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문단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지난해 12월 김명인, 권성우, 신철하, 노혜경, 하상일, 홍기돈, 고명철, 이명원, 김진석, 김정란, 진중권 등 ‘문학권력’ 논쟁의 중심에 있던 비평가 11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주례사 비평’으로 명명되는 ‘비평의 불구화 현상’을 비판하기 위해 특정 작가와 작품, 이에 대한 비평을 점검하기로 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김정란, 노혜경씨가 빠지고 나머지 9명이 각자 쓴 글을 돌려가며 리뷰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난산 끝에 ‘커밍순’(Coming Soon) 예고편을 튼 지 반년이 지나서야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가 태어났다.
왜 이들이 주례사 비평에 메스를 들었는지 권성우씨는 ‘해석의 독점’ 문제로 설명한다. 현재 문단에서 이루어지는 비평의 유통과정은 다음과 같다. 해당 신간 작품 뒤에 유력한 비평가가 호의적 해설을 붙이거나 문예지의 리뷰 및 서평을 통해 적극적인 의미부여를 한다. 그 해설 및 리뷰가 언론을 통해 전파되고 인용된다.
이렇게 문학적 상징권력을 획득한 작가의 작품은 설령 태작일지라도 지속적으로 언론의 관심과 호의적인 비평의 조명을 받는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스타작가들이 돌아가면서 유력 문학상을 수상하고 그들의 에세이, 독서일기, 영화평, 결혼, 일상 등등 다양한 글쓰기로 대중들에게 다가간다. 이제 작가 자체가 일종의 상징권력이 되어 해당 작가를 비판하는 글쓰기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
권성우씨는 ‘현학과 과잉, 그리고 비평의 감옥’이라는 글에서 ‘다양한 해석학적 충돌’을 막고, 작품해석을 독점한 결과로 우리 문학의 위기와 비평의 위기로 이어졌다고 말한다(정확히 말하면 유력한 원인이라고 했다).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된 작가는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김형중(이상 소설가), 서정주, 황지우(이상 시인)이며 황종연, 정과리 외에 수많은 평론가들의 텍스트가 메타비평의 대상이 됐다. 물론 이들 작가와 평론가가 문제의 전부일 수 없으며 다만 상징적 존재로서 논의의 중심에 섰다고 보여진다.
김명인씨는 90년대 평론의 문제점을 해설의 주류화로 요약했다. 본격적인 비평은 사라지고 대신 해설이 그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는 것. 원래 해설은 작품집 출간에 들러리를 서는, 비평 장르에서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독자들이 가장 먼저 접하는 비평문으로 작품 해석에서 하나의 정론으로 기능하고 있다. 김씨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주례사 비평이 될 가능성이 높은 ‘해설비평’이 곧 신경숙 신화를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고 본다.
고명철씨는 ‘메이저에서 상품화된 마이너들의 농담’이라는 글에서 90년대 이후 창비만의 문학담론을 생성시켜 왔던 비평적 에콜(학파·유파)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면서 출판상업주의와 타협한 결과물로 은희경의 ‘마이너리그’를 평가한다.
전경린의 ‘열정의 습관’도 이런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명원씨는 언론의 ‘전경린 띄우기’와 ‘해석 과잉의 문제’를 거론했다. 그는 전경린의 초기 소설이 보여주었던 미적 탁월성을 ‘마녀’라는 개념으로 집약하면서, 비평가 역시 마녀가 돼야 한다고 했다.
그 밖에 ‘비평의 유토피아, 총각 딱지 떼기의 후광으로 빛나는’이라는 긴 제목의 글에서 홍기돈씨는 신인문학상 제도의 문제점을 검토했고, 김진석씨는 ‘초월적 서정주의에 스민 파시즘적 탐미주의’에서 미당 서정주의 신화화에 바쳐진 비평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신철하씨는 ‘성과 속’에서 무비판적인 황지우 옹호의 문제점을, 하상일씨는 ‘무덤 속의 비평’에서 정과리 비평의 과잉해석 문제를 따졌다. 마지막으로 진중권씨가 ‘문학권력 논쟁에서 예술사회학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9명의 평론가들이 상투적인 비판에 머물지 않고 본격적으로 텍스트를 해부하며 문학과 문단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는 자극적인 책이다. 또 2년 넘게 진행되면서 자칫 말싸움으로 변질될 수도 있는 문학권력 논쟁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판에 끼려면 적어도 거론된 작품 가운데 서너 권은 읽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지만 그냥 놓치기 아까운 논쟁이다.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 김명인 외 지음/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펴냄/ 336쪽/ 1만2000원
개인적인 사정으로 김정란, 노혜경씨가 빠지고 나머지 9명이 각자 쓴 글을 돌려가며 리뷰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난산 끝에 ‘커밍순’(Coming Soon) 예고편을 튼 지 반년이 지나서야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가 태어났다.
