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27일 새 대표에 당선된 최병렬 의원에게 축하인사를 하고 있는 서청원 의원(오른쪽).
“도대체 등급 나눈 저의가 뭐냐”
총선 3개월여를 앞둔 한나라당이 시끄럽다. 동아일보가 공개한 당무감사 자료가 원인을 제공했다. 당무감사에서 A-B등급으로 분류된 인사들은 은연중 표정관리를 하며 느긋하다. 반면 C-D등급으로 분류된 인사들은 ‘서열화’를 매긴 당지도부의 처사에 분통을 터뜨린다. 물갈이 공포 속에 자조 섞인 반응도 심심찮게 터져나온다.
2003년 12월31일 이재오 사무총장이 사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당초 당무감사 실무책임자인 이재환 조직국장은 당무감사 결과를 포괄적 ‘점수’로 정리했다. 공천 가능한 점수의 기준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정치적 접근의 ‘여지’가 많은 자료였다. 이국장은 한 보따리가 넘는 이 당무감사 자료를 박승국 전 부총장과 이 전 총장에게 넘겼다. 이를 받아 본 이 전 총장이 “알기 쉽게 A-B-C-D로 간략하게 나누어 보고하라”고 지시, 서열화 작업에 들어갔다. 그 와중에 몇몇 지구당의 당무감사 결과가 흘러나와 당사자들의 격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대구·경북 지역 한 인사는 당무감사에 나섰던 관계자들로부터 자신이 경선 또는 물갈이 대상으로 분류됐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실무진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어 등급변경을 요청했다는 것. 이 인사의 경우 공개된 당무감사 결과 당초보다 훨씬 여유 있는 등급을 받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후문이다.
2003년 12월31일 한나라당 종무식에서 건배를 제의하는 최병렬 대표.
서 전 대표는 이번 파동이 터지기 전 최대표와 비밀회동을 가졌다. 최대표가 “공천 문제를 논의하자”며 식사를 제의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지난해 12월22일. 이날 회동에서 최대표는 서 전 대표에게 공천 물갈이에 대한 당의 입장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던 것으로 서 전 대표측은 설명한다. 그러나 서 전 대표는 최대표의 이런 제의를 거절했다. 물갈이의 선봉에 서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불행한 사태를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신 서 전 대표는 공신력 있는 공천심사위원회를 구성, 공천문제를 맡기자는 원론적 입장을 전달했다. 결국 이날 회동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서 전 대표측이 12월29일 동아일보의 당무감사 자료 공개를 놓고 의문을 제기하는 배경이다. 이 비밀회동이 있은 지 정확히 일주일 후 당무감사 자료가 언론에 공개됐기 때문이다.
서 전 대표측은 이번 일을 계기로 최대표측과 공존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본인이 C급으로 분류됐고, 지난해 6월 대표경선 당시 자신을 지지했던 인사들 상당수가 C-D급에 포진, 수장으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입장이다. 그의 주변에서는 대의원을 규합해 최대표를 대표직에서 끌어내리자는 주장이 터져나오고 있다. 그러나 비주류인 서 전 대표가 수적 우위를 확보하기란 애초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분당론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2003년 10월30일 불법 대선자금과 관련 한나라당사에서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이회창 전 총재.
문제는 서 전 대표를 비롯한 비주류가 창당을 할 정도로 실질적인 힘이 있느냐는 것이다. 분당을 해 독자적으로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다면 서 전 대표는 결단을 내릴 수 있다. 여기서 서 전 대표의 고민이 시작된다. 일단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보인다. 썬앤문그룹 김성래 전 부회장과의 부적절한 거래 의혹도 부담이다. 그를 따르는 대다수 인사들은 5·6공 출신이다. 그들은 대부분 당무감사에서 C-D급으로 분류된 인사들이다. 잘못하면 ‘반개혁’ 세력으로 몰려 몰살당하기 십상이다.
최대표측도 이런 점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다. 주류측이 이들의 탈당설에 대해 냉소를 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대표의 측근 K씨는 “신당은 명분도, 구심점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는 “비주류가 당을 박차고 나가면 제2의 민국당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 전 대표측은 “1985년 신민당 돌풍도 있다”며 목소리를 높이지만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부담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모습이다. 이 때문에 서 전 대표측은 일단 당내 투쟁에 무게를 싣고 있다. 서 전 대표측은 의원과 지구당위원장 5분의 1의 서명을 받아 연석회의를 소집, 집단행동에 나설 계획이다. 독자적인 연석회의 개최는 원내ㆍ외 지구당위원장이 공개적으로 주류와 비주류로 양분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 비주류 의원은 “최대표가 연석회의를 거부하면 대표직무정치 가처분신청을 내는 방안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주류가 지도부 퇴진을 전제로 조기 전당대회를 소집하면 양측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
그럼에도 최대표측은 물갈이 방침을 확고하게 밀고 나갈 계획이다. 김문수 당 외부인사영입위원장은 1월4일 통화에서 “그동안 내세울 만한 거물급 인사들이 입당을 보류했지만 이제는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며 물갈이 공천에 자신감을 보였다. 최대표도 비주류 각개격파에 힘을 쏟는 모습이다. 최대표는 일부 공천심사위원을 자진사퇴 형식으로 교체하거나 중립적 인사들을 충원하는 방안을 마련 중이다. 또 이회창-서청원 직계 라인과 영남 출신 등 비주류 내 다양한 세력들을 선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대표는 이 전 총재가 1일 예산에서 만난 H씨에게 3일 두 차례 전화를 걸어 “공천파문 진화에 앞장서 달라”고 요청해 동의를 받았다는 후문이다. H씨는 4일 귀경한 뒤 운영위원들을 차례로 만나 집단행동을 자제해달라며 파문 진화에 적극 나섰다. 당권을 놓고 벌이는 전·현직 대표 간 한판승부가 머지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