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 총리지명자의 인준이 부결되었음에도 여성총리에 대한 지지와 국민적 기대감을 고려한다면 차기 총리후보를 지명함에 그 취지를 반영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
7월31일 오후 참여연대에서 발표한 논평의 한 구절이다. 7·11 개각을 놓고 여성총리를 앞세운 ‘방탄내각’ ‘국면 전환용’이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개막 팡파르만 울리고 끝나버린 ‘첫 여성총리 시대’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민주당 이미경 의원은 부결 직후 의원들끼리 “최초라는 취지를 살리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다음에도 여성총리가 나오면 좋겠다”는 의견을 나눴다고 전했다. 김성순 의원도 8월2일 열린 민주당 확대간부회의에서 “다시 여성총리를 발탁하는 게 좋겠다. 대신 학계와 같이 온실 속에서 자란 인물만 보지 말고 들판에서도 찾아보자”며 대상의 폭을 넓힐 것을 주문했다.
현재 거론되는 여성후보는 장명수 한국일보 사장, 이인호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손봉숙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이사장,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 등 정치권 밖의 인물과 현 내각의 김명자 환경부 장관, 한명숙 여성부 장관 등이 있다. 여기에 김성순 의원의 주장대로 현역 여성의원들까지 대상을 넓힌다면 다시 한번 ‘여성총리 시대’를 기대해 볼 수 있다. 다만 여성 인선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와대가 이미 검증된 인물로 폭을 좁히면 ‘여성총리’라는 시대적 요청은 다음 정권으로 바통을 넘길 가능성이 높다.
‘여재상이 될 뻔했던’ 장상 지명자의 낙마 과정은 몇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여성이어서 더 불리했다”는 주장과 “여성이니까 도덕성에 문제가 있어도 인준해야 하느냐”는 반발로 이어진 페미니즘 논쟁, “장상이 안 되면 이회창은 더 안 된다”는 논리로 확대된 정치권의 음모론 등이 그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총리 지명부터 사퇴까지 과정을 ‘만약’이라는 가정 아래 재구성해 본다. 이는 차기 혹은 차차기에 등장할지 모를 ‘최초의 여성총리를 위한 변명’이 될 것이다.
만약 장상씨가 총리직을 수락하지 않았다면 …
일단 장상씨에게 “7개월짜리 총리직을 탐내다 망신만 당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누가 보아도 이번 총리직 제의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화여대 내에서도 “정치적 목적에 이용당하는 것 아니냐”는 반대론과 “남녀권한 척도가 세계 61위(유엔개발기구 발표)밖에 안 되는 한국이 여성총리 임명을 계기로 중위권에 올라설 수 있다”는 찬성론이 공존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장상씨 개인으로 봐서 아까운 일”이라는 촌평이 들어맞고 말았다. 만약 장상씨가 정치적 야심이 있었다면 정권 초기에 입각해 장관직을 수행했지 이제 와서 흠집 날 게 뻔한 총리직을 수락하지 않았으리라는 해석이 더 설득력 있다.
장상씨가 총리직을 수락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럼에도 정부는 ‘최초의 여성총리’라는 카드를 포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개각 후 야당이 “개각이 아닌 개악”이라고 몰아붙였지만 “첫 여성총리 지명을 빼고”라는 단서를 단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누구도 쉽게 딴지 걸기 어려운 정치적 ‘히든 카드’였음이 분명하다. 장상씨의 낙마로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지만.
