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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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기초체력 없는 기초과학

허울뿐인 R&D 통계 과학자는 연구비 가뭄

‘목적기초’ ‘전략공모’ 같은 애매한 개념으로 연구 호도…진리 탐구는 뒷전

  • 호원경 서울대 의대 교수 wonkyung@snu.ac.kr

    입력2016-09-02 15:5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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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흐르면서 잊히는 일이 많지만, 대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던 당시 내 마음속을 오가던 생각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사람 몸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 의학을 공부했지만, 막상 졸업을 앞두고 평생 무슨 일을 할지 결정해야 하는 시점이 되자 과학자가 되고 싶던 어릴 적 꿈이 되살아난 것이다. 결국 나는 기초의학자의 길을 선택했고,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다. 그런 내가 언제부터인지 학생들에게 진로 지도를 할 때 기초과학자의 길을 권해도 될지 망설이게 됐다. 이는 나 자신이 연구에 흥미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기초연구를 하는 게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어서다. 일차적 이유는 연구비 부족으로,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가 세계 1위라는 화려한 통계 수치에도 기초연구 지원은 적절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기초연구란 특정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고 진리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연구로, 기초연구의 핵심 요소는 창의성이다. 이 때문에 기초연구 지원은 연구자 주도의 창의적 과제에 집중돼야 한다. 하지만 19조 원에 달하는 정부 전체 R&D 투자액 가운데 기초연구자들이 창의적으로 연구 주제를 정해 신청할 수 있는 자유공모 사업의 규모는 약 1조 원밖에 되지 않는다. 교육부와 미래창조과학부 예산을 합한 액수다.



    ‘목적 연구’에 치우쳐 창의적 연구 위축

    ‘개인연구지원 사업’의 과제 수는 약 1만2000개로, 이는 전국 이공계 교수의 약 30%가 수혜를 받을 수 있는 수준이다. 문제는 이 중 약 80%는 과제당 연구비가 5000만 원 내외로, 이론 분야를 제외하면 아주 작은 규모의 실험실 운영조차 힘든 액수라는 점이다. 연구비 지원 기간이 3년밖에 안 돼 장기적 안목으로 연구를 추진하기도 어렵다.

    과제당 연구비가 1억 원 이상인 사업은 전체의 20%에 불과하다. 선정 과제 수가 적으니 경쟁률이 10 대 1 이상인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여러 규모의 사업 가운데 하나밖에 신청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어 연구비 액수가 큰 것과 선정 가능성이 높은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도 연구자에게는 큰 고민이다.



    연구비 지원 기간이 7년이라 좀 더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고, 연구자가 협동해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집단연구 사업’도 있긴 하다. 하지만 2014년 현재 과제 수가 190개에 불과하다. 이러니 연구자들이 ‘기초연구지원 사업’에 기대어 실험실을 안정적으로 꾸려가기란 매우 어렵다. 다른 연구비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정부 주도 기획 사업 쪽으로 눈을 돌려보지만 기획 사업은 소위 전략 분야라는 매우 제한된 분야에 한정돼 있고, 개인 인맥 없이는 기획연구팀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다. 운 좋게 연구비를 받는다 해도 특정 목적에 맞는 연구를 해야 하니 연구자 스스로 추구하던 주제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자의 역량뿐 아니라, 기초연구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다양성이 저하하고 있다.

    그런데 기초연구 현장의 연구비 부족은 정부 R&D 통계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통계 수치로만 보면 우리나라의 기초연구비 비중은 GDP 대비 세계 1위고, 연구비 규모로는 5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5조 원 가운데 순수연구개발비로 쓰이는 건 2조2000억 원뿐이다. 순수연구개발비 중에서도 절반 이상이 각종 목표를 내건 정부 주도 기획 사업에 배정돼 있다. 실질적인 기초연구비는 1조 원밖에 안 되는 것이다.

