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7

2006.01.03

윤회의 오해와 진실

  •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입력2006-01-02 10: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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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다. 도시에서는 기온 차이로 계절을 느끼지만, 가까운 교외에만 가도 계절의 변화를 산에서 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득 자연 앞에 서면, 그 변화무쌍함에 놀란다. 사람의 평생이 그러하듯 자연의 영고성쇠도 무상하다. 탄생과 소멸이라는 묵직한 화두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불교와 기독교 철학을 가르는 큰 차이 중 하나가 시간관이다. 불교에서는 시간을 순환하는 것이라 보지만, 기독교는 ‘천국의 땅’으로 귀결하는 수직적인 것으로 본다. 그리고 불교의 순환론적 시간관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바로 ‘윤회’사상이다.

    흔히 윤회라 하면 죽고 난 뒤 다시 태어나는 것, 또 이승에서 죄를 지으면 다음 생에서 개나 돼지로 환생하므로 착하게 살아야 하는 근거 중 하나로 생각한다. 하지만 불교 철학의 과학성과 합리성에 매료됐던 사람들은 이 윤회 사상 앞에서 당혹스러워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며, 게다가 축생으로까지 환생한다고?

    나는 이 윤회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해인사 주지인 현응 스님이 펴낸 ‘깨달음과 역사’(해인사 출판부)에서 얻었다. 스님은 우선 사람들이 윤회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윤회란 말은 본래 불교 언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윤회의 개념은 불교 이전 고대 인도 종교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붓다가 살던 기원전 6세기경 인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생명은 한 번 죽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며 끝없이 재생한다’고 믿고 있었다 한다.

    먹을거리와 일용품이 부족한 빈곤하고 불평등한 사회체계에서는 삶이란 괴로움의 연속이므로 삶의 재생, 즉 다시 태어나는 것을 싫어했다. 그것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 삶’에 대한 동경을 낳았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윤회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해탈 사상이 생겨났다는 설명이다. 이런 해탈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고행이나 제사 같은 종교적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우리 삶이란, 존재란 변화와 관계를 통해 이뤄나가는 것이라는 불교적 세계관에 위배된다. 현재 삶에 대한 불만족이나 고통은 단지 빈곤이나 불평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어떤 도달해야 할 ‘절대’가 존재하는 것을 전제한 사고방식이다. 이런 이들에게 현재의 삶이란 왜곡된 모습이기 때문에 탈피해야 하고 따라서 해탈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현응 스님은 윤회가 아니라 ‘연기’적 삶을 강조한다. 연기적 삶은 ‘나’ 혹은 ‘내 삶’에 얽매임 없이 변화와 관계로서의 열린 자세로 자유롭게 역사를 꾸려가는 것이다. 윤회가 현실에 두려움을 갖고 죽고 태어나는 일에 얽매이는 것이라 하면, 연기는 삶을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의 원처럼 연속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다시 스님의 말이다. “‘일일일야 만사만생(一日一夜 萬死萬生)’이니 하루에도 수만 번 나고 죽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바로 윤회의 실상 아니겠는가. 곧 윤회란 변화를 뜻하는 말이며 그 내용은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다. …현 상태에서의 안주와 좌절을 거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뜨거운 윤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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