여성생활사박물관은 지금 한창 축제 준비를 하고 있다. 5월1일부터 6월30일까지 ‘2004 여성문화예술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축제기간에 전통 부엌용기 시연 및 체험행사, 전통 직물용기 시연 및 체험행사, 물지게 지기와 물동이 이기 체험행사, 전통염색 체험학습이 이뤄진다. 이 축제에 참여하면 사재를 털어 옛것들을 사 모아놓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누리고자 하는 개인의 열린 의식과, 전통 문화 지키는 일에도 개인보다 걸음이 늦은 관(官)의 닫힌 의식을 함께 보게 될 것이다. 임대료를 내지 않았다고 교육청이 압류딱지를 박물관 유물들에 붙여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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