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31일 서울 관악구 신림7동 101번지-난곡. 가파른 고개가 숨을 할딱거리게 하고 매캐한 분뇨 냄새는 코를 찌른다. 철거로 폭격을 맞은 듯한 주택가, ‘푸세식’이라 불리는 재래식 화장실….
라면과 소주만 팔린다는 구멍가게 앞에선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구멍가게 앞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탁주를 돌리던 주민들은 관악구청으로 시위를 다녀왔다고 했다. 월드컵 얘기가 나오자 주민들의 울분이 터져나왔다.
“월드컵은 무슨…. 서울에 이런 동네가 있는데 무슨 월드컵이냐고. 폭탄 맞은 것도 아니고 집을 헐었으면 똥은 치워야지. 장마가 시작되면 똥물이 넘치고 산사태도 날 텐데….”
“난 그래도 여기서 죽을겨. 갈 데도 없구먼.”
“상암동에 가서 시위할 거구먼. 동네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사람들을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그래도 일본 기자는 부르면 안 돼. 그놈들이 한국에 이런 동네가 있다는 걸 알면 우리를 더 무시할 거 아냐.”
난곡은 2001년 10월 재개발지구로 지정돼 현재 철거가 진행중이다. 좁은 골목길에 어깨를 마주하고 들어선 20여채의 ‘벌집’ 중 사람이 사는 곳은 1~2채가 고작. 1250여채의 가옥 중 1000여채가 헐렸고 이주비용을 마련하지 못한 250여 가구가 남아 ‘달동네’를 지키고 있다.
난곡 사람들에게 ‘월드컵 열기’를 기대했다면 무리인지도 모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던가. ‘잠잘 곳’ ‘먹을 것’도 보장돼 있지 않은 이들이 스포츠에 관심을 갖는 것은 ‘사치’일 따름이다. 난곡 주민들은 축구경기를 볼 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다. 보상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하루하루가 힘겹기만 하다. 매일밤 주민들은 ‘야방’(야간방범)을 돈다. 퇴거 요구에 불응하는 사람들 집의 이웃한 곳에서 화재가 자주 발생했는데, 주민들은 누군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자신들을 쫓아내려 한다고 믿고 있다. “오늘 개막전 보실 거예요?”라고 물으면 “야방 돌아야 한다”는 답이 되돌아왔다.
“김치도 없이 고추장, 간장으로 연명해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슨 월드컵이에요. 폭탄 맞은 난곡동의 모습을 외국인들이 봤다면 개최지로 선정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지난 일요일에도 장례식을 치렀어요. 올 봄에 자신의 집이 헐리고 폐가에서 생활하던 아저씨인데,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이런데도 우리가 월드컵에 들떠야 합니까?” 세입자모임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권광자씨(61)의 말이다. 난곡의 가장들은 거주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탓에 ‘삶’을 생각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 것이다.
서울시와 관할 관악구청은 1997년 11월 이전 난곡으로 이주한 전입자에 한해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주기로 했다. 1997년 11월 이후 이주한 사람들은 20여만원의 이사비가 보상금의 전부다. 임대아파트의 입주조건은 보증금 1100만원에 월세 10여만원. 그러나 평균 300만원의 전세, 사글세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이 조건은 버겁다. 빚을 내 간신히 입주한다 해도 정기적인 수입이 없는 사람들은 월세 내기에도 빠듯하다.
“난곡을 떠난 사람들은 ‘부자’예요. 20군데가 넘는 달동네를 전전해 왔습니다. 이제 또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200만원을 갖고 집을 얻을 수 있는 곳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월드컵입니까?” 한 세입자의 말이 가슴을 후볐다.
난곡에서도 과거엔 축구 열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조기축구회’ 회원인 이창언(60)씨는 “가난한 동네지만 축구를 통해 주민들이 정을 돈독히 했다. 건강도 지키고 친목 도모 수단으로 축구를 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주민들 대부분이 떠나 월드컵이 열리는데도 축구에 관심조차 없는 곳이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렇다고 난곡에 월드컵 열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고단한 삶을 짊어진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에겐 월드컵이 가장 큰 화제다. 동네 공터에서 축구공을 갖고 놀던 박모군(12)의 꿈은 축구선수가 되는 것. 최근 박군의 가장 큰 관심사는 당연히 국가대표팀의 16강 진출 여부다.
지난 3월 이사 간 사람이 두고 간 14인치 텔레비전을 주워온 뒤로는 ‘월드컵 전문가’가 됐다. 박군은 ‘월드컵 방송’을 매일 시청한 덕에 각국 선수들의 이름과 각국 국가대표팀의 장단점을 줄줄이 외우고 있다.
“홍명보 선수가 제일 좋아요. 월드컵 경기장에 구경 가고 싶지만 엄마가 돈이 없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오늘 열리는 프랑스-세네갈전부터 한 게임도 빠지지 않고 다 볼 거예요. 한국팀 16강 파이팅!”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 월드컵 공인구 피버노바라는 박군은 6월 신림13동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박군의 가정처럼 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있는 집은 대부분 이사했기 때문에 현재 난곡엔 학생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썰렁한 난곡의 월드컵 분위기는 아이들이 떠난 탓도 있는 듯했다.
