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9월 당시 야당의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한자리에 모인 DJ, 유진산, 고흥문, 이철승, YS (왼쪽사진 왼쪽부터). 1970년 9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에 뽑힌 김대중씨.
한 중견언론인이 표현한 3김론이다.
‘사방의 적’을 향한 3김의 투쟁이 진가를 발휘한 시기는 세 사람이 본격적인 대권 경쟁에 돌입한 1987년 이후다. 특히 3김 가운데 선두주자로 나선 YS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93년 이후 DJ가 대권을 잡은 97년까지, 5년 남짓한 기간은 3김 정치의 장점은 물론 폐해가 만천하에 드러난 시기였다.
‘사방의 적’과 동시에 싸움에서 이기는 괴력
93년은 YS의 해였다. 30년 만에 등장한 문민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그는 가쁘게 개혁정책을 선보였다. 군의 정치개입 통로인 하나회를 숙청했고,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했으며, 각종 권력형 비리를 파헤쳤다.
그 와중에 YS는 3당합당의 유물인 민자당을 명실상부한 ‘YS당’으로 만드는 작업도 벌였다. 95년 벽두 민주계를 앞세워 JP와 그의 추종자들을 당에서 축출하는 한편, 15대 총선을 앞두고 개혁공천을 명분으로 대거 물갈이를 했다. 오늘날 한나라당의 주력으로 성장한 김문수 이재오 의원 같은 재야인사들이 정계에 입문한 것도 바로 이 무렵. 하지만 YS는 지나친 혈연주의 정치로 스스로를 망치고 말았다. 돈과 사람 관리라는 핵심 임무를 아들인 현철씨와 최측근인 홍인길씨에게 맡겼는데, 결국 두 사람 모두 권력형 비리의 화신으로 몰려 사법 처리되면서 YS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속히 옅어지고 말았다.
92년 대선 직후 영국 유학길에 올랐던 DJ는 93년 말 귀국해 재기 준비에 들어갔다. 94년 들어 아태재단을 창립해 각계의 사람들을 끌어 모으더니, 95년에는 이기택씨가 대표로 있던 민주당을 깨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는 정치적 모험을 강행했다.
주위의 반대도 적지 않았다. 동교동 가신이었던 P씨는 DJ에게 “15대 총선을 앞두고 당을 깨면 어떻게 선거를 치르려고 그러느냐”며 신당 창당을 말렸다. 현실적 판단에 근거한 충언이었지만 이후 DJ는 P씨를 다시 전략 참모로 쓰지 않았다. 대권이라는 전략적 목표가 있는 DJ로서는 비록 총선에서 망하는 한이 있어도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줄 친위정당이 필요했던 것.
하늘은 DJ를 버리지 않았다. 사욕을 위해 멀쩡한 당을 깼다는 비난 속에 치러진 선거에서 DJ의 국민회의는 지역구 66석, 전국구 13석 등 79석을 얻었다. 신한국당은 전체 299석의 과반에 미치지 못하는 139석을 얻는 데 그쳤다.
대통령 경선 뒤 당원들의 환호에 답하는 이철승 김대중 김영삼씨. 1990년 3당합당 기자회견을 하는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씨 . 3당합당 직전 골프 회동에서 만난 김종필 김영삼씨. 1987년 10월25일 고려대 집회에 나란히 참석한 김대중 김영삼씨. 대선후보 문제로 갈등을 빚은 두 사람은 시종 굳은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왼쪽부터 시계방향).
이처럼 겉으로 드러난 이력에서도 3김은 서로를 이용하면서 견제했고, 때로는 극한 대립도 마다하지 않았다.
3김 가운데 특히 견제와 대립에 집착한 이는 YS다. 대통령이 된 직후 YS는 공직사회에 골프 금지령을 내렸다. 접대문화 근절을 위한 조치였다고 하지만 YS가 골프에 혐오감을 드러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3당합당 직전 YS는 골프광인 JP와 라운딩을 했다. 초보자인 YS가 JP를 이길 수 없는 노릇. 골프 모임이 끝난 뒤 YS는 사석에서 “치고 나서 쫓아가서 또 치고 하는 게 뭐가 재미있느냐”며 불만스러워했다. 대통령 취임 뒤 골프 금지령을 내린 데는 JP와의 좋지 않은 기억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게 당시 정가의 분석이었다. 이런 소소한 갈등 탓이었을까. 1993년 초 청와대를 찾은 JP는 YS를 향해 “연작(燕雀)이 홍곡(鴻鵠)의 뜻을 알겠느냐”는 중의법으로 속내를 비치기도 했다. YS는 DJ를 향해서도 험한 말을 토해냈다. DJ의 노벨상 수상 소식에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고 비아냥거렸다.
