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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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 에피소드’는 계속된다

한나라당 자충수로 부메랑 맞을 가능성… 여성계 “여성표 결집으로 대선 영향력 행사 적극 모색”

  • < 허만섭 기자 > mshue@donga.com

    입력2004-10-07 10: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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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상 에피소드’는 계속된다
    총리인준 부결 뒤 4일이 지난 8월4일. 매스컴에 ‘장상’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없다. 그는 어느새 ‘잊혀진 인물’이 됐다. 이날 서울 남가좌동 창덕에버빌 19층 복도. 장씨 집 현관 앞에서 시작된 ‘취임축하 난(蘭) 화분’의 행렬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집 안에 두기가 싫은 것인지, 이웃이 가져가라고 한 것인지 주인의 의도를 알 길이 없다. 총리서리도 아니고, 이화여대 총장도 아니고, 교수도 아닌 이 난의 주인은 이날 집에 없었다. 주변 얘기로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위로차 장상씨 부부를 금명간 청와대에 초청할 계획이다. ‘대통령이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하는 듯 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위장전입 의혹, 이중국적 의혹, 부동산투기 의혹, 말 바꾸기 의혹, 총리 자질 의문 등 생채기만 잔뜩 얻은 채 “총리 시켜 주면 잘해보겠다”는 말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상씨는 격변하는 대선 정국의 무대 뒤로 떠밀리듯 사라지게 됐다.

    그러나 이젠 그를 끌어내린 쪽이 좀 다급해질 차례다. ‘장상 파문’은 겉으로는 고요해졌지만, 언제든 ‘리콜’이 가능한 커다란 메시지를 유권자들에게 던졌기 때문.

    우선 장상씨에게 가장 많은 ‘부(否)표’를 던졌음이 분명한 한나라당. 딱 떨어지는 결격사유 없이, 의혹의 메뉴만 다양해도 나라의 지도자로선 불합격이라는 ‘주홍글씨’를 헌정사에 새겨놓은 셈이다. 이는 또한 이회창 대통령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명분을 떨어뜨린 일이기도 했다. 한나라당 한 의원은 “대선은 일단 명분이 앞서야 이기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한나라당은 대선정국의 ‘포석’을 스스로 흩뜨려 놓았다는 것이다.

    민주당 내부서도 “심각한 무능력 보였다”



    ‘장상 에피소드’는 계속된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이한동 총리와 장상 총리서리 중 왜 장상씨에 대해서만 자유투표제를 도입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어떤 사안에 대해서 자유투표제를 적용할 것인지 뚜렷한 원칙을 제시하지도 않은 상태다. “자유투표제를 했기 때문에 결과에 대해 전혀 책임질 일이 없다”는 논리가 납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의원은 “한나라당은 민주당의 ‘장상 vs 이회창 비교 공격’을 외면함으로써 방어했다”고 말했다. 총리임명동의 부결 다음날 한나라당은 이정연씨 불법면제의혹 논란을 정치권의 ‘최대 이슈’로 키웠다. 산불을 산불로 진압하는 방식으로, 장상 정국의 ‘조기 종식’을 유도한 측면도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물론 민주당은 ‘심각한 무능력을 보였다’는 의견이 다수다. 한 원로정치인의 말. “70년대 오치성 내무장관의 해임건의안이 국회 표결에서 통과됐을 때 집권당인 공화당은 발칵 뒤집어졌다. 당 대표, 원내총무가 모두 사임했다. 아무리 세월이 바뀌어도 총리임명과 같은 일에서 집권당이 대통령과 따로 노는 것은 수권능력을 의심할 만한 일이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민주당은 총리임명동의안 처리와 관련해 우리에게 협조해 달라는 설득 한번 하지 않는 무책임성을 보였다”고 말했다. 민주당 일부에서도 “‘새벽21’ 등이 총리임명 반대 움직임을 보일 때 당 지도부와 각 계파 보스들은 이를 추스르려는 성의를 보였느냐”고 반문한다. 민주당 관계자는 “신당 창당 등 정계개편은 미래의 일이고, 우선 집권당의 책임 있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그래야 신당을 만들더라도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총리임명동의안 표결에는 15명의 의원들이 참여하지 않았다. 전 국민이 관심을 나타낸 사안인 데다, 국론이 나뉘어진 중요 국정현안에 대해 투표권 행사를 포기하는 것은 국민 대표로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표결에 불참한 것으로 확인된 의원은 강인섭 김만제 김용학(이상 한나라당), 김경천 김희선 설훈 이원성 최영희(이상 민주당), 김종필 송광호 이완구 정진석 조희욱(이상 자민련), 정몽준 의원(무소속) 등이다. 특히 김경천 김희선 최영희 등 3명의 여성의원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장상 에피소드’는 계속된다
    총리임명 부결로 정치권은 여성계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도 여성계는 “양당이 여성의 지방정치 참여를 권장하기는커녕 여성후보 공천을 극심하게 기피함으로써 여성의 정치 참여를 가로막고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다 된 여성총리’에 재까지 뿌렸으니 양당에 대한 여성계 반응이 고울 리 없다.

    여성계는 장상씨의 총리임명 부결에 대해 아쉬움의 톤을 상당히 누그러뜨린 ‘중성적’ 반응을 보였다. 청문회 과정에서 장씨에 대한 여론이 악화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자칫 여성이라는 이유로 장씨를 감싸고 돈다는 느낌을 줄 경우 여론으로부터 여성운동의 정당성이 공격받을 위험이 있는 것. 특히 참여연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주요 시민단체들이 장상씨의 총리인준에 부정적 입장을 보인 것은 인준투표 전후에 여성계가 소극적 반응을 보이게 된 원인 중 하나다.

    그러나 여성지도자 300여명이 장씨 지지모임까지 개최한 마당이어서 여성계는 장씨의 총리임명 부결에 내심 좌절감과 분노를 느꼈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회장 은방희) 성명에서도 그러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범죄자처럼 추궁하는 모습을 보인 데 유감을 표한다. 여성 지도자를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린 것은 유감스럽기 그지없다.”

    ‘검증은 철저히 하되 통과시켜 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막상 ‘검증은 검증대로 철저히 하면서 통과시켜 주지도 않는 결과’가 나오자 여성계는 “너무 했다”는 반응이다. 김모임 한국여성정치연맹 총재는 “여성들이 결집해 대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두고 보자”는 여성계 기류가 한나라당, 민주당 혹은 제3의 정치세력 중 어디에 어느 정도로 유리, 불리하게 작용할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정치권 한 인사는 “여성총리 등장의 시대적 당위성만큼은 범사회적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서 이번 장상씨 부결이 반드시 여성계에 나쁜 결과만 초래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최근 정부는 관례상 ‘국무총리 장상’ 명의로 30여건의 훈장, 포장을 수여했다. 이들 상을 모두 회수해 ‘국무총리 서리 장상’으로 새로 만들어 돌려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난감한 문제가 생겼다. “‘국무총리 지명자 장상’으로 하면 이상하잖아?”라는 웃지 못할 유머도 나온다.

    7월31일 오후 4시 서울 코엑스에서도 소란이 있었다. 중소기업청 주관의 전국공예품대전 시상 도중 장상 총리 임명동의안 부결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예정된 시상을 연기할 수도 없고, ‘국무총리상’을 받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이나 찜찜할 수밖에 없었다.

    ‘장상 에피소드 2’는 당분간 계속될 듯하다. 아마 대선이 끝날 때까지 정치권을 괴롭힐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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