왜 이들이 주례사 비평에 메스를 들었는지 권성우씨는 ‘해석의 독점’ 문제로 설명한다. 현재 문단에서 이루어지는 비평의 유통과정은 다음과 같다. 해당 신간 작품 뒤에 유력한 비평가가 호의적 해설을 붙이거나 문예지의 리뷰 및 서평을 통해 적극적인 의미부여를 한다. 그 해설 및 리뷰가 언론을 통해 전파되고 인용된다.
이렇게 문학적 상징권력을 획득한 작가의 작품은 설령 태작일지라도 지속적으로 언론의 관심과 호의적인 비평의 조명을 받는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스타작가들이 돌아가면서 유력 문학상을 수상하고 그들의 에세이, 독서일기, 영화평, 결혼, 일상 등등 다양한 글쓰기로 대중들에게 다가간다. 이제 작가 자체가 일종의 상징권력이 되어 해당 작가를 비판하는 글쓰기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
권성우씨는 ‘현학과 과잉, 그리고 비평의 감옥’이라는 글에서 ‘다양한 해석학적 충돌’을 막고, 작품해석을 독점한 결과로 우리 문학의 위기와 비평의 위기로 이어졌다고 말한다(정확히 말하면 유력한 원인이라고 했다).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된 작가는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김형중(이상 소설가), 서정주, 황지우(이상 시인)이며 황종연, 정과리 외에 수많은 평론가들의 텍스트가 메타비평의 대상이 됐다. 물론 이들 작가와 평론가가 문제의 전부일 수 없으며 다만 상징적 존재로서 논의의 중심에 섰다고 보여진다.
김명인씨는 90년대 평론의 문제점을 해설의 주류화로 요약했다. 본격적인 비평은 사라지고 대신 해설이 그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는 것. 원래 해설은 작품집 출간에 들러리를 서는, 비평 장르에서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독자들이 가장 먼저 접하는 비평문으로 작품 해석에서 하나의 정론으로 기능하고 있다. 김씨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주례사 비평이 될 가능성이 높은 ‘해설비평’이 곧 신경숙 신화를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고 본다.
고명철씨는 ‘메이저에서 상품화된 마이너들의 농담’이라는 글에서 90년대 이후 창비만의 문학담론을 생성시켜 왔던 비평적 에콜(학파·유파)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면서 출판상업주의와 타협한 결과물로 은희경의 ‘마이너리그’를 평가한다.
전경린의 ‘열정의 습관’도 이런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명원씨는 언론의 ‘전경린 띄우기’와 ‘해석 과잉의 문제’를 거론했다. 그는 전경린의 초기 소설이 보여주었던 미적 탁월성을 ‘마녀’라는 개념으로 집약하면서, 비평가 역시 마녀가 돼야 한다고 했다.
그 밖에 ‘비평의 유토피아, 총각 딱지 떼기의 후광으로 빛나는’이라는 긴 제목의 글에서 홍기돈씨는 신인문학상 제도의 문제점을 검토했고, 김진석씨는 ‘초월적 서정주의에 스민 파시즘적 탐미주의’에서 미당 서정주의 신화화에 바쳐진 비평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신철하씨는 ‘성과 속’에서 무비판적인 황지우 옹호의 문제점을, 하상일씨는 ‘무덤 속의 비평’에서 정과리 비평의 과잉해석 문제를 따졌다. 마지막으로 진중권씨가 ‘문학권력 논쟁에서 예술사회학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9명의 평론가들이 상투적인 비판에 머물지 않고 본격적으로 텍스트를 해부하며 문학과 문단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는 자극적인 책이다. 또 2년 넘게 진행되면서 자칫 말싸움으로 변질될 수도 있는 문학권력 논쟁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판에 끼려면 적어도 거론된 작품 가운데 서너 권은 읽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지만 그냥 놓치기 아까운 논쟁이다.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 김명인 외 지음/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펴냄/ 336쪽/ 1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