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9월 이래 이스라엘은 500명, 팔레스타인 쪽은 1500명이 사망했다. 희생자 비율이 1대 3이다. 현재 상황을 전쟁이라 볼 것인지, 아니면 낮은 단계의 유혈분쟁으로 볼 것인지는 이스라엘군 내부에서도 견해가 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인티파다’라 부르는 이번 유혈투쟁이 20개월을 넘기면서, 이스라엘군 내부에선 일선에 배치된 병사들이 신경이 곤두선 나머지 비무장 시민을 향해 총을 쏘아대는 과잉행동이 문제 되고 있다. 이스라엘군의 방벽작전으로 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주택들이 파괴된 서안지구 북부도시 예닌 난민수용소에서의 참극도 이런 논쟁선상에 있다.
예닌으로 가는 길은 간단치 않았다. 직선거리로는 예루살렘에서 80km쯤 되고 1시간 반이면 넉넉히 닿는 거리다. 그러나 도로 곳곳에 설치된 검문소는 상습적인 병목구간을 이루고, 서너 시간 동안 느닷없이(이스라엘군 설명으로는 보안상의 문제 때문) 뙤약볕 아래 기다리기 일쑤다. 동예루살렘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택시 운전사는 “당신을 틀림없이 예닌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장담했다. 예닌에 닿으려면 팔레스타인 동부도시 예리코를 멀리 바라보면서 요르단 국경선을 따라 빙 돌아가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요르단강을 끼고 달리며 아름다운 풍치를 잠시 즐기긴 했지만, 결국 운전사의 장담이 헛말이라는 게 드러났다. 예닌 초입을 지키는 이스라엘군 검문소에서 택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이스라엘 병사는 필자에게 멀리 보이는 예닌 시내 쪽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If you really want to go to Jenin, you can walk this way. But no taxi”라며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이스라엘 공보부가 발급한 프레스카드를 내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없이 40OC 가까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들판을 걸어야 했다.
가는 도중 아기를 안은 팔레스타인 여인과 그녀의 시어머니를 만났다. 예닌 난민수용소에 있던 친척이 이스라엘군에 살해돼 문상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들에겐 이미 이런 고통이 익숙한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30분쯤 걷자, 예닌으로 이어지는 샛길에서 택시를 만났다. 50대 후반의 사람 좋아 보이는 택시 운전사는 “당신은 어쩌다 겪는 일이지만, 날마다 겪는 우리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사는 꼴”이라며 더위 먹은 필자에게 신문지를 말아 부채질을 해주었다.
예닌 시내에 들어서자, 길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비둘기상(像)이 눈길을 끌었다. 후에 시청 관계자에게서 들으니, 이 지역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평화를 그런 예술작품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사정을 알아보려고 먼저 시청에 들렀다. 예닌 시장은 80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상자기사 참조).
이스라엘 쪽에서는 사망자가 50명쯤 났고 “대부분 테러리스트였다”고 주장한다. 예닌 난민수용소는 하마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무장 저항세력의 근거지 중 하나라는 게 이스라엘군 대변인의 주장이다. 문제는 무너진 집더미 밑에 실종자들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다. 현재 파괴된 집들을 다 파헤친다면 사망자 규모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예닌 난민수용소에 가보니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처참했다. 문득 1999년 코소보전 현장취재 때 본 모습들이 떠올랐다. 세르비아 사람들의 약탈과 방화로 코소보 마을 곳곳이 불타고 파괴됐지만, 2002년 예닌 난민수용소의 모습은 그보다 더 참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족을 잃은 난민들은 포클레인을 동원해 사람이 묻혀 있을 만한 지점을 파내고 있었다. 이스라엘군이 들어올 때 혼자 피해 아내와 딸의 생사를 모르고 있다는 아흐야 하잠(31)은 거의 넋을 잃은 모습이었다. “이미 시간이 흘러 살아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지만, 저 밑에 묻혀 있을 것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다”며 무너진 집더미를 가리킨다. 언덕빼기의 한 파괴현장에서는 한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고단한 삽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무하마드라고만 이름을 밝힌 40대 초반의 이 난민은 “그동안 힘들게 저축한 돈을 책상서랍에 넣어두었는데, 이스라엘군이 대형 불도저로 집을 무너뜨려 함께 묻혀버렸다”면서 다시 삽을 들었다.
