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테러리스트 카를로스 자칼은 1975년 비엔나 OPEC 본부를 기습 점거했다. 그는 일부러 시간을 끌다 TV 카메라맨이 도착한 다음에야 경제각료를 비롯한 인질들을 데리고 현장을 떠났다. 테러리스트들은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자신의 폭력행위가 가능한 한 널리 보도되길 원한다. 언론은 경쟁매체를 따돌리고 단독 보도를 하거나 적어도 ‘물먹지’ 않으려고 테러사건이 났다 하면 득달같이 달려간다.
테러리스트는 언론이란 공간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이룬다. 이렇듯 테러리즘과 언론은 싫든 좋든 공생관계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언론 보도가 없는 테러 효과는 피해 당사자와 그 주변에 그칠 뿐이다. 그러나 최근 파키스탄에서 일어난 다니엘 펄 기자 납치ㆍ피살 사건은 9ㆍ11 테러사건을 전환점으로 이런 공생관계가 바뀌고 있음을 시사한다.
언론은 테러사건을 보도함으로써 독자(또는 시청자)들을 모은다. 미국 ABC TV의 간판 프로그램 중 하나인 ‘나이트라인’은 1979∼80년 이란 테헤란에서 444일 동안 이어진 미국 대사관 점거 인질사건을 밤마다 보도함으로써 자리를 잡았다.
1986년 미국 NBC 방송의 심야뉴스(Nightly News)는 팔레스타인해방전선(PLF) 지도자 아부 아바스와 단독 인터뷰를 가진 바 있다. PLF는 1985년 이탈리아 유람선을 납치해 이스라엘에 갇힌 50명의 동료를 석방하라는 요구를 내세우며 한 미국인 관광객을 잔인하게 죽여 바다에 버렸고, 끝내 요구 조건을 관철시켜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런 전력을 가진 아바스를 인터뷰하자, 미국 내에선 “테러리스트의 목소리를 여과 없이 전한다”며 NBC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에 대해 NBC는 “시민들이 실상을 전해 듣고 그들 나름대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미국 언론들은 근래 들어 상업주의적 객관성보다 애국주의에 더 무게를 싣는 경향을 보인다. 중동사태 보도도 친(親)이스라엘 중심이다. 지난해 5월 팔레스타인 현지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의 한 측근은 “1999년 미국 CBS 방송의 ‘60분’에 출연했다가 교묘한 편집 태도에 크게 실망한 아라파트 수반은 미국 언론 인터뷰라면 손을 내젓는다”고 귀띔했다. 9ㆍ11 테러사건 뒤 미국 언론의 보도 성향을 보면 객관성을 지키려는 태도는 말끔히 사라졌다. 오사마 빈 라덴의 녹화 테이프를 방영하는 문제를 두고도 말이 많았을 정도다. 9ㆍ11 테러로 숨진 소방관과 아프간에서 숨진 CIA 요원을 ‘영웅’으로 만들기에 바빴고, 미군 오폭으로 숨진 아프간 민간인들에 대한 보도는 뒷전으로 밀리거나 축소됐다.
“테러리스트들을 국제법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네이션’ ‘디센트’ ‘빌리지 보이스’ 같은 비주류 언론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월 스트리트 저널’ 기자 다니엘 펄이 취재원인 파키스탄 과격단체 요원들에게 납치돼 죽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글로벌리즘의 구호 아래 ‘자유시장경제 질서 옹호’를 금과옥조로 내세워 온 경제신문이다. 부시 행정부의 세계패권 전략에 박수 치는 이른바 매파(hawk) 칼럼니스트들이 포진한 매체다. 그런 신문의 기자 펄은 잘못된 시각에 따라 잘못된 장소에 가서 살해된 것일까.
펄의 납치범들은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에 갇힌 탈레반 및 알 카에다 포로 석방을 요구하다 유대인인 펄이 미국 CIA나 이스라엘 모사드의 첩자일 것이라 주장하며 그를 죽였다. 필자는 펄의 납치사건을 듣는 순간 엘살바도르 군부독재와 농민군의 무장투쟁을 다룬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살바도르’를 떠올렸다. 이 영화엔 프리랜서 사진기자인 주인공이 농민군 비밀기지를 취재한 다음 미국 대사관 무관들에게 그 사진들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납치범들의 주장대로 펄을 정보원이라 믿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일부 미국 기자들이 취재 결과를 CIA에 건네줄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9ㆍ11 테러사건 뒤 파키스탄에선 탈레반 정권을 돕기 위해 수천명의 자원자들이 아프간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무샤라프 장군이 친미 쪽으로 파키스탄을 몰아가면서 과격 이슬람 단체 요원들을 잡아들였다. 많은 과격파 행동대원이 지하로 숨었다. 필자가 지난 1월 카슈미르에 갔을 때도 이슬람 단체 사무실들은 모두 문을 닫고 있었다. 그런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펄 사건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기본적으로 파키스탄 민중은 반미감정이 강하다. 미국 기자들에 대한 눈길도 고울 리 없다. 9ㆍ11 테러 전만 해도 서방 기자들을 만나 밤늦도록 인터뷰에 응했던 이슬람권 행동주의자들은 아예 그들을 피한다.
