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김수영 시인의 시 ‘풀’을 ‘씨앗 글’로 해서 이제하 박형준 김상미 김정란 등 100여명의 작가들이 참여해 시의 꽃밭을 만드는 창작 릴레이가 지난 4월부터 인터넷 공간에서 계속되고 있다(언어의 새벽 http://eos.met.go.kr). 12월2일 현재 2만4000여명이 사이트를 방문해 571명이 글을 남겼다. 방문자의 넘치는 호기심에 비하면 실제 창작 참여는 저조한 편. 그러나 ‘2000 새로운 예술의 해’를 맞아 문학분과위원회(위원장 김상수)가 마련한 이 행사는 일반인들에게 최초로 ‘하이퍼텍스트와 문학’이라는 새로운 예술을 체험케 했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홈페이지에서 씨앗 글을 클릭하면 ‘풀이 눕는다’는 구절이 나오고 ‘풀이’ 와 ‘눕는다’는 각각 하이퍼링크돼 있다. ‘풀이’를 선택한 사람은 이제하, 이문재, 오수영, 오정희씨 등이 남긴 구절을 읽게 되고, 그 중 마음에 드는 구절을 클릭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똑같이 김수영씨의 ‘풀’로 출발했지만 독자에 따라 시를 읽는 방식은 수백 가지가 넘고, 스스로 작가가 되어 시작(詩作)을 이어간다면 작품 수는 무한대가 된다. 독자는 읽는 방식에 따라 매번 다른 시를 읽는 셈이다.
이 이벤트를 총지휘한 정과리 교수(연세대·국문)는 “지금까지 개개의 작품을 통해 추구돼 오던 문학을 의도적으로 열린 구조, 빈 자리를 갖는 구조에 놓을 경우 문학작품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실험해 보자는 것이다. 그럴 경우 무엇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는 두고봐야 할 일”이라며 이것은 하이퍼텍스트문학 그 자체라기보다 일종의 ‘실험’이라고 했다.
컴퓨터 없이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 요즘 ‘하이퍼텍스트’는 낯선 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인터넷의 문서들은 HTML(Hypertext Markup Language)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고, 이렇게 만들어진 문서와 문서가 연결(링크)되는 것이 바로 하이퍼텍스트다. 이런 하이퍼텍스트 방식을 활용해 만든 문학작품을 ‘하이퍼텍스트문학’(이하 하이퍼문학)이라 한다.
하이퍼문학의 두드러진 특징은 일정한 순서가 없다는 것. 국내 유일의 하이퍼 소설 작가인 류현주 박사(현재 영문으로 쓴 ‘용의 궁전’을 우리말로 번역중이다·경북대 강사)는 인쇄문학과 하이퍼문학을 텔레비전에 비유해 리모트 컨트롤로 여러 개 채널을 선택적으로 즐기는 것이 하이퍼문학이라면, 인쇄문학은 한 채널에 고정시키고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것이라고 했다.
‘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그리고 책의 종말’의 저자인 배식한씨는 “전통적인 이야기의 선형적 구조를 벗어나려는 노력은 컴퓨터가 출연하기 전에도 많은 소설가들에 의해 시도됐다”면서 18세기에 쓰인 로렌스 스턴의 소설 ‘트리스트람 샌디’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를 예로 들었다. 순서에 관계 없이 읽을 수 있는 이런 소설들은 80년대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으로 훨씬 수월하게 작성되면서 하이퍼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하이퍼텍스트라는 개념은 이미 1945년 바네바 부시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의 목적은 창작이 아니라 효율적인 정보관리였지만, 어쨌든 연상작용에 의한 자료정리법이 하이퍼텍스트 개념의 기원이 됐다. 부시의 아이디어를 최초로 소설에 접목한 사람은 마이클 조이스였다. 현재 하이퍼문학의 대부로 불리는 조이스는 1987년 ‘오후, 이야기’(539개의 텍스트, 951개의 링크)를 발표했다. 그 후 10년 뒤 마크 아메리카의 ‘그래마트론’이 발표됐다. ‘그래마트론’은 1100개 이상의 텍스트와 2000개의 링크로 이루어진 방대한 하이퍼소설로 텍스트와 함께 40분이 넘는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과 동영상 및 이미지를 함께 제공해 독서의 개념 자체를 바꿔놓았다.
‘뉴욕 타임스’가 이 작품을 ‘문학계의 하이퍼텍스트 수소폭탄’이라며 격찬할 무렵 우리나라에도 하이퍼텍스트문학이라는 말이 유입됐다. 97년 문예지들이 약속이나 한 듯 사이버 문학, 21세기 문학 특집을 마련하면서 약방의 감초처럼 ‘하이퍼문학’을 끼워넣었다.
그러나 컴퓨터문학, 통신문학, 인터넷문학, 사이버문학, 디지털문학 등의 용어가 정확한 개념 구분 없이 혼란스럽게 사용되는 상황에서 하이퍼문학의 등장은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만 가져왔다. 더욱이 ‘하이퍼텍스트로 구현된 문학’을 한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하이퍼문학의 장단점을 비교하고 폐해를 우려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아직까지 한글로 쓰인 본격 하이퍼문학작품이 없다).