다행히 집이 파괴되는 것을 면한 그곳 난민들은 저마다 필자를 집 안으로 불러들여 ‘이스라엘군의 약탈현장’을 보여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수페야 아마드 술이만(38·여)은 “이스라엘군이 우리 집에 들어와 컴퓨터와 비디오 기기들을 일부러 고장냈다”고 두 손을 쳐들며 알라신을 찾았다. 모니터는 멀쩡했지만 하드웨어는 수리가 불가능하도록 망가진 상태였다.
예닌 난민수용소에서 이스라엘군 방벽작전이 일주일에 걸쳐 펼쳐지는 동안 난민 중 상당수는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고, 먹을거리나 마실 물조차 없어 큰 고통을 받았다. 초등학교 교사인 파이자 자이단(54·여)은 “어른들이야 배고픔이나 갈증을 그런대로 참는다지만, 아이들이 참 고생했다”며 생각하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든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고난사는 50년을 넘는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많은 난민이 생겨났고, 팔레스타인과 이웃 요르단 등에도 수많은 난민이 있다. 이들의 정확한 숫자는 집계기관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500만명이 넘는 것으로 밝혀졌다. 예닌 수용소도 그중 하나로, 지난 1953년 이스라엘 각지에서 밀려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모여들어 이루어진 수용소다.
이곳 난민을 돌보아온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관인 UNRWA의 한 실무자는 “난민 중 상당수가 지금도 예전에 살던 집과 땅 문서를 지니고 언젠가 돌아갈 날을 꼽고 있다”고 귀띔한다. 이스라엘군이 물러난 뒤 UNRWA는 예닌 시청과 손잡고 이곳 난민들에게 음식과 마실 물, 담요 등을 나눠주고 환자들을 병원에 입원시키는 일을 주선하고 있다. 그런 파괴현장 속에서도 아이들은 장난감 총을 들고 전쟁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예닌으로 가는 길은 간단치 않았다. 직선거리로는 예루살렘에서 80km쯤 되고 1시간 반이면 넉넉히 닿는 거리다. 그러나 도로 곳곳에 설치된 검문소는 상습적인 병목구간을 이루고, 서너 시간 동안 느닷없이(이스라엘군 설명으로는 보안상의 문제 때문) 뙤약볕 아래 기다리기 일쑤다. 동예루살렘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택시 운전사는 “당신을 틀림없이 예닌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장담했다. 예닌에 닿으려면 팔레스타인 동부도시 예리코를 멀리 바라보면서 요르단 국경선을 따라 빙 돌아가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요르단강을 끼고 달리며 아름다운 풍치를 잠시 즐기긴 했지만, 결국 운전사의 장담이 헛말이라는 게 드러났다. 예닌 초입을 지키는 이스라엘군 검문소에서 택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이스라엘 병사는 필자에게 멀리 보이는 예닌 시내 쪽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If you really want to go to Jenin, you can walk this way. But no taxi”라며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이스라엘 공보부가 발급한 프레스카드를 내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없이 40OC 가까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들판을 걸어야 했다.
가는 도중 아기를 안은 팔레스타인 여인과 그녀의 시어머니를 만났다. 예닌 난민수용소에 있던 친척이 이스라엘군에 살해돼 문상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들에겐 이미 이런 고통이 익숙한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30분쯤 걷자, 예닌으로 이어지는 샛길에서 택시를 만났다. 50대 후반의 사람 좋아 보이는 택시 운전사는 “당신은 어쩌다 겪는 일이지만, 날마다 겪는 우리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사는 꼴”이라며 더위 먹은 필자에게 신문지를 말아 부채질을 해주었다.