이번 인사청문회에 대해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킨 것이 ‘매우 잘된 일’ 혹은 ‘잘된 일’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47.6%이고, ‘잘못된 일’ ‘매우 잘못된 일’이라는 평가가 37.3%여서 단지 “여성이었기 때문에 부결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부결의 1차적 책임이 장상씨 개인에게 있다 해도 여전히 “여자였기에 불리했던 것은 사실”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평론가 손혁재씨는 “장상씨가 남자였다면 검증의 잣대가 달라지지 않았겠는가”라며 이번 청문회가 보여준 한계를 지적했다. 바람직한 국무총리를 선택하기 위해 청문회에서는 첫째 국정수행 및 통합조정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둘째 민주성과 개혁성을 갖고 있는지, 셋째 일관성과 책임감을 지녀 신뢰할 만한지, 넷째 도덕성과 청렴성이 있는지, 다섯째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인지, 여섯째 납세 병역사항 등 국민의 기초의무 이행에 흠이 없는지 등을 확인해야 하는데 이번 청문회에서 집중 추궁한 아들의 국적, 부동산 투기, 아파트 등기, 학력 기재 등은 모두 도덕성에 관련된 것이지 국정수행 능력이나 개혁성과 무관하다는 것. “국무총리에게 고도의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나 이것만으로 총리의 적격성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더욱이 모두 의혹제기 수준이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처음부터 여성총리에 대한 편견은 존재했다.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이 “대통령 유고시 국방을 모르는 여성총리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겠느냐”고 한 발언은 ‘대통령 유고’에 방점이 찍혔지만, 여성계는 뒷부분을 들어 성차별적 망언이라고 분개했다. 이런 식의 편견은 임명 직후 “여성총리가 남성장관들을 제대로 지휘하고 통제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공공연하게 말해온 관료들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부산대 김진영 교수(정치학)는 “2000년 이한동 총리의 인사청문회에서 한나라당이 위장전입과 땅 투기 의혹을 제기해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그럼에도 이총리가 땅 투기 의혹을 부인하고 위장전입 여부는 ‘법률적으로 판단할 문제’라고 답변하거나 사과하는 선에서 무사 통과됐다. 그때와 비교하면 장상씨는 억울한 측면이 있다. 모처럼 여성총리였기 때문에 기대감이 큰 만큼 사소한 흠에도 국민들의 실망이 컸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덮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앞으로 공직자가 될 사람들의 도덕성을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물론 그 엄격한 잣대가 하필 여성총리 지명자부터 적용됐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만약 청문회에서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했더라면…
“학력 허위기재 어떻게 된 거냐.” “내가 안 했다.” “아들이 한국 국적 포기한 뒤 주민등록에 올려 의료보험 혜택까지 받고 투표권까지 누렸는데….” “잘 모르는 일이다.” “투기 목적으로 위장전입 여러 차례 하지 않았나.” “시어머니가 해서 잘 모른다.”
장상씨의 낙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부정부패나 능력의 문제라기보다 부적절한 태도가 결정적인 감점 요인이었다고 말한다. 인사청문회에 참가한 한나라당 특위위원들이 내린 평가서를 보면 “여러 의혹에 대해 책임 전가로 일관”(박승국), “책임 회피와 위증”(심재철), “정치 감각과 소신은 있으나 자기관리 부실”(이병석)이라고 적혀 있다.
방송인 전여옥씨(인류사회 대표)는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만 있던 분이어서 정치적 수사가 부족했다”며 “거짓말, 책임회피로 일관했다고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너무 솔직하지 않았나. 아들의 미국 국적이 문제가 되자, 국무총리가 될 줄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는데 노련한 정치인이었다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어쨌든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이지만 앞으로 고위직에 나갈 여성들에게 좋은 선례를 남겼다. 여성들도 청렴을 지키고 유연한 소통능력을 기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구차한 변명이라고 비난받은 ‘시어머니’ 대목도 달리 해석할 여지는 있다. 한 여성정치인은 “남성이었다면 시어머니가 아니라 아내 핑계를 댔을 것이다. 재산형성 과정이나 자식의 병역특혜 부분이 문제가 될 때마다 ‘집안일은 모두 아내에게 일임했기 때문에 미처 몰랐다’는 식의 변명이 얼마나 많았나. 모든 책임을 지고 아내가 감옥에 간 경우도 있었다. 아내 탓은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이고, 시어머니 탓은 뻔뻔한 책임회피로 보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총리 인준이 부결되자 적잖이 당황한 쪽은 한나라당이다. 총리 낙마로 인한 국정공백 책임이 고스란히 한나라당에 돌아온 데다, “총리직에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면 대통령 후보는 더 엄격하게 검증해야 한다”는 논리가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재빨리 이회창 후보와 장상씨의 비교 문건을 돌리며 흠집내기에 나섰고, 한나라당은 음모론으로 받아치고 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민주당이나 한나라당 모두 자유투표를 내걸고 특별히 표 단속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예상 밖 결과가 나오자 “충분히 가결될 거라 믿었다” “한나라당이 정치적 고려를 해서 인준할 줄 알았다”며 책임전가에 바쁘다.