독거노인들에게도 월드컵은 큰 선물이다. ‘재밋거리’도 되고, 떨어져 사는 아들과 손자를 떠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삿짐을 싸느라 여념이 없던 박모 할머니는 세간살이 중 유독 TV를 애지중지 다뤘다. 안양으로 이사할 예정인 박할머니는 이웃에서 ‘팔아준’ 김칫국물로 식사를 대신할 정도로 가난하다. 보증금은 월세를 내지 못해 모두 까먹었고 당뇨가 심해 날품팔이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축구와 월드컵은 이런 박할머니에게 가난과 배고픔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다.
“축구를 보면 하루가 그냥 가부러. 우리나라 선수들이 얼마나 축구를 잘하는지 용돈이라도 주고 싶다니까. 오늘부터 월드컵이 시작된다고? 그러면 하루종일 축구 보면 되겠네. 테레비랑 축구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간. 홍명보 선수는 내 손자랑 닮았어. 그놈 아부지도 사업에 자꾸 실패해서 그렇지 어렸을 때 축구를 얼마나 잘했는데….”
오후 8시30분 프랑스와 세네갈의 개막경기가 시작되자 주민들이 하나둘씩 세입자 대표회의 사무실로 모여들었다. 축구엔 관심 쓸 겨를이 없다던 이들도 모두 숨죽여 경기를 지켜봤다. 주민들은 모두 우승후보 프랑스 대신 약자인 세네갈을 응원했다. 전반 30분 세네갈의 부바 디오프가 선제골을 터뜨리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고, 사람들은 ‘이변’이라며 마치 한국팀이 이긴 것처럼 즐거워했다. 경기중엔 한국 국가대표팀의 전력에 관한 토론이 벌어졌고, 16강 진출의 바람을 담은 소망들도 이어졌다. 월드컵엔 관심 없다던 주민들도 축구를 보며 잠시나마 시름을 잊는 듯했다. 무분별한 재개발에 멍들고 부족한 복지정책 탓에 신음하는 난곡에도 비로소 월드컵이 찾아온 것이다.
개막전이 끝나자 난곡에는 비가 내렸다. 한 아주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비가 오니까 야방 안 돌아도 되겠네. 그런데 한국 경기는 며칟날 해요?”
아이들이 몰려 있는 마을 입구의 공부방에선 대표팀 응원가 ‘오~ 필승 코리아’가 왁자지껄 울려 퍼지고 있었다.
라면과 소주만 팔린다는 구멍가게 앞에선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구멍가게 앞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탁주를 돌리던 주민들은 관악구청으로 시위를 다녀왔다고 했다. 월드컵 얘기가 나오자 주민들의 울분이 터져나왔다.
“월드컵은 무슨…. 서울에 이런 동네가 있는데 무슨 월드컵이냐고. 폭탄 맞은 것도 아니고 집을 헐었으면 똥은 치워야지. 장마가 시작되면 똥물이 넘치고 산사태도 날 텐데….”
“난 그래도 여기서 죽을겨. 갈 데도 없구먼.”
“상암동에 가서 시위할 거구먼. 동네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사람들을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그래도 일본 기자는 부르면 안 돼. 그놈들이 한국에 이런 동네가 있다는 걸 알면 우리를 더 무시할 거 아냐.”
난곡은 2001년 10월 재개발지구로 지정돼 현재 철거가 진행중이다. 좁은 골목길에 어깨를 마주하고 들어선 20여채의 ‘벌집’ 중 사람이 사는 곳은 1~2채가 고작. 1250여채의 가옥 중 1000여채가 헐렸고 이주비용을 마련하지 못한 250여 가구가 남아 ‘달동네’를 지키고 있다.
난곡 사람들에게 ‘월드컵 열기’를 기대했다면 무리인지도 모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던가. ‘잠잘 곳’ ‘먹을 것’도 보장돼 있지 않은 이들이 스포츠에 관심을 갖는 것은 ‘사치’일 따름이다. 난곡 주민들은 축구경기를 볼 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다. 보상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하루하루가 힘겹기만 하다. 매일밤 주민들은 ‘야방’(야간방범)을 돈다. 퇴거 요구에 불응하는 사람들 집의 이웃한 곳에서 화재가 자주 발생했는데, 주민들은 누군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자신들을 쫓아내려 한다고 믿고 있다. “오늘 개막전 보실 거예요?”라고 물으면 “야방 돌아야 한다”는 답이 되돌아왔다.
“김치도 없이 고추장, 간장으로 연명해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슨 월드컵이에요. 폭탄 맞은 난곡동의 모습을 외국인들이 봤다면 개최지로 선정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지난 일요일에도 장례식을 치렀어요. 올 봄에 자신의 집이 헐리고 폐가에서 생활하던 아저씨인데,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이런데도 우리가 월드컵에 들떠야 합니까?” 세입자모임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권광자씨(61)의 말이다. 난곡의 가장들은 거주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탓에 ‘삶’을 생각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 것이다.
