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29

2008.04.01

북한 先軍정치 일단 멈춤

지난해 말부터 권력지도 재편 움직임 … ‘먹는 문제’ 해결 위해 내각·노동당에 힘 실어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8-03-26 09: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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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先軍정치 일단 멈춤

    평안남도 대동군의 한 국영 유치원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북한 어린이들.

    맑음. 최저기온 2℃.

    3월18일 중국 베이징(北京)의 아침은 포근했다. 한낮엔 14℃까지 수은주가 치솟았다. 이런 날씨에 내복을 입은 사람을 서울에선 보기 어렵다. 날씨가 제법 풀렸음에도 해외에서 일하는 북한의 ‘일꾼’들은 아직도 내복을 챙겨 입는다.

    평양은 1990년대 베트남이 그랬듯 ‘변해야 산다’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 북한의 올해 모토는 ‘인민생활 우선주의’. 군사적으론 ‘강국’이 됐으니 ‘먹는 문제’를 해결해 강성대국을 완성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양을 둘러싼 공기는 여전히 차갑다.

    그래서일까. 북한 군부가 올해 들어 여러 형태로 견제받는 징후가 확인되고 있다. 그 대신 노동당과 내각의 목소리가 커졌다. ‘노동계급이 아닌 군대가 나라의 근간’이라던 선군정치(先軍政治)가 외견상 ‘조정되고’ 있는 셈이다. “군이 벌이던 일을 내각에 줘라”는 지시도 내려졌다고 한다.

    활동적으로 일하는 ‘일꾼’의 면면에도 변화의 기류가 감지된다. 내각과 당 소속 인사가 눈에 띄게 늘었다. 군과 공작부서의 위상이 조정되고 내각이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인민보안성(경찰 조직)의 파워도 과거보다 커졌다고 한다.



    김 위원장과 군부 조율로 숙정작업 등 권력 교통정리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명목상 장(長)으로 있는 국방위원회(이하 국방위)는 지난해 2월부터 조직 정비에 나섰다. 이후 국방위는 평양 권력지도의 핵으로 자리매김했다.

    대남(對南) 공작기관인 통일전선부, 그리고 그 산하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와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가 비리 혐의로 숙정(肅正)된 것도 교통정리의 일환. 숙정 과정에서 노동당 조직지도부와 보위부는 손과 발 노릇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에게 사정당한 부서 인사를 비롯해 사후 처리도 주목된다. 최근엔 숙정작업이 장성택 부장이 관장하는 당 행정부로 넘어갔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교통정리는 김 위원장과 군부의 조율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군부 역시 ‘경제실리주의’에 힘을 보태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북한 권부의 교통정리는 군부의 세(勢)가 약해졌다고 해석하기보다 평양의 권력집단이 새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보는 게 옳다는 지적이다.

    어쨌든 평양은 ‘먹는 문제’ 해결에 전력할 태세다. 따라서 국방위의 교통정리는 ‘선군정치 → 경제실리주의’라는 틀에서 부담이 되는 요소를 정리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내각의 권능이 강화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경제 문제에선 내각에 칼을 쥐어줌으로써 당·정·군 내부의 분파주의를 일소하고 ‘먹는 문제’ 해결로 내달리겠다는 뜻이다. 요컨대 지금 평양은 국방위, 당 조직, 내각의 세 틀로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다. 키워드는 누가 뭐래도 ‘경제실리주의’다. 다시 말해 군 → 당·내각으로 통치의 중심이 바뀌고 있는 게 아니라, 김 위원장이 ‘인민생활 우선주의’라는 목표를 내걸고 국가 조직을 가다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평양의 ‘오늘’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북-미 관계가 오랫동안 제자리를 맴돌았으며, 이명박 정부도 까칠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평양은 서울에 대한 기대를 사실상 접었다고 한다. 서울이 6·15 공동선언을 부정하면 앞으로 ‘남북관계는 없다’는 투다. 최근 남북간 서로 약간의 ‘입질’을 한 흔적이 발견된다. 그러나 평양은 이명박 정부가 쌀과 비료 지원을 무기로 ‘기선 제압’에 나서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평양은 이 같은 상황에선 서울과의 대화가 쉽지 않다고 여긴다. 인도주의적 지원(쌀과 비료 제공)에도 조건이 붙을 게 뻔하다고 본다. 그래서 서울이 대북지원에 나서지 않는다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한 뒤 중국·유럽 자본을 경제회생의 디딤돌로 삼겠다는 태도도 보이고 있다. 김 위원장이 3월4일 평양주재 중국대사관을 찾은 것은 지난 10년의 남북관계를 부정하는 듯한 이명박 정부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있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지난 정권과의 차별화를 특히 강조한다. ‘착한 행동’을 하면 ‘당근’을 주겠다는 서울의 태도를 놓고도 일부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시기적으로 중요한 인도주의적 지원 문제가 삐걱거리면서 남북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으리란 견해도 적지 않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박한식 미국 조지아대 석좌교수는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도적 지원 문제 삐걱 … 남북관계 파국 견해도

    “이명박 정부는 과거 정권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강할 겁니다. 그러나 대북정책을 잃어버린 10년으로 치부해선 안 됩니다. 냉전적 사고방식을 가진 인사들을 기용해 대북정책을 편다면 국내뿐 아니라 국제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남북관계에 커다란 물꼬가 터졌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려고 과거로 회귀할 생각이라면 상당한 저항과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북한 사람들과 좋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기용해 공식 트랙과 비공식 트랙을 동시에 사용해야 효과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대치 상태에 있는 공식 트랙을 보완해줄 장치가 필요한 것이죠.”

    3월 중순, 대동강변의 날씨는 쌀쌀했다. 4월 초까지도 내복을 입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지난해 수해로 예년보다 춘궁기도 빨라졌다. 식량난이 깊어지는 가운데 곧 있으면 파종기다. 비료의 경우 늦어도 4월 이전에 북한에 전달돼야 제때 농사에 활용될 수 있다. 평양은 경제실리주의를 모토로 국제사회와의 데탕트를 시도하고 있으나, 실용주의를 내건 서울이 거꾸로 평양의 자존심을 건드리면서 ‘대결’로 몰아가는 모습이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의 국지적 도발’을 비롯한 ‘4, 5월 남북관계 위기설’은 그래서 나온다. 북한 주민들의 몸과 마음은 언제쯤 따뜻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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