이렇듯 9ㆍ11 테러(특히 미국의 아프간 공습과 뒤이은 탈레반 정권 붕괴)를 고비로 이슬람권에서 미국 기자들의 취재환경은 나빠졌다. 테러사건 후 미국 언론은 애국주의 물결을 부추겼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기본적으로 미국 언론은 제3세계 분쟁을 보는 시각에서 자국의 국익에 철저한 편이다.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판정 시비를 보도하는 그들의 팔이 안으로 굽어도 너무 굽는 태도를 우리는 이미 보았다. 스포츠마저 그러니 외교ㆍ군사 부문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9ㆍ11 테러 뒤 미국 기자들의 해외취재 여건이 악화된 측면엔 이런 애국주의적 보도 경향의 책임이 크다. 이런 경향은 비교적 객관성을 유지하려 애쓰는 유럽 언론들과도 다르다.
미국 기자들의 ‘아메리카 중심 세계관’은 지난 1월 아프간 취재 때도 확인할 수 있었다. 펄 기자와 같은 ‘월 스트리트 저널’ 소속 여기자를 당시 아프간 임시정부 외무부 청사에서 만났다. 그녀는 탈레반 세력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칸다하르를 막 다녀오는 길이라 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미국이 왜 9ㆍ11 테러를 당했다고 생각하느냐. 아랍권에서 반미감정이 높은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생글생글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그 기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그런 미치광이 같은 주제를 놓고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필자가 그 기자에게 비사교적(?)인 질문을 던진 걸까.
CNN의 피터 아넷은 1991년 걸프전 당시 바그다드에서 미군 공습을 생중계해 유명해진 기자다. CNN에서 나와 현재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는 그는 당시 필자와 같은 호텔에 묵고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함께 카불 북부지역의 지뢰밭 취재를 다녀온 날 저녁, 그에게 슬며시 미국의 ‘아프간 책임론’을 꺼내봤다. “1980년대 미국 CIA가 아프간 내전에 개입했다 냉전이 막을 내린 뒤 아프간을 내팽개친 탓에 오늘과 같은 사태가 났다고 보지 않는가”란 물음이었다. 노련한 아넷은 필자의 의중을 알아채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아넷 옆에 있던 30대 중반의 한 미국 기자가 내뱉듯 말했다. “나는 미국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불행에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귀엔 “미국 언론이여, 편견을 버리라”는 제3세계의 외침이 들리지 않을 것이다.
테러리스트는 언론이란 공간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이룬다. 이렇듯 테러리즘과 언론은 싫든 좋든 공생관계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언론 보도가 없는 테러 효과는 피해 당사자와 그 주변에 그칠 뿐이다. 그러나 최근 파키스탄에서 일어난 다니엘 펄 기자 납치ㆍ피살 사건은 9ㆍ11 테러사건을 전환점으로 이런 공생관계가 바뀌고 있음을 시사한다.
언론은 테러사건을 보도함으로써 독자(또는 시청자)들을 모은다. 미국 ABC TV의 간판 프로그램 중 하나인 ‘나이트라인’은 1979∼80년 이란 테헤란에서 444일 동안 이어진 미국 대사관 점거 인질사건을 밤마다 보도함으로써 자리를 잡았다.
1986년 미국 NBC 방송의 심야뉴스(Nightly News)는 팔레스타인해방전선(PLF) 지도자 아부 아바스와 단독 인터뷰를 가진 바 있다. PLF는 1985년 이탈리아 유람선을 납치해 이스라엘에 갇힌 50명의 동료를 석방하라는 요구를 내세우며 한 미국인 관광객을 잔인하게 죽여 바다에 버렸고, 끝내 요구 조건을 관철시켜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런 전력을 가진 아바스를 인터뷰하자, 미국 내에선 “테러리스트의 목소리를 여과 없이 전한다”며 NBC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에 대해 NBC는 “시민들이 실상을 전해 듣고 그들 나름대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미국 언론들은 근래 들어 상업주의적 객관성보다 애국주의에 더 무게를 싣는 경향을 보인다. 중동사태 보도도 친(親)이스라엘 중심이다. 지난해 5월 팔레스타인 현지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의 한 측근은 “1999년 미국 CBS 방송의 ‘60분’에 출연했다가 교묘한 편집 태도에 크게 실망한 아라파트 수반은 미국 언론 인터뷰라면 손을 내젓는다”고 귀띔했다. 9ㆍ11 테러사건 뒤 미국 언론의 보도 성향을 보면 객관성을 지키려는 태도는 말끔히 사라졌다. 오사마 빈 라덴의 녹화 테이프를 방영하는 문제를 두고도 말이 많았을 정도다. 9ㆍ11 테러로 숨진 소방관과 아프간에서 숨진 CIA 요원을 ‘영웅’으로 만들기에 바빴고, 미군 오폭으로 숨진 아프간 민간인들에 대한 보도는 뒷전으로 밀리거나 축소됐다.
