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독서·쓰기· 화법 교육을 하고 있는 김슬옹씨. ‘통합교육을 위한 삶 쓰기 논술교육’ ‘삐딱하게 보고 뒤집어 생각해라’ ‘대중매체 읽고 쓰고 생각하기’ 등 다양한 논술 관련 책을 썼다.
사실 논술에는 지름길이 없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보는 우직한 방법이 최선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3년 내내 교과서와 참고서, 문제집만 접한 학생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논어’ ‘맹자’와 같은 동양고전,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의 글을 읽으라고 하니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지난 몇 년 동안 각 대학 논술이 고전에서 제시문을 뽑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렇다고 무리하게 한 달 내내 고전 한 권을 붙잡고 씨름할 필요는 없다.
짧은 준비기간 동안 어떻게 읽고 생각하고 쓸 것인가. 입시논술 지도 경험이 풍부한 3명의 명강사-박정하(세종대 교수·철학), 김슬옹(목원대 강사·연세대 또물또 통합교육연구회 회장), 손철성(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로부터 2003년 대학입시 논술비법을 들었다.
1. 논술, 준비됐나요?
손철성씨에 따르면 현재 수험생들의 가장 큰 고민은 1600~2000자를 채워야 하는 원고지만 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내용의 질을 떠나 원고지 채우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본격적인 논술 작성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자신이 어느 정도로 준비가 돼 있는지 진단해본다. 정확한 진단으로 유형을 분석하면 올바른 처방이 나온다.
상태: “원고지만 봐도 겁이 나고요, 가슴도 울렁거려요.” 진단: 원고지 사용법, 표현력 등 논술의 기본이 부실함. 처방: 논술의 기초학습부터 시작. 다작(多作) 필요. 완치: “원고지가 반가워요.”
상태: “600자는 쓰겠는데 1500자는 어떻게 쓰죠?”진단: 배경 지식 부족처방: 다독(多讀)완치: “선생님, 원고지가 부족해요. 더 주세요.”
상태: “무엇을 묻는 문제인지 잘 모르겠어요.”진단: 문제 파악 능력 부족처방: 다해(多解)완치: “아니, 이렇게 쉬운 문제를!”
상태: “골치 아프게 뭐 하러 깊게 생각해요? 그냥 평범하게 쓸래요.”진단: 사고력과 창의력 부족처방: 다상량(多商量)완치: “음, 내가 봐도 멋진 글이야!”
2. 베끼는 것도 공부다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 손철성씨. ‘고전과 논리적 글쓰기’에 대한 책을 펴냈다. “논술은 단지 대학입시 준비 과정이 아니라 대학 입학 후 수학능력까지도 좌우한다”고 말한다.
사실 소설가들도 습작기간 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베끼면서 스타일을 연구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생소한 원고지 쓰기에 익숙해지고, 다른 사람의 글을 통해 서론, 본론, 결론으로 이어지는 논리적 흐름을 익힐 수 있다. 눈으로 읽는 데 그치지 말고 직접 써보는 것이 핵심이다. 손철성의 ‘고전과 논리적 글쓰기’나 김슬옹의 ‘통합교육을 위한 삶 쓰기 논술교육’ 등에는 우수 예시답안이 잘 정리돼 있다. 신문이나 잡지의 칼럼(시사주간지 칼럼들은 대략 1600자 안팎으로 분량이 적당하다)을 옮겨 적어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
3. 생각하는 훈련부터
“생각하는 훈련이 돼야 쓰는 것도 의미가 있다.” 김슬옹씨는 학생들 스스로 “왜 고기를 낚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도록 생각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무슨 거창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 일상에 범람하는 대중매체를 통해 읽고 쓰고 생각하는 훈련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영화 ‘스파이더맨’을 보면 주인공이 “큰일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알쏭달쏭한 말을 한다. 무슨 뜻인가. 고교생에게 책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미성년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인가 등등의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생각을 열고 말길 트는 연습을 할 때 영화, 대중가요 가사, 만화, 신문·잡지, 소설, 연설문 등 어떤 것을 재료로 삼아도 좋다.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문열 원작)을 보면서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나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까지 연결시켜 폭력과 파시즘을 주제로 생각하고 쓸 수 있다면 훌륭하다. 그러나 배경 지식 이전에 문제설정 능력부터 키워야 한다.
