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아줌마’가 끝이 난 모양이다. 비록 가공의 드라마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대학교수의 한 사람으로서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동안 ‘대학교수와 거지의 공통점’, ‘강남(江南)의 부인들이 대학교수를 좋아하는 이유’ 등 교수를 풍자한 우스갯소리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처럼 그렇게 대학교수를 직설적으로 힐난하고 ‘원색적으로’ 야유하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다. 한마디로 유감스럽고 또 섭섭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다. 이 드라마가 문제가 된다는 것 자체가 그래도 아직은 대학교수에 대한 도덕적 기대가 높다는 것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황송할 뿐이다.
흔히, 살기가 힘들어지면 견디다 못해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증적으로 조사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그것보다는 기대는 높은데 현실이 따라가지 못할 때, 그 좌절감과 배신감 때문에 사회변혁의 씨앗이 잉태된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을 지닌다. 그렇지 않아도 ‘교육붕괴’로 민심이 흉흉한 이때, ‘아줌마’들의 기대와 좌절이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악화되기 전에, 필자를 포함한 이 땅의 모든 ‘장진구’들은 대오각성해야 할 것이다.
답답한 심사를 가누지 못해 논어(論語)를 펼쳐 보니 이런 구절이 줄줄이 나온다. 마음이 가라앉기는커녕 더 싱숭생숭해지기만 했다. 어떤 사람이 선비인가. 눈앞의 이익을 보고도 정의를 생각하고, 도리에 벗어난 일을 하지 않아야 진정한 선비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물질적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 논어는 이 전제 위에서 실천을 강조한다. 무릇 군자라면, 옳은 것을 알고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한 일은 없는지 항상 걱정해야 한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설사 어려움이 많고 얻는 것이 적더라도 기어코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천이 없으면 지혜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공자는 뼈아픈 말을 남겼다. 옛날 사람들은 자기완성을 위해 학문을 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출세와 명예를 위해 학문을 한다는 것이다.
할 말이 없다. 어쩌면 우리 현실을 이다지도 정확히 읽어 낼 수 있는가. 군자는 고사하고 선비도 드문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학회 일 때문에, 아니면 이런 저런 모임을 위해 어른이 될 만한 분을 찾다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사람이 없을 수 있는가. ‘풍요 속의 빈곤’이라더니, 우리 지식사회의 단면을 두고 하는 말 아닌가.
아직은 우리 사회에 윗세대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 웬만하면 나이든 사람을 모시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 ‘웬만한’ 조건을 갖춘 원로가 너무나 드물다. 하찮고 하찮은 것에 욕심을 부리다가 명예를 더럽힌 사람이 태반이다. 몇 푼 안 되는 돈에 이름을 팔고, 그것도 권력이랍시고 보직 자리에 연연하며 명함 돌리는 일에 신바람을 내는 교수가 부지기수다. 중간만 해도 모셔 올 판인데, 그 중간도 많지 않은 것이다.
도덕적 기대 아직 황송… 이 땅의 ‘장진구’ 대오각성해야
대학의 얼굴은 역시 총장이다. 너나할것없이 총장을 하고 싶어 안달이다. 그러나 총장다운 총장은 좀체 보이지 않는다. 존경받는 대학총장은 더구나 드물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 주제에 아집과 독선으로 권위주의적 전횡(專橫)을 일삼는다. 그러니 대학 구성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분수를 알고 조심스럽게 처신하면 좋으련만, 겉으로는 공의(公義)를 내세우나 실제로는 쩨쩨한 사욕을 못 이겨 정도를 일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대학 안에 분규가 생기는 근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욕심의 끝은 무참하기만 하다. 수모를 당하며 급기야 자리에서 쫓겨나고 마는 총장이 한둘이 아니다. 교육이 제대로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시대에 ‘나물 먹고 물 마시고’(飯疎食飮水)의 경지까지 기대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래도 학문을 업으로 삼고 학생 가르치는 것을 천직으로 여긴다면, 최소한의 부끄러움은 알아야 할 것이다. 소소한 욕심에 이름을 더럽히며 대학교수 행세를 하니, ‘덕망가(德望家)로 자처하나 대개가 사이비 인물들’이라는 공자, 아니 아줌마들의 질타에 얼굴을 못 드는 것이 아닌가.