그나마 97년 발표된 신예 작가 김설의 장편소설 ‘게임오버-수로 바이러스’가 가장 하이퍼텍스트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줄거리 전개상 하이퍼텍스트라는 형식만 빌려왔을 뿐 이 소설은 전통적인 종이책이다. 소설에서 하이퍼텍스트적이라고 하는 부분은 사건이 일단락됐다가도 전자오락처럼 ‘Game Over’라는 표현이 나온 뒤 전혀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 수로가 지하철 화장실에서 낯선 여인의 심부름(마약 전달)을 거절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상황과 ‘Game Over’된 후 수로가 얼떨결에 그 심부름을 하게 되는 상황은 이후 줄거리가 완전히 다르다. 아쉬우나마 국내에서 경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하이퍼텍스트적’ 소설이다.
문학과 하이퍼텍스트의 결합을 시도한 또다른 실험으로 인터넷 혹은 통신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어쓰기’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류현주 박사는 하이퍼문학 작품을 읽지 않고 ‘떠도는 말들’로 하이퍼문학을 평가하는 것은 새로운 왜곡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올해 문화관광부 ‘새로운 예술의 해’ 문학분과 프로젝트(김수영 시 ‘풀’ 이어쓰기)는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지만,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현재 인터넷 상에서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하이퍼텍스트 글쓰기 시도는 시나 소설의 이어쓰기다. 그러나 이어쓰기, 즉 링크만 만든다고 모두 하이퍼문학이 되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이퍼문학에는 작가가 존재할 수 없다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분명 하이퍼 문학에는 작품이 있고 작가도 있다”고 설명했다.
12월1일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자료실에서는 ‘하이퍼텍스트 문학-인문학의 위기 또는 기회미학’이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다. 발제자로 나선 류현주 박사는 “미국에서는 미래의 문학이라고 해서 하버드 MIT 등 명문대학을 포함해 이미 50개 이상의 대학이 하이퍼문학 강좌를 열고 있다”면서 “유럽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전세계가 이 새로운 문학에 주목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만 창작이나 연구활동이 전무하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질문은 “하이퍼문학이 기존 소설의 내러티브를 가질 수 있느냐” “하이퍼소설 작가는 어떻게 창작을 하느냐” “하이퍼문학이 기술적인 특징 외에 기존 문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이냐” 등 알 듯 모를 듯한 하이퍼문학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으로 모아졌다.
외국의 하이퍼문학을 경험한 사람도 별로 없고 우리말로 된 하이퍼소설 한 권 없는 현실에서 하이퍼문학을 통해 우리 문학의 미래를 조망하고 디지털문학을 말하는 것만큼 공허한 일도 없다. 당장 작가들이 할 일은 하이퍼소설을 발표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접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실체도 없는 하이퍼문학의 미래를 어떻게 논할 수 있으랴.
이 홈페이지에서 씨앗 글을 클릭하면 ‘풀이 눕는다’는 구절이 나오고 ‘풀이’ 와 ‘눕는다’는 각각 하이퍼링크돼 있다. ‘풀이’를 선택한 사람은 이제하, 이문재, 오수영, 오정희씨 등이 남긴 구절을 읽게 되고, 그 중 마음에 드는 구절을 클릭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똑같이 김수영씨의 ‘풀’로 출발했지만 독자에 따라 시를 읽는 방식은 수백 가지가 넘고, 스스로 작가가 되어 시작(詩作)을 이어간다면 작품 수는 무한대가 된다. 독자는 읽는 방식에 따라 매번 다른 시를 읽는 셈이다.
이 이벤트를 총지휘한 정과리 교수(연세대·국문)는 “지금까지 개개의 작품을 통해 추구돼 오던 문학을 의도적으로 열린 구조, 빈 자리를 갖는 구조에 놓을 경우 문학작품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실험해 보자는 것이다. 그럴 경우 무엇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는 두고봐야 할 일”이라며 이것은 하이퍼텍스트문학 그 자체라기보다 일종의 ‘실험’이라고 했다.
컴퓨터 없이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 요즘 ‘하이퍼텍스트’는 낯선 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인터넷의 문서들은 HTML(Hypertext Markup Language)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고, 이렇게 만들어진 문서와 문서가 연결(링크)되는 것이 바로 하이퍼텍스트다. 이런 하이퍼텍스트 방식을 활용해 만든 문학작품을 ‘하이퍼텍스트문학’(이하 하이퍼문학)이라 한다.
하이퍼문학의 두드러진 특징은 일정한 순서가 없다는 것. 국내 유일의 하이퍼 소설 작가인 류현주 박사(현재 영문으로 쓴 ‘용의 궁전’을 우리말로 번역중이다·경북대 강사)는 인쇄문학과 하이퍼문학을 텔레비전에 비유해 리모트 컨트롤로 여러 개 채널을 선택적으로 즐기는 것이 하이퍼문학이라면, 인쇄문학은 한 채널에 고정시키고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것이라고 했다.