정치평론가 손혁재씨는 “시민단체는 원칙을 고수해야 하지만 정치는 선택의 문제”라며 “어차피 여성총리의 지명이 여당의 정치적 카드였다면 한나라당도 정치적 선택을 했어야 한다. 한나라당이 청문회를 통해 대통령과 정권의 도덕성에 타격을 가하는 데 성공한 만큼, 최초의 여성총리라는 역사성을 들어 인준했더라면 차후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절묘한 선택이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부결은 한나라당에게 ‘자충수’가 됐다. 민주당이 더 잃을 게 없는 입장이라면, 한나라당은 남의 상처 건드리다 내 상처 덧난 꼴.
‘알몸 대한민국 빈손 김대중’의 저자인 역사학자 최상천씨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집단일수록 상대를 신랄하게 평가해서 자신의 도덕성을 입증하려 한다”며 이번 인사청문회가 남긴 것은 기득권층에 대한 혐오감뿐이라고 했다. “역대 총리와 비교해서 장상씨가 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국민들은 장상씨를 추궁하는 의원들에게도 똑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었을 것이다. 누가 누구를 단죄할 수 있겠나.”
한 남성 국회의원은 “인준이 거부된 후 장상씨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돌아서는 것을 보면서 아까운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인사청문회 특위위원들이 장상씨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한 부분을 보면 “정치 감각과 소신이 있다”(한나라당 이병석), “국정 이해도는 기대 이상”(민주당 전용학), “위기관리 능력이 돋보인다”(민주당 정대철), “정치적 소질 있음”(자민련 안대륜) 등이다. 도덕적 흠만 아니었다면 최초의 여성총리로 훌륭히 업무를 수행했으리라는 평가다.
장상씨를 설명할 때 으레 여장부, 호걸이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이화여대 110년의 전통을 깨고 첫 기혼총장이 된 것이나 총장이 된 후의 활동에서도 나타났듯 돌파력과 업무 추진력, 조정력 등은 검증된 사실이다. 만약 장상씨가 총리 인준을 받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주위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야당이 우려한 대로 정권의 충실한 친위내각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특유의 뚝심과 소신을 바탕으로 여당에 불리한 결정도 서슴지 않고 내리는 총리가 될 뻔했다. 특히 대선 때 정치적 중립성은 기대해 볼 만했다”는 것이다. 야당측에 훨씬 유리한 결과가 됐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6개월 후 국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싶었다”는 장상씨는 한국 사회에서 공직에 나서려면 엄격한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고 떠났다. 보다 촘촘해진 도덕성의 그물망을 빠져나갈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고위 공직자가 되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일만큼 힘들어졌다.
7월31일 오후 참여연대에서 발표한 논평의 한 구절이다. 7·11 개각을 놓고 여성총리를 앞세운 ‘방탄내각’ ‘국면 전환용’이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개막 팡파르만 울리고 끝나버린 ‘첫 여성총리 시대’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민주당 이미경 의원은 부결 직후 의원들끼리 “최초라는 취지를 살리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다음에도 여성총리가 나오면 좋겠다”는 의견을 나눴다고 전했다. 김성순 의원도 8월2일 열린 민주당 확대간부회의에서 “다시 여성총리를 발탁하는 게 좋겠다. 대신 학계와 같이 온실 속에서 자란 인물만 보지 말고 들판에서도 찾아보자”며 대상의 폭을 넓힐 것을 주문했다.
현재 거론되는 여성후보는 장명수 한국일보 사장, 이인호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손봉숙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이사장,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 등 정치권 밖의 인물과 현 내각의 김명자 환경부 장관, 한명숙 여성부 장관 등이 있다. 여기에 김성순 의원의 주장대로 현역 여성의원들까지 대상을 넓힌다면 다시 한번 ‘여성총리 시대’를 기대해 볼 수 있다. 다만 여성 인선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와대가 이미 검증된 인물로 폭을 좁히면 ‘여성총리’라는 시대적 요청은 다음 정권으로 바통을 넘길 가능성이 높다.
‘여재상이 될 뻔했던’ 장상 지명자의 낙마 과정은 몇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여성이어서 더 불리했다”는 주장과 “여성이니까 도덕성에 문제가 있어도 인준해야 하느냐”는 반발로 이어진 페미니즘 논쟁, “장상이 안 되면 이회창은 더 안 된다”는 논리로 확대된 정치권의 음모론 등이 그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총리 지명부터 사퇴까지 과정을 ‘만약’이라는 가정 아래 재구성해 본다. 이는 차기 혹은 차차기에 등장할지 모를 ‘최초의 여성총리를 위한 변명’이 될 것이다.
