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광주, 그리고 대권 도전
8월 28일 광주를 찾은 안 전 대표는 지지자들과 광주 인근 무등산을 등반한 뒤 기자간담회를 갖고 “(친박근혜계와 친문재인계 등) 여야의 양 극단이 정권을 다시 잡으면 국민이 불행해진다”며 내년 대선에 중도성향의 국민의당에게 지지를 모아달라고 호소했다. 사실상 대권 도전을 선언한 것.
안 전 대표가 광주에서 대권 도전 뜻을 밝힌 것은 ‘제2 광주의 기적’을 바라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광주는 노무현 바람, 이른바 ‘노풍’ 진원지였다. 광주 경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후보는 여세를 몰아 대선후보를 거머쥐었고, 그해 말 치른 대선에서 집권에 성공했다. 이처럼 광주는 정권 창출의 산실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다. 안 전 대표가 광주에서 대권 도전을 선언한 것은 내년 대선에서 광주 시민이 자신을 매개로 다시 한 번 ‘광주의 기적’을 일으켜 정권교체의 도구로 써달라는 바람을 피력한 것이라 하겠다. 과연 광주는 안 전 대표의 구애에 응답할 것인가.
4월에 치른 20대 총선의 호남지역 결과만 놓고 보면 그의 바람이 현실화할 개연성이 커 보인다. 호남 전체 의석수 28석 가운데 새누리당 2석, 더민주 3석을 제외한 23석을 국민의당이 석권했기 때문. 그럼에도 8월 둘째 주에 발표된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의 ‘차기 대선주자 조사’에서 안 전 대표는 호남에서조차 19% 지지율로 더민주 문재인(22%) 전 대표에 이어 2위를 달리고, 16% 지지율로 3위를 기록 중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도 바짝 쫓기고 있다. 전국 평균 지지율은 반 총장 28%, 문 전 대표 16%, 안 전 대표 8% 순으로 격차가 크게 벌어져 있다. 전통적으로 야권 지지층이 많은 호남에서 안 전 대표가 지지율을 크게 끌어올리지 못하면 내년 대선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기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더민주와 국민의당 등 야권 두 정당이 호남에서 지지율을 끌어올리려고 구애 경쟁을 벌이는 사이, 8월 9일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호남 출신 이정현 의원이 새로운 당대표에 선출됐다. 이 대표는 새누리당 당대표 경선에서 “호남 출신인 나를 당대표로 뽑아주면 내년 대선에 호남에서 20% 지지율이 가능하고, 그럼 새누리당의 정권 재창출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질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의 바람은 이뤄질 수 있을까. 여러 의문과 궁금증을 안고 호남으로 향했다.
“묻지 마 투표? 턱도 없는 소리”
전북 전주시 외곽 한 자동차정비소에서 일하는 윤모(45) 씨는 “(정부가) 너무 멋대로 하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윤씨는 “겉으로 불평, 불만을 크게 말하지 않는다고 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며 “지금은 때가 아니라 그냥저냥 지켜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에 거주하는 회사원 장모 씨는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여기(호남) 출신이라고 해도, 하는 말과 행동을 보면 여기를 대변하는 것 같지 않다”며 “비서나 환관 이미지가 있어 부끄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고 말했다.
정부와 여당에 대한 불만뿐 아니라 야당 등 정치권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았다. 전주시 서곡지구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60대 후반 정모 씨는 “(호남 유권자가) 야당이라고 무조건 찍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 총선 때 보여주지 않았느냐”며 “야당도 이제 좀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더민주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고, 국민의당도 뭘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며 “요로코롬 어영부영 대선꺼정 가는 거 아닌가 모르겄어. 그러면 내년 대선도 (야당으로 정권교체가) 어렵겠죠잉”이라고 반문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기자에게 자기 생각을 피력하다가도 조심스레 내년 대선 전망을 묻는 그의 말 속에서 호남인이 느끼는 절박함과 답답함이 느껴졌다.
