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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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걸씨 관리 ‘무방비 상태’

최규선씨 사정당국 밀착 마크 비웃듯 행동… 국정원 일부 관계자는 ‘줄서기’도

  • < 특별취재반 >

    입력2004-11-01 14: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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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걸씨 관리 ‘무방비 상태’
    ”최규선이 자신과 친한 여인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모 부처 장관은 내가 시켜주었다’고 자랑했다.” 작년 말 ‘진승현 게이트’ 관련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전 국가정보원 경제과장 정성홍씨가 작년 5월 무렵 한 사석에서 한 얘기다. 정성홍씨는 같은 혐의로 함께 구속된 전 국정원 2차장 김은성씨의 심복으로 통했던 인물. 국정원 관계자들은 “정성홍 전 과장이 김은성 전 차장에게서 그런 얘기를 듣고 떠들고 다녔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최씨가 자랑한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정씨의 말은 국정원이 당시 최규선씨를 ‘집중 마크’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최씨의 전화를 감청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실제 최씨는 오래 전부터 국정원 등 사정당국의 요주의 대상 인물로 분류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최근 최씨를 둘러싼 각종 의혹이 제기되고 그중 상당수가 사실로 밝혀지고 있는 것은 국정원 등 사정·정보 당국의 ‘감시망’에 구멍이 뚫렸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여권 인사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다. 사정당국 관계자는 “오래 전부터 ‘최규선씨가 홍걸씨를 팔고 다닌다’는 보고가 국정원 등 요로에서 김대통령에게 직접 올라갔고, 김대통령도 그때마다 홍걸씨에게 전화를 걸어 주의를 당부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김홍걸 - 최규선 커넥션’ 의혹이 점차 사실로 밝혀짐으로써 결과적으로 사정당국의 보고가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여권 관계자들은 “결론부터 말하면 최규선씨가 활개칠 수 있도록 방치한 궁극적인 책임은 김대통령에게 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과거 야당 시절 형성된 정보기관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친인척 감시라는 악역을 담당할 수 있는 국정원 등의 정보·사정 기관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그런데다 이들 기관 관계자들 사이에 ‘친인척 관련 보고를 올리면 나만 손해’라는 보신주의가 퍼져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최씨의 비리 혐의가 처음으로 사정당국에 포착된 것은 98년 9월 무렵이다. 최씨는 당시 외자유치 과정에서 거액의 리베이트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돼 청와대 사직동팀(경찰청 조사과)의 조사를 받았다. 최씨는 이와 관련, 4월9일 기자들과 만나 “홍걸씨가 당시 아버지(김대통령)에게 ‘철저히 진상을 가려달라’고 얘기했고, 수사 결과 무혐의 결론이 났다”고 밝혔다. 이후 미국으로 떠난 최씨는 한동안 국내에 나타나지 않았다.

    최씨는 이 일 때문에 현 정권에 섭섭한 감정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이 97년 대선 과정에서 상당한 임무를 했음에도 오히려 모함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씨는 대선 과정에 미국 팝 가수 마이클 잭슨, 헤지펀드 대가 조지 소로스, 사우디아라비아 알 왈리드 왕자 등을 초청하거나 당시 김대중 후보측과 연결해 주었다.

    홍걸씨 관리 ‘무방비 상태’
    최씨의 움직임이 다시 정보·사정 당국에 포착된 것은 2000년 초 권노갑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의 보좌역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무렵. 당시 권고문은 정권교체 이후 처음으로 당의 공식 직함을 갖고 총선을 진두지휘하는 등 여권 실세로서 막강 파워를 과시했다. 권고문은 최씨를 상당히 신임했고, 그에 따라 최씨의 위세도 막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해 여름 무렵부터 최씨 관련 보고가 청와대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최씨가 자신에게 잘 보인 사람들만 권노갑 고문 면담 일정을 잡아주는 등 권고문을 등에 업고 ‘장난’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 가운데는 “최씨의 이런 행동으로 볼 때 최씨가 나중에 자신과 가까운 홍걸씨를 이용해 문제를 일으킬 소지도 다분하다”는 경고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청와대측은 최씨에 대한 보고를 음해성으로 해석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사정당국 한 관계자는 말한다. 청와대측으로부터 최씨 관련 보고를 귀띔받은 권고문도 처음에는 비슷한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권고문이 최씨 관련 보고를 믿고 최씨에게 금족령을 내린 것은 2000년 10월 무렵이었다.

    문제는 최씨 관련 보고 중 홍걸씨 부분에 대한 김대통령의 태도.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김대통령은 과거 야당 시절 형성된 정보기관에 대한 불신감 탓인지 정보기관의 친인척 관련 보고보다 당사자인 친인척들의 해명을 더 믿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최씨가 각종 물의를 빚을 때까지 활개치도록 한 궁극적인 책임은 김대통령 자신에게 있다는 지적이다.

    김대통령의 이런 태도는 정보기관 관계자들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의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청와대 측이 언론에서 제기한 아들 문제에 대한 의혹을 일축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국정원에서는 보신주의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권력 핵심은 정보기관의 속성도 몰랐을 뿐 아니라 정보기관 운용도 제대로 하지 못한 셈이다.

    이 과정에 일부 국정원 관계자들은 적극적으로 최씨에게 ‘줄서기’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관계자는 “국정원과 숨바꼭질하던 최씨가 그때마다 홍걸씨와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뒤로 숨는 바람에 국정원 등에는 한때나마 ‘역풍’이 불었고, 이를 통해 최씨의 위세를 확인한 국정원 일부 간부들은 오히려 최씨에게 접근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국정원 관계자들이 꼽는 대표적인 인물은 김은성 전 2차장, 정성홍 전 경제과장 , 현직 간부 I씨 등이다. 국정원 관계자들은 “임동원 원장 시절 국내 정보를 총괄했던 김은성 전 2차장의 경우 처음에는 홍걸씨와 최씨 커넥션을 우려하는 보고서를 올리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최씨가 건재함을 확인한 이후에는 오히려 최씨와 밀월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I씨의 경우 직원들 앞에서 최씨와의 관계를 발설, 그에게 줄을 선 사실이 알려지게 됐다는 후문. 또 정성홍 전 과장의 경우 ‘진승현 게이트’에 깊숙이 개입됐다는 약점 때문인지 적극적으로 최씨에게 접근, “홍걸씨에게 잘 얘기해 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관계자들은 “최씨를 감시했어야 할 간부들이 오히려 최씨와 어울린 것은 국정원이 권력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한다.

    국정원이 이처럼 힘 빠진 상황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실 등 다른 기관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여권 관계자들은 “대통령 아들이나 여권 실세들과 가깝거나 이들에게 잘 보이려고 한 사람들이 국정원이나 민정수석실에 몸담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 기관이 어떻게 친인척 또는 여권 실세의 부패 연루 가능성을 감시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홍걸씨를 둘러싼 비리 의혹은 처음부터 예상된 일이었던 셈이다. 악역을 맡으려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 친인척을 이용하려는 브로커들이 주위에 들끓었고, 그것이 권력형 비리로 현실화됐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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