‘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그리고 책의 종말’의 저자인 배식한씨는 “전통적인 이야기의 선형적 구조를 벗어나려는 노력은 컴퓨터가 출연하기 전에도 많은 소설가들에 의해 시도됐다”면서 18세기에 쓰인 로렌스 스턴의 소설 ‘트리스트람 샌디’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를 예로 들었다. 순서에 관계 없이 읽을 수 있는 이런 소설들은 80년대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으로 훨씬 수월하게 작성되면서 하이퍼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하이퍼텍스트라는 개념은 이미 1945년 바네바 부시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의 목적은 창작이 아니라 효율적인 정보관리였지만, 어쨌든 연상작용에 의한 자료정리법이 하이퍼텍스트 개념의 기원이 됐다. 부시의 아이디어를 최초로 소설에 접목한 사람은 마이클 조이스였다. 현재 하이퍼문학의 대부로 불리는 조이스는 1987년 ‘오후, 이야기’(539개의 텍스트, 951개의 링크)를 발표했다. 그 후 10년 뒤 마크 아메리카의 ‘그래마트론’이 발표됐다. ‘그래마트론’은 1100개 이상의 텍스트와 2000개의 링크로 이루어진 방대한 하이퍼소설로 텍스트와 함께 40분이 넘는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과 동영상 및 이미지를 함께 제공해 독서의 개념 자체를 바꿔놓았다.
‘뉴욕 타임스’가 이 작품을 ‘문학계의 하이퍼텍스트 수소폭탄’이라며 격찬할 무렵 우리나라에도 하이퍼텍스트문학이라는 말이 유입됐다. 97년 문예지들이 약속이나 한 듯 사이버 문학, 21세기 문학 특집을 마련하면서 약방의 감초처럼 ‘하이퍼문학’을 끼워넣었다.
그러나 컴퓨터문학, 통신문학, 인터넷문학, 사이버문학, 디지털문학 등의 용어가 정확한 개념 구분 없이 혼란스럽게 사용되는 상황에서 하이퍼문학의 등장은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만 가져왔다. 더욱이 ‘하이퍼텍스트로 구현된 문학’을 한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하이퍼문학의 장단점을 비교하고 폐해를 우려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아직까지 한글로 쓰인 본격 하이퍼문학작품이 없다).
그나마 97년 발표된 신예 작가 김설의 장편소설 ‘게임오버-수로 바이러스’가 가장 하이퍼텍스트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줄거리 전개상 하이퍼텍스트라는 형식만 빌려왔을 뿐 이 소설은 전통적인 종이책이다. 소설에서 하이퍼텍스트적이라고 하는 부분은 사건이 일단락됐다가도 전자오락처럼 ‘Game Over’라는 표현이 나온 뒤 전혀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 수로가 지하철 화장실에서 낯선 여인의 심부름(마약 전달)을 거절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상황과 ‘Game Over’된 후 수로가 얼떨결에 그 심부름을 하게 되는 상황은 이후 줄거리가 완전히 다르다. 아쉬우나마 국내에서 경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하이퍼텍스트적’ 소설이다.
문학과 하이퍼텍스트의 결합을 시도한 또다른 실험으로 인터넷 혹은 통신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어쓰기’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류현주 박사는 하이퍼문학 작품을 읽지 않고 ‘떠도는 말들’로 하이퍼문학을 평가하는 것은 새로운 왜곡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올해 문화관광부 ‘새로운 예술의 해’ 문학분과 프로젝트(김수영 시 ‘풀’ 이어쓰기)는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지만,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현재 인터넷 상에서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하이퍼텍스트 글쓰기 시도는 시나 소설의 이어쓰기다. 그러나 이어쓰기, 즉 링크만 만든다고 모두 하이퍼문학이 되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이퍼문학에는 작가가 존재할 수 없다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분명 하이퍼 문학에는 작품이 있고 작가도 있다”고 설명했다.
12월1일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자료실에서는 ‘하이퍼텍스트 문학-인문학의 위기 또는 기회미학’이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다. 발제자로 나선 류현주 박사는 “미국에서는 미래의 문학이라고 해서 하버드 MIT 등 명문대학을 포함해 이미 50개 이상의 대학이 하이퍼문학 강좌를 열고 있다”면서 “유럽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전세계가 이 새로운 문학에 주목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만 창작이나 연구활동이 전무하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질문은 “하이퍼문학이 기존 소설의 내러티브를 가질 수 있느냐” “하이퍼소설 작가는 어떻게 창작을 하느냐” “하이퍼문학이 기술적인 특징 외에 기존 문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이냐” 등 알 듯 모를 듯한 하이퍼문학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으로 모아졌다.
외국의 하이퍼문학을 경험한 사람도 별로 없고 우리말로 된 하이퍼소설 한 권 없는 현실에서 하이퍼문학을 통해 우리 문학의 미래를 조망하고 디지털문학을 말하는 것만큼 공허한 일도 없다. 당장 작가들이 할 일은 하이퍼소설을 발표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접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실체도 없는 하이퍼문학의 미래를 어떻게 논할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