8월 27일 더민주는 새 당대표로 추미애 후보를 선택했다. 당 주류인 친문재인(친문) 진영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한 추 후보가 당권을 잡은 뒤 더민주에 대한 호남의 기대는 오히려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 전북을 무대로 활동하는 한 언론인은 “추미애 후보가 당대표로 선출된 이후 더민주는 호남에서 ‘공주’도 아닌 ‘옹주’가 됐다는 얘기가 나온다”며 “더민주는 그만큼 호남에서 정통성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더민주 옹주론은 8월 22일 문 전 대표가 “(내년 대선에) 호남에서 90%의 압도적 지지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안정적 득표는 가능하다”는 부산 발언이 전해진 뒤 더욱 확산하는 모양새다. 광주 북구에 거주하는 회사원 김모(40) 씨는 “광주 사람도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는데, 문재인이 부산 가서 뭐라고 했는지 여기서 모를 것 같으냐”며 “(내년 대선에) 또 (호남이) 묻지 마 투표로 몰표를 줄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턱도 없는 소리”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에는 고로코롬은 안 될 것이고만요”라고 쏘아붙였다.
전북 익산시를 지역구로 둔 더민주 이춘석 의원은 문 전 대표의 부산 발언이 전해진 뒤 MBN과 전화통화에서 “호남에서 (더민주를) 90% 지지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개탄했고, 전남에서 더민주 후보로 당선한 이개호 의원도 “광주·전남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한 야당”이라고 지적했다.
광주 남구에 거주하는 회사원 송모(55) 씨는 “더민주와 문재인이 가진 호남에 대한 인식은 전혀 바뀌지 않은 것 같다”며 “‘호남이 어디 가겠느냐’고 쉽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오란 데가 아무리 없어도 더민주로 다시 가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광주와 전주 등 호남을 대표하는 도시에 거주하는 이들이 전하는 호남 민심은 대체로 더민주와 문 전 대표에게 싸늘했다. 그럼에도 내년 대선 관련 여론조사에서 호남지역 지지율 1위는 문 전 대표다. 피부로 느끼는 여론과 여론조사 결과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뭘까.
“손학규? 사람은 참 좋은데…”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는 투표권을 가진 전국 당원이 한자리에 모여 투표를 진행했다. 투표율은 20%대 초반. 그에 비해 더민주는 권리당원을 대상으로 ARS(자동응답시스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직접 참여가 아닌 전화 여론조사였음에도 응답률은 30%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더민주 권리당원 가운데 절반 이상이 호남에 몰려 있다. 전북지역 한 유력 인사는 “권리당원을 대상으로 한 ARS 여론조사에서조차 응답률이 과반에도 한참 못 미친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며 “결국 응집력이 큰 친노(친노무현)와 친문, 그들만의 잔치였다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야권에서는 정계은퇴한 손학규 전 상임고문이 정계에 복귀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긴다. 더민주로 복귀, 국민의당 입당, 제3지대 세력화 등 구체적인 시나리오가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호남지역 여론은 “손학규가 이미지는 좋은데, 강단이 없어 보인다”는 평가가 많았다. 광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김모 씨는 “이미지는 참 좋은데, 대선후보로는 약해 보인다”고 했고, 전주에 거주하는 대학생 이 씨도 “사람은 좋아 보이는데, 세력이 없어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김남규 위원장은 “손 전 고문은 거부감은 없는 편”이라면서도 “정계에 다시 등장해 구체적으로 움직여야 여론의 반응이 나오지 않겠느냐”며 “지금은 이도저도 아닌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또 “결국 호남 민심은 내년 대선에 여야 대선구도가 어떻게 짜이느냐에 따라 요동칠 공산이 크다”면서 “여야 일대일 구도가 될지, 아니면 지금처럼 일여다야(一與多野) 대결 구도로 갈지에 따라 큰 혼란이 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
대선을 준비하는 후보 진영의 발 빠른 움직임에 반해, 대한민국 미래 5년의 권력을 누구에게 맡길지를 놓고 고민하는 호남 유권자는 대체로 대선 관련 판단을 유보한 채 관망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총선 이후 더민주와 문 전 대표에 대한 기대감보다 거부감이 커졌다는 점이다. 호남인은 4월 총선 직전 “호남이 선택하지 않으면 대선 도전도 하지 않고, 정계도 떠나겠다”고 공언한 문 전 대표의 약속 이행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