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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가 최초의 르네상스인이 된 까닭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프란체스코가 최초의 르네상스인이 된 까닭

프란체스코가 최초의 르네상스인이 된 까닭

초기 르네상스 화가 조토가 그린 ‘예수의 아침’.

기독교 2000년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닮은 성인은 누구일까. 그리스의 대문호 카잔차키스는 ‘위대한 성자 프란체스코’(애플북스)에서 예수를 가장 닮은 성인으로 프란체스코를 꼽았다.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중부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날을 유복하게 보낸 그는 한때 기사(騎士)를 꿈꾸었는데, 스무 살 무렵 전쟁포로가 되어 병을 앓은 뒤 돌연 그리스도의 기사로 다시 태어난다. 세속적인 재산을 버리고 ‘청빈’을 삶의 좌우명 삼아 제 한 몸을 이웃을 위해 헌신하기로 한다. 이는 왕자로 태어나 17세에 결혼해 아들을 두고 남부러울 것 없이 호강하던 삶을 박차고, 29세에 출가해 6년간의 고행 끝에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의 삶과 비슷하다.

수도사가 독점하던 예수의 생각을 대중화

프란체스코는 1209년 11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로마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만나 당시까지 이단으로 간주되던 순회 설교와 수도사의 청빈을 합법화했다. 이것이 바로 프란체스코파, 일명 ‘작은 형제의 모임’의 시작이었다. ‘아랫사람’들을 위해 살다 시각장애인이 되고 손과 발에 수종이 생기는 병에 걸렸지만 죽는 순간까지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옆구리와 양손·양발에 다섯 개의 상처, 즉 성흔(聖痕)을 입었다고 한다. 그 또한 성흔을 몸에 받은 걸로 유명한데, 이것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말한 바대로 프란체스코를 성인의 신화로 남게 한 결정적 근거였다.

하지만 카잔차키스는 성자 프란체스코에 대해 보통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위대함, 그것만을 부각하지 않는다. 걸인 레오와 함께하는 깨달음의 여정을 통해 나약한 인간의 방황을 의지로 극복하는 풍경을 20세기 부조리극처럼 보여준다. 마치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는 평범한 인간이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신성한 ‘고도(절대자이거나 절대 깨달음)’인 듯싶지만, 시시포스처럼 절망의 바위가 십자가에서 굴러떨어질지라도 다시 바위를 밀어올리는 게 ‘성인’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아마도 21세기의 프란체스코파인 마더 테레사가 그러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그런데 일본의 역사 에세이스트 시오노 나나미는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한길사)에서 프란체스코를 최초의 르네상스인이라고 주장한다. 흔히 최초의 르네상스인은 시인 단테나 화가 조토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이것은 예술 분야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우이고, 실상 예술이라는 꽃은 종교와 정치라는 토양 위에서 필 수밖에 없다고 한다. 따라서 프란체스코와 프리드리히 2세가 최초의 르네상스인이라고 한다.

우선 프란체스코는 태생부터가 다문화적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장사를 하러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에서 머물고 있을 때 알게 된 여자다. 그래서 프란체스코(프랑스 사람이라는 뜻)였다. 또한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성서 해석을 단테가 ‘신곡’을 당시 민중언어인 이탈리어로 썼던 것처럼 당시의 속어인 이탈리어로 이야기했다. 당시 서민들은 지식인의 언어이자 국제어이던 라틴어를 배울 기회도 능력도 없었다. 라틴어로 설교를 듣고 라틴어 기도문을 기계적으로 암송해야 했다. 설교나 기도문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프란체스코는 설교나 기도문을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탈리어로 해야 일반인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스스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도사가 독점하던 예수의 생각을 민주화·대중화했던 셈이다.

이렇게 프란체스코가 교황과 사제계급이 독점하던 기독교를 평민들의 기독교로 바꾸었기 때문에 그를 최초의 르네상스인으로 꼽는다는 게 시오노 나나미의 핵심 주장이다. 당시의 교황은 모든 것을 수직적으로 일괄 지배하는 일종의 절대반지를 낀 신의 대리인이었다. 카노사의 굴욕이 보여주듯, 유럽 왕들은 교황의 신임을 받아야만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寄進狀)’에 따라 모든 재산은 교회의 것이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신을 섬기는 데 평생을 바치는 성직자들의 사회적 지위도 남보다 우월했다.

