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13일 평양에 도착해 김정일과 환하게 악수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위). 그러나 2003년 2월14일 그는 5억 달러를 북한에 보내고 정상회담을 가졌다는 발표를 했다(아래).
OFAC. 미국 재무부 산하의 외국자산통제국(Office of Foreign Assets Control)은 금융분야의 CIA다. OFAC은 테러와 마약 조직은 물론이고 대량살상무기(WMD)를 만들려고 하는 조직이나 나라로 흘러가는 ‘검은돈’을 전문적으로 추적하는 기관이다.
2001년 9·11테러 이후 OFAC의 힘은 더욱 강화됐다. OFAC은 테러나 마약, WMD와 관련된 자금이 유통된 사실을 포착하면 이를 CIA와 FBI 등에 통보해 수사케 하고, 이 돈을 움직인 주체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시키거나 이들에게 경제제재를 가할 수 있다.
현재 외환은행에는 론스타, 제일은행에는 뉴브리지캐피털 등 미국계 투자회사의 자금이 들어와 지배권을 형성하고 있다. OFAC은 미국의 금융기관뿐만 아니라 미국 자본이 들어가 있는 외국 금융기관에 대해서도 통제를 가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외국 은행이 테러나 마약, WMD와 관련된 자금 유통에 참여한 사실이 포착되면, OFAC은 미국 금융기관에 대해 이 외국은행과의 금융거래를 중지시킬 수 있다.(OFAC에 대해서는 www.ustreas.gov/offices/eotffc/ofac 참조)
중간과정서 미국으로도 송금 ‘감시 따돌려’
미국은 1987년 김현희의 KAL 858기 폭파사건 이후 북한을 테러국가로 지정했다. 1993년 북한의 노동미사일 시험발사와 1차 북핵 위기가 있은 다음에는 북한을 WMD 보유국으로 의심해왔던 터라 OFAC은 북한으로 들어가는 자금을 예민하게 추적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의 요구로 현대그룹이 마련한 2억 달러 비밀송금을 방조해야 했던 국가정보원은 OFAC의 눈을 속이기 위해 고심했다. 그리고 마침내 OFAC의 감시를 피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지난해 대북송금 과정을 수사한 특검은 수사발표 때 미국과의 마찰을 우려해 국정원이 어떤 방법으로 OFAC의 감시망을 피해갔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2003년 6월25일 송두환 특검이 대북송금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그러나 그는 국정원이 미국의 감시를 어떻게 따돌렸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국정원에서 자금을 다루는 최모 기조실장이 김모 당시 외환은행장을 찾아가 협조를 부탁하고, 이어 국정원 기조실의 담당관과 외환은행의 외환송금 실무자들이 만나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했다고 한다. 이 논의에서 제3국 은행을 중계지로 이용하는 이른바 ‘스리 쿠션’ 방법이 채택되었다.
외환은행이 2억 달러를 제3국 은행으로 송금하면, 제3국 은행은 평소 거래가 있어 수억 달러를 보내줘야 하는 미국 은행에 이 2억 달러가 포함된 돈을 송금한다. 이렇게 하면 외환은행이 송금한 2억 달러는 제3국 은행을 통해 미국 은행에 입금되었으므로 OFAC은 크게 주목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제3국 은행은 보유 외환 중에서 2억 달러를 북한의 대성은행 계좌로 송금하는데, 이때 제3국 은행과 대성은행은 무역거래로 인한 자금처럼 위장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니까 외환은행의 송금에 협조할 제3국 은행은 2억 달러 이상을 보유할 정도로 외환거래 규모가 커야 하고, 미국의 제재를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뱃심이 있어야 하며, 외환은행은 물론이고 북한 정부와도 ‘말발이 통하는’ 사이라야 했다.
동유럽과 소련이 붕괴된 후 북한은 외채를 갚지 못하는 모라토리엄(외환 지불유예) 상태에 들어갔고 여기에 OFAC의 감시가 보태져, 미국과 그 우방국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의 은행들도 북한과는 거의 거래를 하지 않았다. 북한이 거래하는 외국 은행은 중국은행(Bank Of China)과 C와 H은행의 마카오 지점, 그리고 최근 파산한 일본의 아시카가(足利)은행 정도였다. 북한은 그외 북한을 방문한 외국인이 사용한 신용카드 자금을 결재하기 위해 U와 C은행의 싱가포르 지점도 이용해왔다.
북한 달러 사용 증가 탓 나중에 꼬리 잡혀
이중에서 북한이 믿을 수 있고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으며 2억 달러를 동원할 수 있는 곳은 중국은행뿐이었다. 국정원과 외환은행은 중국은행을 주 통로로, H은행을 보조통로로 이용해 2억 달러를 송금하기로 하고 비밀리에 두 은행에 협조를 요청했다. 중국은 남북정상회담 개최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박지원-송호경 회담 장소를 제공하는 등 남북정상회담 개최 자체를 적극 환영하는 처지였으므로 중국은행 또한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답을 보내왔다고 한다. 이때 북한은 6월9일 ○시까지 송금을 완료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중국은행은 이 시한에 맞춰 대성은행에 송금을 완료해주었다.
그후 국정원과 외환은행은 중국은행이 외환은행을 통해 받은 2억 달러를 미국은행과의 거래에서 사용한 사실을 확인했다. 한국에서 나간 돈의 최종 도착지가 미국이었으니 OFAC는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후 OFAC는 북한이 평소 거래하던 것보다 많은 달러를 사용하는 것을 알고 추적해 대략 4억 달러가 한국에서 북한으로 흘러간 것으로 추정했다(현대가 북한에 보낸 돈은 한국에서 보낸 2억 달러를 포함해 대략 5억 달러였다). 그리고 2002년 3월 이를 미 의회연구소(CRS) 닉시 연구원의 보고서를 통해 공개하였다.
이 자료가 한나라당에 들어가 정치쟁점이 되자 마침내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5억 달러를 보냈다는 기자회견을 함으로써 대북 비밀송금의 진실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