3김식 정치의 최대 해악은 지역주의의 고착화다. 지역정서를 이용해 호남에선 DJ당이, 영남에선 YS당이 득세하는 현상을 고착화하고 공천을 독점함으로써 정당과 정치권 전반을 지배했다. 그 결과 이념과 노선, 정책의 차별화에 따른 정당의 성장은 불가능했다. 또 3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추종자들을 데리고 당을 옮기기도 하고 합치기도 하는 ‘인위적 정계개편’의 전통은, 정치권에 도덕불감증을 퍼뜨리는 데 적지 않게 작용했다.
1964년 총선에서 공화당 지원 유세에 나선 김종필씨.
돈과 관련한 잡음은 특히 전국구(비례대표) 공천에서 극에 달한다. 야당 당수로서 여러 차례 총선과 대선을 치른 DJ가 특히 이 부분에선 악명이 높다. 정치 헌금만 낸다면 인물의 과거를 따지지 않고 공천함으로써 전국구를 ‘전(錢)국구’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DJ라는 얘기도 있다. 1988년 DJ는 평민당을 이끌고 총선을 치렀는데, 당시 전국구로 당선된 H씨의 경우 평민당 공천을 받기 몇 달 전 YS의 총재특보로 활약했던 인물. 그런데 총선을 앞두고 이번에는 DJ의 특보라는 명함을 돌리더니 당당하게 평민당 전국구 공천을 받고 금배지를 달았다.
호남지역 공천을 놓고도 잡음은 이어졌다. 13대 총선을 앞두고 전북의 한 지역구를 놓고 평민당에서는 전직 의원인 L씨와 검사 출신 C씨가 공천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DJ는 물론 측근인 권노갑씨 등에게까지 치열한 로비를 벌였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오가는 헌금의 규모도 커져갔다. 결국 판세는 자금력에서 앞선 L씨 쪽으로 기울었는데, 검사 출신인 C씨가 L씨의 각종 비리 혐의를 들고 나와 결국 대역전승을 거두며 공천을 받았다.
그러자 L씨의 지지자들이 동교동 DJ의 집을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와중에 L씨가 배팅한 금액이 수십억원대에 이른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결국 판세는 L씨는 전국구 후보로 발탁돼 C씨와 나란히 금배지를 달았다.
DJ뿐 아니라 야당 생활을 오래 한 JP도 이런 소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90년대 중반까지도 3김씨가 이끄는 정당에서 전국구 의석을 얻으려면 최소 30억원 넘게 정치헌금을 해야 한다는 게 정설이었다. 전국구를 팔아 마련한 돈이 3김의 대선자금으로도 쓰였고 정치 신인의 ‘장학금’으로도 활용됐지만, 이런 악순환이 정치의 정도(正道)를 망가뜨렸다는 비난도 피할 수 없다.
3김의 40년 정치 독점현상으로 3김의 뒤를 잇는 후계자 그룹의 성장을 막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3김은 후계자의 성장을 막았다는 지적이 옳을 정도로 자신의 뒤를 이을 정치 지도자를 만드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3김 이후 첫 대통령인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YS가 발굴하고 DJ 밑에서 정치수업을 받았지만, 그가 대권을 잡은 것은 번번이 선거에서 떨어지면서 적지 않은 세월 정치적 낭인으로 지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치권 중심부에서 3김을 직접 위협하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두 김씨한테서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3김 모두와 정치적 인연이 깊은 박세일 한나라당 비례대표 당선자는 “YS는 승부사이고, DJ는 심계 원려형이며, JP는 유연한 실리주의자다. JP에게 기회주의자라는 비판도 있는데, 보수 신념은 확고하고 그 속에서 유연한 전략 전술적 판단을 한다”고 분석했다. 한마디로 3김의 정치 스타일은 1980~90년대가 필요로 하는 정치 지도자의 덕목이었다는 것.
하지만 3김의 정치 스타일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정치학자들은 대체로 노무현 대통령 등장 이후 소수 엘리트 정치에서 대중민주주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번 총선이 그 가능성을 열어준 전환점이라고도 한다. 돈과 조직으로 대표되던 3김식 선거 형태가 자취를 감췄다는 게 대체적 의견이다.
3김의 퇴장과 함께 지역주의도 퇴조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은 호남에서 DJ 계승을 외쳤고, JP는 ‘충청이여 다시 한번’을 호소했지만 유권자의 호응을 얻는 데 실패했다. JP는 “노병은 죽지 않지만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노병이 사라진 정치권에 지금 새로운 싹이 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