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서청원 대표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11월17일 선거전략회의를 마친 뒤 주요 당직자들과 함께 민주당 노무현,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의 후보단일화 합의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방향은 네 가지다. 후보단일화에 김대중 대통령의 그늘을 투영시키는 것, 노-정 후보단일화를 야합으로 몰아가는 것, 노-정 후보 TV토론을 저지하는 것, 후보단일화에 대한 교란책 등이 그것이다. 이중 특히 TV토론 저지와 교란책에 관심을 쏟고 있다.
한나라당 서청원 대표는 11월17일 기자회견에서 “16일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는 청와대가 부패권력을 연장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연출하고 있는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대변인실은 법무장관 검찰 경찰 친위인사 단행, DJ 처조카 이영작 박사의 ‘정몽준 살리기, 노무현 죽이기’ 강연을 청와대 개입 정황으로 제시했다.
서대표는 이어 “정치부패세력과 경제부패세력 간 야합”이라면서 노-정 후보단일화 의미를 깎아내렸다. 포지티브 선거운동을 해온 이회창 후보까지 공세에 나섰다. 한나라당의 위기의식이 심각하다는 반증이다. 이후보는 “한 후보는 파업을 선동했고 다른 후보는 구사대를 투입한 인물”이라면서 “이념과 정치철학이 다른 후보들간의 야합”이라고 비난했다.
청와대, 민주당, 국민통합21은 “대통령을 선거에 이용하지 말라”, “사돈이 땅 사면 배 아프다고 했다”며 반발했다. 일부 언론사 여론조사에서도 노-정 후보단일화 합의에 대해 긍정적 반응이 많이 나왔다. 양자 대결에서 정후보가 이후보를 앞지른 곳도 있었다. 한나라당 고위 당직자는 “단일화 합의가 발표되던 16일 새벽 우리도 ‘감으로’ 예상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나라당 주장도 여론에 반영되고 있다는 데 만족한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했다.
노후보 지원, 정후보 공격 … 파트너로 ‘노’ 원한다?
한나라당은 후보단일화에 대한 총론적 비판과 함께 ‘섬세한 공세’도 병행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노-정 후보 간 TV토론의 선거법위반 여부 검토를 의뢰했다. 선거법82조3항(토론의 진행은 공정해야 한다) 위반이라는 주장이다.
한나라당의 두 번째 ‘방화벽’은 법원이 될 수도 있다. 한 의원은 기자에게 “노-정 후보 TV토론 방송금지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낼 계획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관위 유권해석, 가처분신청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통상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한나라당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노-정 후보 간 TV토론이 성사될 가능성은 높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TV토론이 결국 방영된다면 횟수가 적을수록 좋으며 그 의미를 최대한 퇴색시켜 놓을 필요는 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대응 중 특히 주목할 부분은 김영일 사무총장의 반응이었다. 김총장은 “단일후보는 정몽준 후보로 이미 결정이 난 것 아니냐”고 말했다. 후보단일화 진영에 분쟁의 씨앗을 뿌리려는 의도라는 시각이 있다. 또 다른 쪽에선 “한나라당이 유권자들에게 ‘힌트’를 주려 한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이회창 후보 한 측근은 기자에게 “정후보가 후보단일화에서 이겨 한나라당을 위협할 것”이라고 말했다. “후보단일화 합의는 정후보의 양보로 성사됐다. 정후보가 노후보를 포용하는 모양새였다. 다음 날 조간 사진도 정후보가 노후보를 끌어안는 모습이더라. 소주 파티를 먼저 제안한 것도 정후보였다. 정후보가 이긴 게임이다.”
한나라당은 17일 “청와대가 여권 후보를 노후보에서 정후보로 교체하려 한다”고 아예 못을 박았다. 또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의 공약을 커닝하고 있다”면서 노후보를 지원하고, 정후보를 파상공격하는 자세를 취했다. 한나라당은 이후보 지지자들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면서 이후보의 파트너로 정후보보다는 노후보를 원한다는 점을 은연중 알리고 있는 셈이다.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한나라당은 후보단일화 합의 발표 이후 각 후보들의 지지율 변동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후보단일화 진영의 한 인사는 “한나라당이 노후보를 원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반(反)이회창 진영의 유권자 중 부동층이 정후보에게 이동하는 반작용도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지지자들의 방해, 반이회창 진영 유권자들의 역계산은 결국 여론조사의 신뢰도에 상당한 논란을 야기시킬 수 있는 것이다. 현재 후보단일화 여론조사는 위법성 논란(선거법108조 선거 60일 전부터 정당이 관여하는 여론조사 금지 조항 위반 여부)에 휘말려 있다. 여기에다 여론조사 신뢰도에 대한 논란까지 제기된다면 이는 한나라당에 유리한 정치환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같은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국민통합21은 11월18일 여론조사 방법이 민주당에 의해 유출됐다면서 합의된 여론조사 방식을 백지화했다. 역선택을 막을 방안을 찾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데 후보단일화 진영의 고민이 있다.
노-정 후보단일화 합의 이후 한나라당 내에선 당 지도부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젊은 두 후보가 화끈하게 손잡고 나가는 보기 좋은 모습을 연출하는 동안 한나라당은 유권자들에게 어떤 감동을 줬느냐는 자성론이다. 한나라당 김홍신 의원은 기자에게 “철새 의원들의 영입으로 당내 개혁 인사들과 유권자들에게 실망만 안겼다”고 비판했다.
한나라당은 의원 영입, (동문회 각종 사회단체 등) 직능단체 대상 선거운동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다른 후보 진영과 비교했을 때 매스미디어 선거 대신 전통적 조직선거에 더 치중하는 방식이다. 비판이 나오고 있지만 이제 와서 조직선거를 포기하기도 어렵다는 데 한나라당의 고민이 있다. 한나라당 허태열 의원은 “노-정 후보단일화는 지역적으로 이회창 후보를 포위하겠다는 지역선거 전략”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수도권, 충청권에서의 노-정 바람을 적극 차단해야 하며 이를 위해선 앞으로도 의원 추가 영입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의원 영입에 이미 일부 유권자들은 “질렸다”는 듯 손사래를 치고 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민련 이양희, 이재선 의원의 한나라당 입당 뒤 충청권에서 한나라당 지지율은 좀더 내려갔다. 한나라당 한 관계자는 “그동안 세 확장만 염두에 뒀고 이미지 관리는 소홀히 해왔기 때문에 정작 세를 확장해야 할 중요한 순간에 딜레마에 빠진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의원 영입을 그렇게 급하게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는 주장이다.
노무현, 정몽준 후보는 지금 주변의 바람과 구름을 끌어 모으며 태풍의 눈으로 부상하고 있다. 한나라당 내에선 “맞바람을 일으킬 ‘재료’들을 일찍 소진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없지 않다. 노-정 후보단일화에 나름대로 대처한다고 하면서도 한나라당은 지금 불안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