박정하 세종대 교수(철학)는 “족집게 강사 따라다닐 시간에 교과서 단원 끝에 나오는 주관식 문제들을 연습하라”고 조언한다. ‘동서양 고전 읽고 쓰고 생각하기’ 등 논술책을 펴냈다.
김슬옹씨는 논술문이란 1. 자기의 주장이나 견해를 2. 조리 있게 서술하여 독자를 설득시키는 글이라고 정의했을 때, 1은 논술문의 내용적인 면을, 2는 논술문의 전개방법을 가리킨다고 말하다. 현재 대입 논술에서는 2의 비중이 더 높다. 즉 학생들에게 자기주장이나 창의력을 요구하기보다, 제시문을 제대로 이해하고 다소 평범한 견해나 주장일지라도 충분히 설득력 있게 논리적으로 펼치는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엮은 ‘동서양 고전 읽고 쓰고 생각하기’와 같이 어렵기만 한 고전의 핵심사상을 잘 정리해준 책들이 도움이 된다.
문제는 읽기 재료를 많이 다뤄보지 않은 학생들은 2개, 많게는 5개까지 나오는 제시문을 시간 내에 제대로 독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논술 작성에 주어지는 120분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40분 정도는 제시문을 꼼꼼히 읽으면서 개요 작성(상자기사 참조)에 할애한다.
5. 사설에서 칼럼으로
논술 연습을 하다 보면 패턴화된 글쓰기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서론, 본론, 결론의 3단락에 얽매이거나 연역법적 논리에 사로잡혀 뻔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김슬옹씨는 “채점을 해보면 비슷한 답안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 환경문제를 논하라고 하면 서양적 세계관이 문제고, 동양적 세계관이 좋다는 식의 결론을 쓴다. 또 결론에서는 앞의 주장을 요약하라고 배워 본론을 짧게 줄이기만 하면 결론이 되는 줄 아는 학생들도 많다”고 지적한다.
손철성씨도 구체성이 떨어지는 해결방안 제시는 오히려 감점요인이 된다고 말한다. “학생들이 내리는 해결방안이라 해야 ‘첫째 제도개혁, 둘째 의식개혁’ 하는 식이다. 그러나 최근 논술들은 해결방안 제시보다 현상분석을 요구하고 있다. 문제의 원인을 어떻게 분석했는지가 중요하다.”
형식 면에서는 신문 사설보다 칼럼식 답안이 좋다. 아무래도 단락 구성이 자유롭고 작성자의 색깔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6. 욕심 내지 말고 하루에 한 건만
한 달 반의 짧은 준비기간 동안 각종 논술 교재들 사이에서 헤매지 말고 꼭 필요한 한두 권을 독파하는 게 낫다.
여러 가지 논술과제가 주어졌을 경우 반드시 한 건은 100% 완성된 답안지를, 나머지 주제들은 30% 정도로 생각을 정리해보는 수준에서 그친다. 그러나 시험 2주 전부터는 실전처럼 연습한다.
7. 학원 100% 활용법
논술은 1대 1 지도가 최선이다. 손철성씨는 “매일 축구시합 본다고 축구실력이 향상되지 않는다. 논술도 마찬가지다. 직접 써보고 평가받을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학교에서는 논술전문 지도교사가 한두 명이거나 아예 없는 곳도 많아서 밀도 있는 첨삭지도가 어렵다는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원을 찾게 된다. 그러나 무조건 학원들을 전전하면서 유명강사를 쫓아다닌다고 논술실력이 느는 것은 아니다. 학원을 선택할 때는 논술 일반론을 설명해주는 대형강좌와 1대 1 맞춤형 지도가 가능한 소수 집중반 등 두 군데가 적당하다.