예닌 시내에 들어서자, 길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비둘기상(像)이 눈길을 끌었다. 후에 시청 관계자에게서 들으니, 이 지역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평화를 그런 예술작품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사정을 알아보려고 먼저 시청에 들렀다. 예닌 시장은 80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상자기사 참조).
이스라엘 쪽에서는 사망자가 50명쯤 났고 “대부분 테러리스트였다”고 주장한다. 예닌 난민수용소는 하마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무장 저항세력의 근거지 중 하나라는 게 이스라엘군 대변인의 주장이다. 문제는 무너진 집더미 밑에 실종자들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다. 현재 파괴된 집들을 다 파헤친다면 사망자 규모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예닌 난민수용소에 가보니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처참했다. 문득 1999년 코소보전 현장취재 때 본 모습들이 떠올랐다. 세르비아 사람들의 약탈과 방화로 코소보 마을 곳곳이 불타고 파괴됐지만, 2002년 예닌 난민수용소의 모습은 그보다 더 참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족을 잃은 난민들은 포클레인을 동원해 사람이 묻혀 있을 만한 지점을 파내고 있었다. 이스라엘군이 들어올 때 혼자 피해 아내와 딸의 생사를 모르고 있다는 아흐야 하잠(31)은 거의 넋을 잃은 모습이었다. “이미 시간이 흘러 살아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지만, 저 밑에 묻혀 있을 것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다”며 무너진 집더미를 가리킨다. 언덕빼기의 한 파괴현장에서는 한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고단한 삽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무하마드라고만 이름을 밝힌 40대 초반의 이 난민은 “그동안 힘들게 저축한 돈을 책상서랍에 넣어두었는데, 이스라엘군이 대형 불도저로 집을 무너뜨려 함께 묻혀버렸다”면서 다시 삽을 들었다.
다행히 집이 파괴되는 것을 면한 그곳 난민들은 저마다 필자를 집 안으로 불러들여 ‘이스라엘군의 약탈현장’을 보여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수페야 아마드 술이만(38·여)은 “이스라엘군이 우리 집에 들어와 컴퓨터와 비디오 기기들을 일부러 고장냈다”고 두 손을 쳐들며 알라신을 찾았다. 모니터는 멀쩡했지만 하드웨어는 수리가 불가능하도록 망가진 상태였다.
예닌 난민수용소에서 이스라엘군 방벽작전이 일주일에 걸쳐 펼쳐지는 동안 난민 중 상당수는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고, 먹을거리나 마실 물조차 없어 큰 고통을 받았다. 초등학교 교사인 파이자 자이단(54·여)은 “어른들이야 배고픔이나 갈증을 그런대로 참는다지만, 아이들이 참 고생했다”며 생각하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든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고난사는 50년을 넘는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많은 난민이 생겨났고, 팔레스타인과 이웃 요르단 등에도 수많은 난민이 있다. 이들의 정확한 숫자는 집계기관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500만명이 넘는 것으로 밝혀졌다. 예닌 수용소도 그중 하나로, 지난 1953년 이스라엘 각지에서 밀려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모여들어 이루어진 수용소다.
이곳 난민을 돌보아온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관인 UNRWA의 한 실무자는 “난민 중 상당수가 지금도 예전에 살던 집과 땅 문서를 지니고 언젠가 돌아갈 날을 꼽고 있다”고 귀띔한다. 이스라엘군이 물러난 뒤 UNRWA는 예닌 시청과 손잡고 이곳 난민들에게 음식과 마실 물, 담요 등을 나눠주고 환자들을 병원에 입원시키는 일을 주선하고 있다. 그런 파괴현장 속에서도 아이들은 장난감 총을 들고 전쟁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