만약 장상씨가 총리직을 수락하지 않았다면 …
일단 장상씨에게 “7개월짜리 총리직을 탐내다 망신만 당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누가 보아도 이번 총리직 제의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화여대 내에서도 “정치적 목적에 이용당하는 것 아니냐”는 반대론과 “남녀권한 척도가 세계 61위(유엔개발기구 발표)밖에 안 되는 한국이 여성총리 임명을 계기로 중위권에 올라설 수 있다”는 찬성론이 공존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장상씨 개인으로 봐서 아까운 일”이라는 촌평이 들어맞고 말았다. 만약 장상씨가 정치적 야심이 있었다면 정권 초기에 입각해 장관직을 수행했지 이제 와서 흠집 날 게 뻔한 총리직을 수락하지 않았으리라는 해석이 더 설득력 있다.
장상씨가 총리직을 수락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럼에도 정부는 ‘최초의 여성총리’라는 카드를 포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개각 후 야당이 “개각이 아닌 개악”이라고 몰아붙였지만 “첫 여성총리 지명을 빼고”라는 단서를 단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누구도 쉽게 딴지 걸기 어려운 정치적 ‘히든 카드’였음이 분명하다. 장상씨의 낙마로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지만.
이번 인사청문회에 대해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킨 것이 ‘매우 잘된 일’ 혹은 ‘잘된 일’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47.6%이고, ‘잘못된 일’ ‘매우 잘못된 일’이라는 평가가 37.3%여서 단지 “여성이었기 때문에 부결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부결의 1차적 책임이 장상씨 개인에게 있다 해도 여전히 “여자였기에 불리했던 것은 사실”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평론가 손혁재씨는 “장상씨가 남자였다면 검증의 잣대가 달라지지 않았겠는가”라며 이번 청문회가 보여준 한계를 지적했다. 바람직한 국무총리를 선택하기 위해 청문회에서는 첫째 국정수행 및 통합조정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둘째 민주성과 개혁성을 갖고 있는지, 셋째 일관성과 책임감을 지녀 신뢰할 만한지, 넷째 도덕성과 청렴성이 있는지, 다섯째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인지, 여섯째 납세 병역사항 등 국민의 기초의무 이행에 흠이 없는지 등을 확인해야 하는데 이번 청문회에서 집중 추궁한 아들의 국적, 부동산 투기, 아파트 등기, 학력 기재 등은 모두 도덕성에 관련된 것이지 국정수행 능력이나 개혁성과 무관하다는 것. “국무총리에게 고도의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나 이것만으로 총리의 적격성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더욱이 모두 의혹제기 수준이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처음부터 여성총리에 대한 편견은 존재했다.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이 “대통령 유고시 국방을 모르는 여성총리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겠느냐”고 한 발언은 ‘대통령 유고’에 방점이 찍혔지만, 여성계는 뒷부분을 들어 성차별적 망언이라고 분개했다. 이런 식의 편견은 임명 직후 “여성총리가 남성장관들을 제대로 지휘하고 통제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공공연하게 말해온 관료들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부산대 김진영 교수(정치학)는 “2000년 이한동 총리의 인사청문회에서 한나라당이 위장전입과 땅 투기 의혹을 제기해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그럼에도 이총리가 땅 투기 의혹을 부인하고 위장전입 여부는 ‘법률적으로 판단할 문제’라고 답변하거나 사과하는 선에서 무사 통과됐다. 그때와 비교하면 장상씨는 억울한 측면이 있다. 모처럼 여성총리였기 때문에 기대감이 큰 만큼 사소한 흠에도 국민들의 실망이 컸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덮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앞으로 공직자가 될 사람들의 도덕성을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물론 그 엄격한 잣대가 하필 여성총리 지명자부터 적용됐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만약 청문회에서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했더라면…
“학력 허위기재 어떻게 된 거냐.” “내가 안 했다.” “아들이 한국 국적 포기한 뒤 주민등록에 올려 의료보험 혜택까지 받고 투표권까지 누렸는데….” “잘 모르는 일이다.” “투기 목적으로 위장전입 여러 차례 하지 않았나.” “시어머니가 해서 잘 모른다.”
장상씨의 낙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부정부패나 능력의 문제라기보다 부적절한 태도가 결정적인 감점 요인이었다고 말한다. 인사청문회에 참가한 한나라당 특위위원들이 내린 평가서를 보면 “여러 의혹에 대해 책임 전가로 일관”(박승국), “책임 회피와 위증”(심재철), “정치 감각과 소신은 있으나 자기관리 부실”(이병석)이라고 적혀 있다.