학원들 중에는 훈련되지 않은 사람에게 형식적으로 답안지 첨삭지도를 맡기는 경우도 있다. 또 약점을 지적해서 자신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진단하도록 하기보다, 격려 수준의 코멘트에 그친다. 그러나 자신의 답안지가 빨갛게 되도록 확실하게 첨삭지도를 해주는 곳이 좋다. 또 온라인에서도 첨삭지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학원을 찾지 않아도 된다.
박정하 교수는 “강남의 일부 학생들이 입시정보만 쫓아다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본 시험에 연습했던 제시문이 나왔다고 해서 반드시 유리한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실제 1998년 서울대 논술문제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나왔을 때 대부분 이 소설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다 보니 획일적인 답안이 나오고 말았다. “잘 아는 지문이 오히려 창조적인 답안 작성을 방해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족집게는 큰 의미가 없다.
박교수는 족집게 강사에게 매달리느니 차라리 교과서를 보라고 권한다. 특히 사회 관련 교과서의 단원이 끝날 때마다 나오는 주관식 물음들을 논제로 지속적인 훈련을 한다면 상당 수준의 준비가 가능하다. 교과서의 단원에서 배운 개념들을 바로 정리해서 논술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9. 스터디 그룹을 만든다
학교에서의 자투리 시간을 적극 활용한다. 5명씩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주제를 정해놓고 간단한 글쓰기와 토론을 한다. 집에서처럼 완성된 답안지를 작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적고, 주장의 근거를 다섯 가지씩 뽑아보는 훈련이 좋다. 각자 한 가지씩만 제시해도 다섯 가지가 나온다. 교사 한 명이 지도할 때보다 더 다양하고 독창적인 근거를 만들 수 있다.
또 5명이 신문과 시사잡지 한 권씩을 정해 일주일 동안 주요 시사문제 10개씩 뽑아 돌려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50개의 주제 가운데 겹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놓고 가볍게 토론한다. 직접 시사적인 주제를 뽑아보는 과정 자체가 생각하는 훈련이다.
면접을 준비할 때도 친구들을 면접관으로 활용한다. 1명이 발표하는 동안 4명이 각각 성량, 눈빛과 표정, 태도, 내용 등을 평가한다. 녹음한 것을 다시 들어보면서 지적된 부분을 확인한다.
10. 밥상머리 교육이 최선이다
‘이제는 아버지가 나서야 한다’의 저자 이해명 단국대 교수(교육학)는 아들 범주(현재 예일대 경제학과 재학중)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등교길을 늘 함께했다.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학교에 태워다주면서 아들과 나누는 대화의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대화는 아들이 책이나 신문에서 본 사회적 현상을 화제로 꺼내면 아버지가 질문을 던지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김영삼 정권 말기 계약직 노동자가 늘어나면서 사회적 불안요인이 되었을 때 아들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강조하면, 아버지는 고용의 불안정과 소외계층의 확산을 들어 논쟁을 벌였다. 또 이교수 가족은 책을 읽거나 신문에 나오는 사회적 이슈를 놓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가족토론은 딸이 결혼하고 아들이 고3이 될 때까지 계속됐다.
이해명 교수는 “이론이나 지식은 사고의 산물이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는 지식이나 이론의 학습은 위험하다. 또 대화나 토론은 자신이 주장을 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남의 비판을 통해 자신의 이론이나 지식을 확대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설명한다. 이때 부모의 역할은 아이가 독선에 빠지지 않고 폭넓은 사고를 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김슬옹씨는 “구술이든 논술이든 기본은 대화”라고 강조하면서 “내 생각, 남의 생각을 비교하고, 상대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동기와 맥락을 찾아가는 훈련은 가정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한다. 수험기간 동안 온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하는 시간을 늘리는 것도 좋은 공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