그런데 프란체스코는 이것들을 허물었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 평생을 보낼 마음은 없지만 며칠만 수도원에 들어와 신에게 기도 드리면 얼마든지 훌륭한 신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만 지키면 돈을 벌어도 좋고, 번 돈을 수도회에 기부하거나 나병환자나 가난한 이들을 도우면 결국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교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큰 구원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신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당시 신흥계급인 상인과 수공업자 사이에 많았다. 이런 사람들을 모아 조직을 결성하고 ‘제3계급’이라는 이름을 붙여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편입시켰다. 결국 ‘로마교황청-클레로(사제)-프라테(수도사)-평신도(속인)’라는 수직적 지배구조를 ‘클레로=프라테=제3계급=속인’이라는 수평적 구조로 바꾸었다.

모든 시간을 신에게 바치는 사제나 수도사와 속세에서 생활하는 속인의 관계는 우열관계가 아니라는 걸 주장한 셈이다. 남보다 우월해서 사제나 수도사가 된 것도 아니고 열등해서 속인으로 남아 있는 것도 아니라 단지 선택의 결과에 불과하다는 것, 즉 인간의 기본권을 인정한 혁신 사상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은 거짓’ 최초로 공언

또한 프란체스코는 같은 시대 창설돼 경쟁관계에 있던 도미니쿠스 수도회가 아무리 자신들을 비난해도 상대를 욕하지 않았다. 게다가 프란체스코파에 속하지 않는 속인에게도 편견을 갖지 않았다. 이들에게도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보기에 이것 또한 프란체스코가 르네상스인인 결정적 이유다. 폐쇄적인 기독교의 문을 개방적으로 열어 기독교인들의 경제활동을 고무시켰고, 결국 이런 경제적 토양에서 르네상스의 꽃이 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종교 중에서 유신론이 아니라 유일하게 유심론인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는 신을 찾지 않고 사람이면 누구나, 나아가 동물에게도 그 마음 안에 불성(佛性)이 있다고 했다. 프란체스코 역시 순수하게 성서와 마주해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고, 자연과 마주하면 새들의 지저귐에 귀 기울일 뿐 아니라 새들에게 말을 걸기까지 했다. 그는 사람들이 가까이 가는 것조차 꺼리는 나병환자를 끌어안고 보호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소중하게 여겼다.

그는 또 신자의 마음과 그리스도 정신의 실천이 중요하기 때문에 교회를 호화롭게 장식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프란체스코 교회는 반쯤 마른 회반죽 위에 재빨리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 화법으로 교회 벽면에 그림을 그렸다. 모자이크보다 제작비도 싸고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려야 했기 때문에 완성된 벽화도 소박할만큼 대범하고 시원스러웠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런 정신이 최초의 르네상스 화가 조토를 낳고 결국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한 르네상스 회화의 꽃을 피웠다고 한다.

게다가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모든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웠던 프란체스코는 최초로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은 거짓’임을 공언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이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제국의 서쪽 절반, 즉 후세의 유럽 땅을 로마교황에게 바쳤다는 문서인데, 이것은 중세가 끝날 무렵까지 진짜로 여겨졌고 기독교 교회는 이를 근거로 모든 땅은 교회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15세기 이탈리아 문헌학자 로렌초 발라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살았던 4세기에 작성된 것이 아니라 11세기에 위조됐다고 밝혀냈다.

그런데 프란체스코는 기독교의 유일신 야훼만이 진리의 안내자라고 믿었다. 역시 일신교도였다. 십자군 시대의 시대적 한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상 예수를 가장 닮은 성인이라는 프란체스코가 했던 말-기독교만이 진리-또한 이제는 우상화하지 않아야 오늘날의 문명충돌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르네상스는 늘 새로운 휴머니티를 뜻하므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프란체스코파의 정신이지 않을까.



주간동아 616호 (p90~91)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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