방송인 전여옥씨(인류사회 대표)는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만 있던 분이어서 정치적 수사가 부족했다”며 “거짓말, 책임회피로 일관했다고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너무 솔직하지 않았나. 아들의 미국 국적이 문제가 되자, 국무총리가 될 줄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는데 노련한 정치인이었다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어쨌든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이지만 앞으로 고위직에 나갈 여성들에게 좋은 선례를 남겼다. 여성들도 청렴을 지키고 유연한 소통능력을 기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구차한 변명이라고 비난받은 ‘시어머니’ 대목도 달리 해석할 여지는 있다. 한 여성정치인은 “남성이었다면 시어머니가 아니라 아내 핑계를 댔을 것이다. 재산형성 과정이나 자식의 병역특혜 부분이 문제가 될 때마다 ‘집안일은 모두 아내에게 일임했기 때문에 미처 몰랐다’는 식의 변명이 얼마나 많았나. 모든 책임을 지고 아내가 감옥에 간 경우도 있었다. 아내 탓은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이고, 시어머니 탓은 뻔뻔한 책임회피로 보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총리 인준이 부결되자 적잖이 당황한 쪽은 한나라당이다. 총리 낙마로 인한 국정공백 책임이 고스란히 한나라당에 돌아온 데다, “총리직에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면 대통령 후보는 더 엄격하게 검증해야 한다”는 논리가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재빨리 이회창 후보와 장상씨의 비교 문건을 돌리며 흠집내기에 나섰고, 한나라당은 음모론으로 받아치고 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민주당이나 한나라당 모두 자유투표를 내걸고 특별히 표 단속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예상 밖 결과가 나오자 “충분히 가결될 거라 믿었다” “한나라당이 정치적 고려를 해서 인준할 줄 알았다”며 책임전가에 바쁘다.
정치평론가 손혁재씨는 “시민단체는 원칙을 고수해야 하지만 정치는 선택의 문제”라며 “어차피 여성총리의 지명이 여당의 정치적 카드였다면 한나라당도 정치적 선택을 했어야 한다. 한나라당이 청문회를 통해 대통령과 정권의 도덕성에 타격을 가하는 데 성공한 만큼, 최초의 여성총리라는 역사성을 들어 인준했더라면 차후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절묘한 선택이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부결은 한나라당에게 ‘자충수’가 됐다. 민주당이 더 잃을 게 없는 입장이라면, 한나라당은 남의 상처 건드리다 내 상처 덧난 꼴.
‘알몸 대한민국 빈손 김대중’의 저자인 역사학자 최상천씨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집단일수록 상대를 신랄하게 평가해서 자신의 도덕성을 입증하려 한다”며 이번 인사청문회가 남긴 것은 기득권층에 대한 혐오감뿐이라고 했다. “역대 총리와 비교해서 장상씨가 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국민들은 장상씨를 추궁하는 의원들에게도 똑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었을 것이다. 누가 누구를 단죄할 수 있겠나.”
한 남성 국회의원은 “인준이 거부된 후 장상씨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돌아서는 것을 보면서 아까운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인사청문회 특위위원들이 장상씨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한 부분을 보면 “정치 감각과 소신이 있다”(한나라당 이병석), “국정 이해도는 기대 이상”(민주당 전용학), “위기관리 능력이 돋보인다”(민주당 정대철), “정치적 소질 있음”(자민련 안대륜) 등이다. 도덕적 흠만 아니었다면 최초의 여성총리로 훌륭히 업무를 수행했으리라는 평가다.
장상씨를 설명할 때 으레 여장부, 호걸이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이화여대 110년의 전통을 깨고 첫 기혼총장이 된 것이나 총장이 된 후의 활동에서도 나타났듯 돌파력과 업무 추진력, 조정력 등은 검증된 사실이다. 만약 장상씨가 총리 인준을 받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주위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야당이 우려한 대로 정권의 충실한 친위내각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특유의 뚝심과 소신을 바탕으로 여당에 불리한 결정도 서슴지 않고 내리는 총리가 될 뻔했다. 특히 대선 때 정치적 중립성은 기대해 볼 만했다”는 것이다. 야당측에 훨씬 유리한 결과가 됐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6개월 후 국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싶었다”는 장상씨는 한국 사회에서 공직에 나서려면 엄격한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고 떠났다. 보다 촘촘해진 도덕성의 그물망을 빠져나갈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고위 공직자가 되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일만큼 힘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