“테러리스트들을 국제법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네이션’ ‘디센트’ ‘빌리지 보이스’ 같은 비주류 언론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월 스트리트 저널’ 기자 다니엘 펄이 취재원인 파키스탄 과격단체 요원들에게 납치돼 죽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글로벌리즘의 구호 아래 ‘자유시장경제 질서 옹호’를 금과옥조로 내세워 온 경제신문이다. 부시 행정부의 세계패권 전략에 박수 치는 이른바 매파(hawk) 칼럼니스트들이 포진한 매체다. 그런 신문의 기자 펄은 잘못된 시각에 따라 잘못된 장소에 가서 살해된 것일까.
펄의 납치범들은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에 갇힌 탈레반 및 알 카에다 포로 석방을 요구하다 유대인인 펄이 미국 CIA나 이스라엘 모사드의 첩자일 것이라 주장하며 그를 죽였다. 필자는 펄의 납치사건을 듣는 순간 엘살바도르 군부독재와 농민군의 무장투쟁을 다룬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살바도르’를 떠올렸다. 이 영화엔 프리랜서 사진기자인 주인공이 농민군 비밀기지를 취재한 다음 미국 대사관 무관들에게 그 사진들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납치범들의 주장대로 펄을 정보원이라 믿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일부 미국 기자들이 취재 결과를 CIA에 건네줄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9ㆍ11 테러사건 뒤 파키스탄에선 탈레반 정권을 돕기 위해 수천명의 자원자들이 아프간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무샤라프 장군이 친미 쪽으로 파키스탄을 몰아가면서 과격 이슬람 단체 요원들을 잡아들였다. 많은 과격파 행동대원이 지하로 숨었다. 필자가 지난 1월 카슈미르에 갔을 때도 이슬람 단체 사무실들은 모두 문을 닫고 있었다. 그런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펄 사건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기본적으로 파키스탄 민중은 반미감정이 강하다. 미국 기자들에 대한 눈길도 고울 리 없다. 9ㆍ11 테러 전만 해도 서방 기자들을 만나 밤늦도록 인터뷰에 응했던 이슬람권 행동주의자들은 아예 그들을 피한다.
이렇듯 9ㆍ11 테러(특히 미국의 아프간 공습과 뒤이은 탈레반 정권 붕괴)를 고비로 이슬람권에서 미국 기자들의 취재환경은 나빠졌다. 테러사건 후 미국 언론은 애국주의 물결을 부추겼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기본적으로 미국 언론은 제3세계 분쟁을 보는 시각에서 자국의 국익에 철저한 편이다.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판정 시비를 보도하는 그들의 팔이 안으로 굽어도 너무 굽는 태도를 우리는 이미 보았다. 스포츠마저 그러니 외교ㆍ군사 부문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9ㆍ11 테러 뒤 미국 기자들의 해외취재 여건이 악화된 측면엔 이런 애국주의적 보도 경향의 책임이 크다. 이런 경향은 비교적 객관성을 유지하려 애쓰는 유럽 언론들과도 다르다.
미국 기자들의 ‘아메리카 중심 세계관’은 지난 1월 아프간 취재 때도 확인할 수 있었다. 펄 기자와 같은 ‘월 스트리트 저널’ 소속 여기자를 당시 아프간 임시정부 외무부 청사에서 만났다. 그녀는 탈레반 세력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칸다하르를 막 다녀오는 길이라 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미국이 왜 9ㆍ11 테러를 당했다고 생각하느냐. 아랍권에서 반미감정이 높은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생글생글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그 기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그런 미치광이 같은 주제를 놓고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필자가 그 기자에게 비사교적(?)인 질문을 던진 걸까.
CNN의 피터 아넷은 1991년 걸프전 당시 바그다드에서 미군 공습을 생중계해 유명해진 기자다. CNN에서 나와 현재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는 그는 당시 필자와 같은 호텔에 묵고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함께 카불 북부지역의 지뢰밭 취재를 다녀온 날 저녁, 그에게 슬며시 미국의 ‘아프간 책임론’을 꺼내봤다. “1980년대 미국 CIA가 아프간 내전에 개입했다 냉전이 막을 내린 뒤 아프간을 내팽개친 탓에 오늘과 같은 사태가 났다고 보지 않는가”란 물음이었다. 노련한 아넷은 필자의 의중을 알아채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아넷 옆에 있던 30대 중반의 한 미국 기자가 내뱉듯 말했다. “나는 미국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불행에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귀엔 “미국 언론이여, 편견을 버리라”는 제3세계의 외침이 들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