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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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과 토막살인

  • 입력2005-06-08 11: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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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절과 토막살인
    양심이 조심(操心)으로 대체되는 추세를 막을 수는 없다. 기실, 역사가 수없이 증거하듯 양심이라는 사밀하고 애매한 잣대가 특권화해서는 합리적이며 성숙한 사회운용의 원리가 자생하기 어렵다. 조심이 그저 개인의 기지나 책략이 아니라, 공정하고 자유로운 토론문화의 결실이라면, 양심의 형이상학보다는 조심의 현상학을 따르는 것이 바람직한 차악(次惡)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조심의 정치학이 양심의 심리학을 성공적으로 대체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대화와 토론의 문화가 널리 활성화되어 이를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정실주의와 패거리의식이 만연한 상황 속에서의 조심이란 필경 저속한 술수로 타락하고 만다.

    끝없이 적발되어 스캔들이 되곤 하는 표절시비를 자세히 살피면, 이 문제가 결코 양심과 도덕으로 처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가령 송자 전 교육부장관이 알리바이로 삼은 ‘관행’, 바로 이 관행이 만든 음지가 구조화되어 있고, 우리 정신문화의 수입상적 구조가 이와 결탁해 있다면, 개인의 양심과 상관없이 정신의 기생충들은 끝없이 부활할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양심을 믿을 수 없는 세상`-“그러나 우리들은 이렇게 부패한 시대에 자신을 고백하는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몽테뉴)-에 양심을 대체할 조심도, 그 조심의 구조도 이미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데 있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 사회에서 번성한 조심의 네트워크는 대화와 비판이 아니라 이미 인맥과 권력망에 의해서 포획되어 버린 것이다.

    ‘표절문제’ 하면 금방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있다. 2년 전 쯤 미국 동부의 권위지 ‘보스턴 글러브’의 인기 칼럼니스트 마이크 바니클(백인 남성)이 남의 책에 실린 경구를 출처 없이 옮겨 쓴 일로 2개월 무급정직의 징계를 당했는데, 이것은 얼마 전 동지(同紙)의 패트리샤 스미스(흑인 여성)가 기사 속에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킨 짓으로 즉각 해고를 당한 일과 비교되어 사계에 파문이 일었다. 당시 논의의 초점은 인종-성차별의 의혹을 샀던 처벌의 공정성 문제였다. 나는 그 기사를 대하면서 공정성이나 차별의 문제 이전에, 대학이 아닌 저널리즘의 세계에서도 글쓰기의 지적 성실성(intellectual integrity)에 대한 공적인 규제가 그토록 엄혹하고 철저하다는 사실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구미 대학에선 표절전담위까지 운영 엄중한 처벌

    구미의 대학에서는 대개 표절문제를 전담하는 위원회를 운영하면서 아카데미아의 구성원들에게 그 지적 성실성을 철저하게 요구하며, 위반시 엄중한 처벌을 부과해 재발방지에 주력한다고 한다. 기실, 학인(學人)의 경우 표절이란 그 학문활동의 본질을 훼파(毁破)하고 그 존립근거를 뒤집는 짓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극형감이다. 하이데거 같은 나치도 그 학문성으로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고, 이광수 같은 친일도 그가 개척한 문학성을 어쩌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표절이라면, 단 한 문장이라도 학인을 사장(死藏)시키기에 족하며, 또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그는 이미 ‘학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문을 포함한 정신문화적 활동은 대체로 성실한 ‘모방’(배움)과 비판, 그리고 이를 통한 창의적 계승의 경로를 밟는다. 이 지난한 비판적 계승의 행로에서 표절이란, 비유하자면 자신의 부모를 일없이 토막살인한 경우와 다름없다. 옛말에 ‘남의 학설을 훔치어 자신의 것으로 만듦’을 ‘초설’(剿說)이라는데, 이는 바로 ‘토막내어 죽인다’는 뜻이다. 법고(法古)의 닮음을 제대로 거친 뒤 창신(創新)의 다름을 열어가야 할 학문의 세계에서, 그 법을 임의로 토막내어 자신의 새로움(新)인 듯 도용하는 짓이 토막살인이 아니고 무엇이랴. 표절! 무릇 학인을 자처하는 자, 꿈도 꾸지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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