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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본 음악이라 해도 영어 가사로 노래한 음반에는 오래 전부터 어느 정도 융통성이 부여되어 왔다. 소니뮤직은 진작부터 영어로 노래한 일본 가수들의 음반을 출시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구보타 도시(久保田利伸)다. 일본 본토에 리듬 앤드 블루스(R&B) 열풍이 불어닥치기 훨씬 전부터 외로운 길을 걸어왔던 그가 미국시장에 진출해 발표한 앨범들이 다시 한국에서 발매된 것이다. SM 역시 재즈 보컬에 근거한 소울 창법을 선보이는 여성 싱어 미미의 앨범을 두 장 연거푸 선보인 바 있다.
‘일본어 가사’ 아직 시기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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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386세대는 튜브나 안젠치다이(安全地帶)의 음악을 담은 카세트테이프를 끼고 다닌 기억을 가지고 있다. 20대 후반이라면 엑스 저팬으로 대변되는 일본 록그룹의 사운드에 푹 빠져 지낸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지난해 여름에는 워너뮤직이 엑스 저팬의 3집 앨범 ‘아트 오브 라이프’(Art Of Life)를 정식 라이선스 음반으로 국내에 발매해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보컬보다는 연주 쪽에 비중을 둔 29분짜리 대작으로 일본 현지에서는 지난 93년에 이미 발매되었던 음반이다. 그 몇 개월 전에는 그들의 주요 히트곡을 피아노로 연주한 ‘엑스 저팬 온 피아노’(X-Japan On Piano) 앨범도 발매되었다. 또 올 봄에는 엑스 저팬 전 멤버인 요시키(YOSHIKI)의 피아노 연주가 압권인 오케스트라 협연 앨범 ‘Eternal Melody’가 출시되었다.
반면 EMI는 일본 팝계의 슈퍼스타이자 소외된 장르 R&B를 주류로 편입시킨 주역 우타다 히카루(宇多田ヒカル)를 휘하에 두고 있으면서도 ‘언어의 벽’에 부딪혀 앨범 한 장 출시할 길이 없었다. 결국 EMI는 히든카드였던 ‘드림스 컴 트루’(Dreams Come True)라는 걸출한 혼성 팝 트리오를 꺼내놓았다. 이들이 발표했던 두 장의 영어 앨범 ‘싱 오어 다이’(Sing Or Die)와 ‘더 몬스터’(The Monster)가 라이선스로 국내에 발매되었다.
하지만 막강한 자본과 배급력, 그리고 아티스트를 보유한 메이저 음반사들의 틈새를 공략하며 음반시장의 다양화, 다변화에 기여하고 있는 마이너 레이블 덕분에 일본 음악의 국내 진출은 서서히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이들 레이블은 음악성 위주의 뮤지션들을 국내에 부지런히 소개하고 있다. 보사노바와 프렌치 팝, 그리고 일렉트로니카가 믹스된 쿨(cool)한 음악, 시부야계 스타일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팬태스틱 플라스틱 머신’의 앨범 ‘뷰티풀’(Beautiful)은 소수의 열성 팬에게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다. 포니 캐니언이 선보인 고급스러운 소프트 재즈 여성 뮤지션 보니 핑크의 베스트 앨범도 작년 여름 ‘제3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 조치’ 이후 얻은 수확 가운데 하나다. 이 밖에도 숱한 인디 계열 록밴드의 음악이 영어 버전으로 속속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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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생인 쿠라키 마이는 마이 케이(Mai K.)란 이름으로 지난 2000년 미국시장에 먼저 데뷔했다. 2년 선배인 우타다 히카루의 라이벌로 자주 거론되는 쿠라키 마이는 우타다에 비해 팝적인 느낌이 강조된 R&B 음악을 주무기로 한다. 이번에 국내 출시된 영어 앨범은 당시 미국시장용으로 제작한 앨범에 일본에서 히트한 몇 곡을 영어로 개사해 넣은 일종의 베스트 앨범이다.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인 마쓰모토 다카히로(松本孝弘)와 보컬리스트 이나바 코시(稻葉浩志)로 구성된 비즈는 70년대 하드록 사운드에 기초한 경쾌한 록 사운드를 주 무기로 한다. 이번 EP 앨범 역시 영어 가사로 부른 것치고는 본디 이들이 지닌 색깔이 크게 바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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