서울시와 관할 관악구청은 1997년 11월 이전 난곡으로 이주한 전입자에 한해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주기로 했다. 1997년 11월 이후 이주한 사람들은 20여만원의 이사비가 보상금의 전부다. 임대아파트의 입주조건은 보증금 1100만원에 월세 10여만원. 그러나 평균 300만원의 전세, 사글세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이 조건은 버겁다. 빚을 내 간신히 입주한다 해도 정기적인 수입이 없는 사람들은 월세 내기에도 빠듯하다.
“난곡을 떠난 사람들은 ‘부자’예요. 20군데가 넘는 달동네를 전전해 왔습니다. 이제 또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200만원을 갖고 집을 얻을 수 있는 곳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월드컵입니까?” 한 세입자의 말이 가슴을 후볐다.
난곡에서도 과거엔 축구 열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조기축구회’ 회원인 이창언(60)씨는 “가난한 동네지만 축구를 통해 주민들이 정을 돈독히 했다. 건강도 지키고 친목 도모 수단으로 축구를 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주민들 대부분이 떠나 월드컵이 열리는데도 축구에 관심조차 없는 곳이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렇다고 난곡에 월드컵 열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고단한 삶을 짊어진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에겐 월드컵이 가장 큰 화제다. 동네 공터에서 축구공을 갖고 놀던 박모군(12)의 꿈은 축구선수가 되는 것. 최근 박군의 가장 큰 관심사는 당연히 국가대표팀의 16강 진출 여부다.
지난 3월 이사 간 사람이 두고 간 14인치 텔레비전을 주워온 뒤로는 ‘월드컵 전문가’가 됐다. 박군은 ‘월드컵 방송’을 매일 시청한 덕에 각국 선수들의 이름과 각국 국가대표팀의 장단점을 줄줄이 외우고 있다.
“홍명보 선수가 제일 좋아요. 월드컵 경기장에 구경 가고 싶지만 엄마가 돈이 없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오늘 열리는 프랑스-세네갈전부터 한 게임도 빠지지 않고 다 볼 거예요. 한국팀 16강 파이팅!”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 월드컵 공인구 피버노바라는 박군은 6월 신림13동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박군의 가정처럼 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있는 집은 대부분 이사했기 때문에 현재 난곡엔 학생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썰렁한 난곡의 월드컵 분위기는 아이들이 떠난 탓도 있는 듯했다.
독거노인들에게도 월드컵은 큰 선물이다. ‘재밋거리’도 되고, 떨어져 사는 아들과 손자를 떠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삿짐을 싸느라 여념이 없던 박모 할머니는 세간살이 중 유독 TV를 애지중지 다뤘다. 안양으로 이사할 예정인 박할머니는 이웃에서 ‘팔아준’ 김칫국물로 식사를 대신할 정도로 가난하다. 보증금은 월세를 내지 못해 모두 까먹었고 당뇨가 심해 날품팔이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축구와 월드컵은 이런 박할머니에게 가난과 배고픔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다.
“축구를 보면 하루가 그냥 가부러. 우리나라 선수들이 얼마나 축구를 잘하는지 용돈이라도 주고 싶다니까. 오늘부터 월드컵이 시작된다고? 그러면 하루종일 축구 보면 되겠네. 테레비랑 축구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간. 홍명보 선수는 내 손자랑 닮았어. 그놈 아부지도 사업에 자꾸 실패해서 그렇지 어렸을 때 축구를 얼마나 잘했는데….”
오후 8시30분 프랑스와 세네갈의 개막경기가 시작되자 주민들이 하나둘씩 세입자 대표회의 사무실로 모여들었다. 축구엔 관심 쓸 겨를이 없다던 이들도 모두 숨죽여 경기를 지켜봤다. 주민들은 모두 우승후보 프랑스 대신 약자인 세네갈을 응원했다. 전반 30분 세네갈의 부바 디오프가 선제골을 터뜨리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고, 사람들은 ‘이변’이라며 마치 한국팀이 이긴 것처럼 즐거워했다. 경기중엔 한국 국가대표팀의 전력에 관한 토론이 벌어졌고, 16강 진출의 바람을 담은 소망들도 이어졌다. 월드컵엔 관심 없다던 주민들도 축구를 보며 잠시나마 시름을 잊는 듯했다. 무분별한 재개발에 멍들고 부족한 복지정책 탓에 신음하는 난곡에도 비로소 월드컵이 찾아온 것이다.
개막전이 끝나자 난곡에는 비가 내렸다. 한 아주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비가 오니까 야방 안 돌아도 되겠네. 그런데 한국 경기는 며칟날 해요?”
아이들이 몰려 있는 마을 입구의 공부방에선 대표팀 응원가 ‘오~ 필승 코리아’가 왁자지껄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