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1

..

‘얼굴 미인’은 가라 … ‘팔방미인’ 떴다

‘귀여운 여자’ ‘튀는 여자’가 각광받는 시대 … ‘만화 주인공’ 같은 친근 이미지에 대리만족 느껴

  • < 신을진 기자 >happyend@donga.com

    입력2004-11-01 14:3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얼굴 미인’은 가라 … ‘팔방미인’ 떴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20, 30대의 여성들 가운데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마치 이 또래 남성들이 ‘기운 센 천하장사~’로 시작되는 ‘마징가 Z’의 주제가를 기억하고 있듯, ‘들장미 소녀 캔디’의 주제가는 신세대 여성들의 기억 속에 단단히 각인돼 있다.

    이 노래를 따라 부르던 소녀들은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울지 않으려 애썼을 것이고, 안소니나 테리우스처럼 멋진 남자친구의 등장을 남몰래 기다리기도 했을 것이다. 평범한 소녀인 캔디는 그 평범함 때문에 그 시절 소녀들의 친구이자 우상이었다.

    최근 거의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두 여자 연예인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캔디 같은 만화 주인공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바로 ‘네모공주’ 박경림(25)과 ‘명랑소녀’ 장나라(21)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다르지만 묘한 공통점이 있다. 방송 3사를 종횡무진 누비는 것도 모자라 최근 ‘박고테 프로젝트’라는 음반까지 낸 박경림은 아무리 잘 봐줘도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얼굴이다. 그러나 박경림은 재치 넘치는 입담과 각종 엽기적인, 그러면서도 밉지 않은 행동으로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고 있다. 꽃미남과 스캔들 한번 만들어보겠다고 기염을 토하더니 드라마 안에서나마(‘뉴 논스톱’) 최고의 꽃미남 조인성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결혼까지 했다.

    장나라는 또 어떤가. 지난해 여성스런 이미지를 강조하며 ‘눈물에 얼굴을 묻는다’를 부를 때만 해도 그녀를 주목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귀엽고 명랑한 소녀로 이미지를 바꾸자마자 단번에 스타덤에 올랐다. 가수와 MC를 거쳐 연기까지 영역을 확장한 장나라는 기존의 아름답고 섹시한 여성 스타와는 달리 깜찍하고 귀여운 캐릭터로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데 성공했다.



    “빼어난 미인이라고 해도 섹스 비디오나 재벌 2세와의 염문, 성급한 결혼과 이혼 등의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 것이 기존 여자 연예인의 모습입니다. 이같이 비슷비슷한 연예인들에 식상한 시청자들은 상대적으로 순수하고 깨끗한 이미지의 장나라에게 쉽게 매료될 수밖에 없습니다.” 문화평론가 이동연씨가 말하는 장나라의 인기 비결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최근 장나라가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 ‘명랑소녀 성공기’는 일본 만화인 ‘꽃보다 남자’와 너무 흡사하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순정만화의 초기에 등장했던 주인공들은 주로 늘씬한 서구의 미인형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순정만화 주인공들은 독자층의 연령에 맞추어 ‘귀여운 10대’로 탈바꿈했다. 만화평론가 박인하는 민화비평서 ‘누가 캔디를 모함했나’에서 귀엽고 천진한 80년대 순정만화 주인공을 ‘큐트(Cute)형 주인공’이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80년대 순정만화에 나타난 ‘큐트형 주인공’은 90년대 소년만화로까지 광범위하게 퍼지며 하나의 문화 현상을 이루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보면 장나라가 청소년들에게 쉽게 친근감을 주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CF와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는 장나라의 모습은 놀란 듯한 큰 눈과 동그란 얼굴, 자유자재로 변하는 표정까지 이웃집 여고생 같은 친근감의 ‘큐트형’ 그 자체다. 게다가 약간 주책맞고 엉뚱한 행동까지 참으로 만화적이지 않은가.

    주철환 교수(이화여대) 역시 ‘명랑소녀 성공기’의 성공은 ‘만화세대’의 의식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명랑소녀 성공기’는 심각하고 진지한 것보다는 명랑하고 가벼운 것을 좋아하는 현 시대의 의식을 잘 짚은 드라마입니다. 거기에 더해 성공 스토리는 항상 우리 사회가 갈망하는 주제이기도 하죠. 이처럼 대중이 원하는 요소를 갖춘 드라마에서 장나라가 주인공 차양순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주교수는 “한 연예인이 인기를 얻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능력이겠지만 시대의 정서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장나라의 경우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맞아떨어졌다”고 진단한다.