    기획 사업의 일정 부분을 ‘목적기초’라는 용어로 포장해 기초연구에 포함시키는 것은 기초연구비 비중을 높이는 효과는 있지만, 창의적 기초연구 발전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이는 정부가 기초연구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기초연구를 발전시키겠다는 의지 없이 기초연구비 비중 확대라는 외형적 목표 달성에만 급급한 게 아닌가 의심하게 만든다. 이렇게 달성한 세계 1위라는 통계 수치는 기초연구비가 충분한 것 같은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이 때문에 창의적 기초연구 투자 부족에 대한 시의적절한 대책 마련이 늦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기초연구 지원의 적절성에 의구심이 생기는 또 하나의 사례는 지난해 ‘전략공모’라는 새로운 유형으로 시작된 ‘X-프로젝트’다. ‘우주물질을 모사해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다수의 질병을 예방하는 방법은 없을까. 산소가 없는 환경에서 누구나 10분 이상 생존할 수 있을까.’ TV 프로그램에 엉뚱한 생각 겨루기 시합 같은 게 있다면 나올 법한 이 질문들은 정부가 대국민 공모전을 통해 발굴해 시상까지 했다. 이들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창의적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연구비를 주겠다는 사업이 X-프로젝트다. 하지만 과학연구에서 수준 높은 창의력을 요구하는 부분은 주어진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핵심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느냐다. 그리고 과학 발전을 선도하는 핵심 질문은 연구자의 경험과 실력을 바탕으로 과학적 발견의 최전선에서 나오는 것이지, 몇 사람의 기획 전문가가 머리를 짜내거나 대국민 공모로 발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전문가의 엉뚱한 질문이 중요한 과학적 발견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아주 없는 건 아닐 테다. 하지만 실제 연구 현장의 어려움은 외면한 채, 그런 예외적 경우를 기대하는 사업에 연구비를 투자하는 것이 과연 정부 R&D가 할 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엉뚱한 문제 풀어보라는 게 기초연구 지원?

    연구개발비를 투자해 바로 산업화로 이어질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건 기업에서 담당하고, 당장의 성과는 기대할 수 없을지라도 원천 지식 창출로 미래를 선도할 수 있는 기초연구 관련 투자는 정부가 담당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자유공모 기초연구 사업은 정부 연구개발비의 6% 미만에서 제자리걸음인데 반해 정부 주도의 기획 사업은 점점 규모를 키우는 현 상황을 보면, 우리 정부는 단기간에 성과를 얻을 것처럼 보이는 기술 개발에만 관심이 있는 듯하다. 정부가 나서서 기술 개발을 외치는 이런 상황이 연구 현장에 미치는 영향은 기초연구비 부족만이 아니다. 연구비 부족은 바로 연구인력 부족으로 연결된다. 벌써부터 순수기초연구 분야에 대학원생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 이는 학문 후속 세대가 다양한 분야에 고르게 분포하지 못하고 기술 개발 분야에 편중된다는 뜻으로, 우리나라가 과학 강국으로 가는 데 가장 큰 위험신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과학이 그 자체로 정부 정책의 대상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과학은 기술 앞에 붙는 형용사로 취급됐고, 이번 정부 들어 미래창조라는 다소 뜻이 애매하지만 거창한 목표를 위한 것으로 자리매김했으니 우리나라에서 특정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고 진리를 밝히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기초연구자가 설 자리는 처음부터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점은 원천 지식 창출로 궁극적인 혁신을 이루는 바탕이 되는 건 기초연구 성과이고, 과학을 기술 개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한 과학 강국이 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진정으로 우리나라 R&D가 선진국 추격형에서 벗어나 선도형으로 바뀌길 원한다면 정부는 실용적 목적을 앞세우는 기술 개발 연구를 독려할 것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기초연구 현장을 되살리는 정책을 펴야 한다. 무엇보다 시급한 일은 좀 더 많은 연구자가 마음껏 창의력을 발휘하고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기초연구지원 사업에 예산 배정을 늘리는 것이다. 이런 정책적 전환을 이루려면 우리 모두 가시적 성과를 빠르게 내고 싶다는 유혹을 이겨내고 기초를 탄탄히 다지지 않으면 높은 집을 지을 수는 없다는 상식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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