흔히, 살기가 힘들어지면 견디다 못해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증적으로 조사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그것보다는 기대는 높은데 현실이 따라가지 못할 때, 그 좌절감과 배신감 때문에 사회변혁의 씨앗이 잉태된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을 지닌다. 그렇지 않아도 ‘교육붕괴’로 민심이 흉흉한 이때, ‘아줌마’들의 기대와 좌절이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악화되기 전에, 필자를 포함한 이 땅의 모든 ‘장진구’들은 대오각성해야 할 것이다.
답답한 심사를 가누지 못해 논어(論語)를 펼쳐 보니 이런 구절이 줄줄이 나온다. 마음이 가라앉기는커녕 더 싱숭생숭해지기만 했다. 어떤 사람이 선비인가. 눈앞의 이익을 보고도 정의를 생각하고, 도리에 벗어난 일을 하지 않아야 진정한 선비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물질적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 논어는 이 전제 위에서 실천을 강조한다. 무릇 군자라면, 옳은 것을 알고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한 일은 없는지 항상 걱정해야 한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설사 어려움이 많고 얻는 것이 적더라도 기어코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천이 없으면 지혜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공자는 뼈아픈 말을 남겼다. 옛날 사람들은 자기완성을 위해 학문을 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출세와 명예를 위해 학문을 한다는 것이다.
할 말이 없다. 어쩌면 우리 현실을 이다지도 정확히 읽어 낼 수 있는가. 군자는 고사하고 선비도 드문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학회 일 때문에, 아니면 이런 저런 모임을 위해 어른이 될 만한 분을 찾다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사람이 없을 수 있는가. ‘풍요 속의 빈곤’이라더니, 우리 지식사회의 단면을 두고 하는 말 아닌가.
아직은 우리 사회에 윗세대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 웬만하면 나이든 사람을 모시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 ‘웬만한’ 조건을 갖춘 원로가 너무나 드물다. 하찮고 하찮은 것에 욕심을 부리다가 명예를 더럽힌 사람이 태반이다. 몇 푼 안 되는 돈에 이름을 팔고, 그것도 권력이랍시고 보직 자리에 연연하며 명함 돌리는 일에 신바람을 내는 교수가 부지기수다. 중간만 해도 모셔 올 판인데, 그 중간도 많지 않은 것이다.
도덕적 기대 아직 황송… 이 땅의 ‘장진구’ 대오각성해야
대학의 얼굴은 역시 총장이다. 너나할것없이 총장을 하고 싶어 안달이다. 그러나 총장다운 총장은 좀체 보이지 않는다. 존경받는 대학총장은 더구나 드물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 주제에 아집과 독선으로 권위주의적 전횡(專橫)을 일삼는다. 그러니 대학 구성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분수를 알고 조심스럽게 처신하면 좋으련만, 겉으로는 공의(公義)를 내세우나 실제로는 쩨쩨한 사욕을 못 이겨 정도를 일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대학 안에 분규가 생기는 근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욕심의 끝은 무참하기만 하다. 수모를 당하며 급기야 자리에서 쫓겨나고 마는 총장이 한둘이 아니다. 교육이 제대로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시대에 ‘나물 먹고 물 마시고’(飯疎食飮水)의 경지까지 기대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래도 학문을 업으로 삼고 학생 가르치는 것을 천직으로 여긴다면, 최소한의 부끄러움은 알아야 할 것이다. 소소한 욕심에 이름을 더럽히며 대학교수 행세를 하니, ‘덕망가(德望家)로 자처하나 대개가 사이비 인물들’이라는 공자, 아니 아줌마들의 질타에 얼굴을 못 드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