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연구개발(R&D) 투자에 비해 성과가 좋지 않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에 따라 예산 집행 효율성을 높일 방침이다.”
8월 30일 내년도 정부 예산안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송언석 기획재정부 2차관이 한 말이다. 정부가 이날 공개한 예산안에 따르면 2017년 우리나라 R&D 예산은 19조4371억 원이다. 올해 재정 규모와 비교할 때 1.8% 늘어난 액수로 문화·체육·관광(6.9%), 교육(6.1%), 보건·복지·노동(5.3%) 등에 비하면 증가율이 낮다. 이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예산 집행 효율성’을 언급한 것이다.
이에 대해 과학계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한 대학교수는 “R&D 예산 증가율이 낮은 것보다 더 걱정스러운 건 정부가 효율성을 높이겠다고 천명한 점”이라며 “이것이 연구 결과를 따져 당장 성과가 나는 쪽에 예산을 집중하고 성과가 안 나는 데는 투자하지 않겠다는 뜻이라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밝혔다.
단기성과주의의 덫
미래창조과학부(미래부)에 따르면 2014년 민간을 포함한 우리나라 R&D 투자액은 63조7341억 원이다. 세계 6위 규모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 비중은 2013~14년 2년 연속 세계 1위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정부가 담당하는 몫도 크다. 우리나라는 2016년 전체 예산의 5.37%에 이르는 19조942억 원을 R&D에 투자했다. 그런데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이에 대해 한 기초과학 분야 연구자는 “학계에서도 그동안 정부 R&D 예산 집행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계속 나왔다. 장기적으로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연구보다 당장 산업화하기 좋은 연구 쪽에 자금이 몰리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이번 발표를 보니 정부는 그런 기조를 앞으로 더욱 강화할 생각인 듯하다. 연구 분야에서만큼은 단기성과주의에서 벗어나는 게 오히려 장기적 이익이 될 수 있음을 모르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이날 2017년 예산안을 발표하며 △자율주행차 △인공지능(AI) △가상·증강현실 등 9개 R&D 프로젝트에 예산 300억 원을 편성한다고 밝힌 데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 연구자는 “해당 분야는 이미 세계 각국 기업이 관련 기술과 시장을 선점한 상태다.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건 선진국 따라잡기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여는 것인데, 정부는 여전히 1970~80년대식 R&D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영국 학술지 ‘네이처’는 6월 ‘한국은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이 세계 1위지만 노벨상 수상자가 한 명도 없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은 바 있다. 당시 네이처가 이런 현상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한 것이 연구비 쏠림 현상이었다. 우리나라 R&D 투자가 논문을 쓰는 데 적합한 기초과학보다 산업화로 수익을 낼 수 있는 응용분야에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은 1999년 2.07%에서 2014년 4.29%로 치솟았다. 하지만 2014년 현재 우리나라 발표 논문 편수(7만2269편)는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이 1.22%인 스페인(7만8817편)보다도 적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지 않는 한 ‘노벨상의 꿈’은 요원할 것이라는 게 당시 네이처의 진단이다(그래프1, 2 참조).
기초과학 생태계가 위험하다
과학계에 따르면 우리 정부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를 만회할 방안도 마련해뒀다고 한다. 2011년 ‘세계적 수준의 기초과학연구를 수행하고 이를 통해 창조적 지식 확보와 우수 연구인력 양성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한 기초과학연구원(IBS)이다.
IBS는 7월 말 네이처가 세계 대학 및 연구기관 등을 대상으로 선정, 발표한 ‘네이처 인덱스 떠오르는 스타’에 이름을 올려 화제를 모았다. 당시 네이처는 최근 4년간 발표된 주요 과학논문 등을 평가해 순위를 매겼는데, IBS는 국내 연구기관 중 최고 순위인 11위를 기록했다. 네이처는 이를 보도하며 ‘한국의 신생 연구기관 IBS가 4년간 평점을 4732% 이상 끌어올렸다. 한국 리더들이 이 기관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소개했다.
눈에 띄는 것은 해당 조사에서 1위부터 9위까지를 중국이 휩쓸었다는 점이다. 1위를 차지한 중국과학원(CAS)의 뒤를 이어 베이징대, 난징대, 중국과학기술대, 난카이대, 저장대, 푸단대, 칭화대, 쑤저우대 등이 차례로 이름을 올렸다. 해당 목록 100위 안에 든 중국 연구기관은 40개로 미국(11개), 영국(9개), 독일(8개)보다 월등히 많다. 반면 우리나라는 IBS를 제외하면 UNIST(울산과학기술원, 50위)만 ‘떠오르는 스타’에 포함됐다. 이에 대해 과학계에서는 IBS의 연구비 독식이 반영된 결과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재 IBS에서는 26개 연구단이 유전체교정, 암흑물질, 그래핀 등 다양한 주제를 연구 중이다. 각 연구단은 최소 10년간 이어지는 연구 기간에 매년 수십억 원에서 최대 100억 원대까지 연구비를 받는다. 반면 IBS에 속하지 않은 기초분야 연구실의 경우 연구비 확보가 쉽지 않다는 게 일반적 의견이다. 한 대학교수는 “정부가 노벨상 과학 분야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 중국을 따라잡기 위해 전략적으로 IBS를 육성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얘기다. 이렇게 ‘소수정예 몰빵’ 식으로 연구비를 지원하는 게 당장은 효율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초과학연구 생태계를 말려 죽일 수 있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대학교수들이 돈이 없어 실험실 운영을 포기하면 기초분야연구 인력을 키워낼 수 없다. 대학원생이 배출되지 않으면 누가 IBS에 가서 연구하겠느냐”는 얘기다. 또 다른 연구자도 “중국은 여러 기관이 동반성장하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대학과 연구소가 상생해야 연구의 다양성이 확보되고 경쟁력도 높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올해는 우리나라 최초 정부출연연구소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와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세워진 지 50년 되는 해다. 정부는 이를 기념해 2016년을 ‘과학기술 50주년’으로 선포하고 연초부터 다양한 행사를 열어왔다. 이병태 KAIST(한국과학기술원) 경영대 교수는 이에 대해 “한국은 지난 50년간 선진국의 과학기술을 재빨리 흡수하고 따라잡는 추격형 R&D 전략으로 눈부신 성장을 일궜다. 하지만 전통적 성장엔진이 멈춰가고 새로운 성장엔진을 찾지 못한 현 상황에서는 또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정부가 눈앞의 성과만 노리는 주먹구구식 과학기술정책을 지양하고 장기적으로 한국 산업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R&D 계획을 세워야 할 때”라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