    박경림의 인기 비결은 장나라와 약간 다르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벌리고 ‘우하하하’ 하고 웃거나, 그릇 깨지는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박경림의 행동은 순정만화 주인공보다는 만화영화 ‘슈렉’의 엽기 공주에 가깝다.

    박경림의 엽기 이미지 역시 만화 마니아들에게는 낯설지 않다. ‘이나중 탁구부’나 ‘멋지다 마사루’처럼 일본 만화들은 90년대 들어 중점적으로 황당하고 엽기적인 캐릭터들을 등장시키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왕따’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는 시점이었다.

    “‘이나중 탁구부’ 같은 만화 속의 엽기적인 주인공들은 왕따를 당하기는커녕, 지루한 일상에 지쳐 있던 일반인들을 매혹시켜 그들의 영웅으로 군림합니다. 현실의 모순을 만화 특유의 과장된 문법으로 풀어버린 거죠. 이 같은 이유로 90년대 만화의 못생겼지만 도발적인 캐릭터들은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만화평론가 이명석씨의 말이다.

    심리학자 황상민 교수(연세대)는 “공주 같아야 한다는 연예인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이미 깨졌다”고 박경림의 인기 비결을 설명한다. “최근 연예인 중 엽기적인 이미지, 기존의 전형적 이미지와 다른 이미지를 내세워 인기를 얻은 경우는 의외로 많습니다. 트랜스젠더 하리수의 인기는 과거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죠. 류승범, 양동근 같은 결코 꽃미남이 아닌 ‘양아치’ 스타일도 인기를 얻고 있고요. 이제는 미인과 연예인의 기준도 과거 같은 정형성을 벗어난 셈이죠. ‘포켓몬’의 주인공도 선남선녀가 아니라 100여 마리에 가까운 평범한 캐릭터 아닙니까.”

    그러나 박경림의 가장 확실한 인기 비결은 청소년들의 ‘자기동일시’에 있는 듯하다. 날이 갈수록 외모가 중요시되는 상황에서 그리 예쁘지도 잘나지도 못했지만, 대신 재치와 순발력으로 노력하는 자세를 갖춘 박경림이 ‘잘 나가주는 것’ 자체가 청소년들에게 위안과 안도감을 준다는 얘기다. 여기에 더해 박경림은 목소리 등 자신의 약점까지도 장점으로 전환시키는 ‘미덕’을 보여주었다.

    “사실 박경림이 가수가 된다든가, 꽃미남과 연애하는 것은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박경림은 방송 안에서 그렇게 불가능하다 싶은 일을 연속적으로 해내고 있죠. 그런 모습에서 청소년들은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방송작가 한영희씨의 분석이다. 현실의 모순을 특유의 과장과 황당한 문법으로 단숨에 풀어버리는 만화처럼, 만화의 카타르시스에 익숙해 있는 세대들이 TV에서 또 하나의 ‘닮은꼴’ 스타를 찾아낸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80년대 말 흑인 여학생들은 뚱뚱한 여배우 우피 골드버그를 우상으로 삼았다. 자신들과 비슷한 조건을 가진, 그러나 성공한 배우인 우피 골드버그를 통해 흑인 여학생들은 대리만족과 함께 ‘나도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박경림과 장나라야말로 요즘 청소년들의 ‘욕망의 아이콘’인 셈이다.

    물론 최근의 방송 프로그램에서 잘 망가지고 잘 노는 ‘전천후 개인기형’ 연예인들이 득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영애나 김희선같이 ‘완벽한 미인’ 소리를 듣는 연예인들은 굳이 방송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박경림의 경우는 다르죠. 사실 박경림의 재치와 순발력은 따라올 사람이 없는 수준입니다.” 한 연예 전문기자는 ‘앞으로도 TV 프로그램에서 잘 놀고 말 잘하는 만능 연예인의 출연 비중은 점점 커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 같은 분석은 좀 표피적인 듯하다. 최근 ‘여자가 예쁜 것은 경쟁력이다’는 한 화장품 광고 카피가 소비자들의 반발로 도중하차한 사건이 있었다. 이렇게 노골적인 광고가 등장하고 ‘몸이 계급이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만큼, 미모와 육체가 무조건 중시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에 비하면 미모가 좀 떨어져도 성격 좋고 노력하면 성공과 사랑을 얻을 수 있는 만화 속 세상은 덜 각박하다. 박경림과 장나라가 사랑받는 것은 ‘예쁘지 않아도 경쟁력 있는’ 사회를 소망하는 청소년들의 숨겨진 바람인지 모른다. 바로 그래서 장나라와 박경림은 현실과 만화 사이의 경계선에 위치한다. 바야흐로 지금 TV는 명랑소녀들의 전성시대인 것이다. 비록 퇴행적이라는 비판을 들을지라도.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