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정말 괜찮은 것일까. “그냥 가자니 찜찜하고, 바꾸자니 애매하다”는 한 축구계 관계자의 말 그대로다. 변화 없이 현 체제로 가자니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걱정도 앞선다. 그렇다고 새로운 감독으로 바꾸기엔 시점이 적절치 않아 보이고 마땅한 대체 카드도 없다. 어쩔 수 없이 ‘현상 유지’로 가긴 가야 하는데 영 마뜩지가 않다.
한국 축구대표팀을 지휘하는 울리 슈틸리케(63) 감독 이야기다. 슈틸리케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3월 28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A조) 시리아와 7차전에서 홍정호(장쑤 쑤닝)의 결승골을 앞세워 1-0 승리를 거두며 벼랑 끝에서 한숨을 돌렸다.
4승1무2패를 기록하며 승점 13으로 1위 이란(5승2무·승점 17)에 이어 2위를 유지했다. 3위 우즈베키스탄(4승3패·승점 12)과는 승점 1 차이. A·B조로 나눠 최종예선을 진행하는 아시아에선 각 조 2위까지 월드컵 본선에 직행한다. 통산 10번째, 9회 연속 월드컵 본선을 노리는 한국으로선 적어도 현재 순위를 유지해야 안정적으로 1차 목표를 이룰 수 있다. 3위로 밀릴 경우 B조 3위와 플레이오프(PO)를 거쳐 북중미 4위와 한 차례 더 대륙 간 PO를 펼쳐야 한다.
2번의 ‘경질 고비’ 가까스로 넘긴 슈틸리케
앞으로 최종예선에서 남은 경기는 6월 13일 카타르전(원정), 8월 31일 이란전(홈), 9월 5일 우즈베키스탄전(원정) 등 세 경기뿐이다. 상황에 따라 3위로 밀릴 수 있는 가능성도 여전히 존재한다. 지난해 11월 15일 홈에서 열린 우즈베키스탄과 5차전을 앞두고 슈틸리케 감독은 ‘1차 경질 위기’를 맞았다.이전 최종예선 4경기에서 2승1무1패로 부진을 보였기에 우즈베키스탄전에서 패할 경우 3위로 밀릴 위기에 처했던 것. 사실상 비기기만 해도 슈틸리케 감독은 경질을 피할 수 없었다.
운명의 대결에서 대표팀은 어이없는 수비 실수로 선제점을 내줬지만 남태희(레크위야 SC)와 구자철(FC 아우크스부르크)의 연속 득점으로 힘겨운 역전승을 거뒀고, 슈틸리케 감독은 살아남았다.
‘2차 경질 위기’를 넘긴 것은 바로 3월 28일 시리아전이었다. 대표팀은 앞선 23일 후난성 창사에서 열린 중국과 원정 6차전에서 무기력한 경기를 펼친 끝에 0-1로 맥없이 주저앉았다. 슈틸리케 감독에 대한 비난 여론은 거세졌고, 시리아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경질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시리아전은 득점상 1-0 승리였지만 내용상으론 무승부 아니, 1-2 또는 1-3 패배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경기였다. 그러나 힘겹게 승점 3을 챙기면서 슈틸리케 감독은 ‘2번째 사선’도 넘어섰다.
두 차례 경질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났지만 문제는 슈틸리케 감독에 대한 불신이 여전하다는 점이다. 특히 대표팀이 1차 목표를 달성해 본선 무대를 밟는다고 하더라도 ‘슈틸리케 체제’로는 러시아월드컵에서 16강 진출은커녕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결과가 빤하다는 시선이 많다. 슈틸리케 감독의 전술·전략이 너무 단조로운 데다 위기상황에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사 허룽스타디움에서 열린 중국과 6차전. 한국은 0-1로 패하며 A매치 32번째 만남에서 중국에 2번째 승리를 헌납했다. 결과도 참담하지만 더 안타까운 사실은 ‘변화 없는’ 대표팀의 모습이었다. 모두가 슈틸리케 감독의 전술·전략을 읽고 있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최종예선 들어 고집스럽게 집착하고 있는 4-2-3-1 포메이션을 또 한 번 구사했고, 원톱으로 누구나 ‘예상했던’ 이정협(부산 아이파크)을 내세웠다. 심지어 중국 기자들조차 “(슈틸리케 감독이) 어떤 선수를 활용할지, 어떤 포메이션을 쓸지 누구라도 알 수 있다”고 말했을 정도다.
이런 상태라면…본선 가도 빤하다
시리아전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황희찬(FC 레드불 잘츠부르크)을 처음 원톱으로 선발 출장시키는 등 비난 여론을 의식해 약간 변화를 줬지만 분위기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전에 이어 고명진(알 라이안)을 수비형 미드필더이자 한국 선수단의 키 플레이어인 기성용(스완지시티 AFC)의 파트너로 내세워 의미 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구나 후반 종반 황희찬 대신 이정협을 교체 투입하면서 슈틸리케 감독은 자신이 신뢰하는 선수만 고집하는 모습을 또 한 번 보여줬다.
슈틸리케 감독은 2014년 10월 취임한 이후 줄곧 ‘점유율 축구’를 강조해왔다. 공을 오래 소유하는 팀이 유리하게 경기를 끌고 갈 수 있다고 믿는다. 문제는 슈틸리케 감독의 점유율 축구가 경기 내용 및 결과와는 연관성이 없다는 데 있다. 대표팀은 중국전에서도 60%가 훌쩍 넘는 점유율을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패했다. 점유율이 높았던 것은 수비 진영에서 패스를 돌리는 횟수가 늘면서 공을 소유한 시간도 길어진 덕이다. 상대의 압박수비를 뚫는 해법을 마련하지 못한 채 공을 돌리기에 급급했다. 의미 없는 점유율 우위였다.
대표팀은 아시아권에선 거의 매 경기 공 점유율에서 우위를 점하지만, 전력 차가 크지 않은 팀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보다 강한 팀을 상대로는 점유율을 높이기 어렵다. 결국 낮은 점유율로도 효율적인 역습을 통해 득점하는 실용적인 축구가 필요하다. 본선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슈틸리케호’의 점유율 축구는 숫자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허상일 뿐이다.
더구나 지난해 9월 열린 중국과 최종예선 1차전을 앞두고 23명 엔트리보다 적은 선수를 선발해 ‘배려 엔트리’ 논란을 불러온 슈틸리케 감독은 이란과 4차전 졸전 이후 “우리에겐 소리아노 같은 공격수가 없다”는 설화(舌禍)를 자초하며 거센 비난을 받았다. 선수들의 믿음을 잃는 결정적 계기였다.
중국과 6차전이 끝난 뒤 기자들이 비판적 질문을 건네자 “중국이 스리톱을 가동하는 상황에서 내가 포백 이외 어떤 전술로 나갔어야 할지 묻고 싶다”고 말해 공분을 사기도 했다. “전술이 단조롭다”는 기자들의 이어지는 지적에는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되물어 질문을 던진 취재진을 당황케 했다.
현재 슈틸리케 감독은 선수는 물론 팬들의 신뢰도 잃은 지 오래다. 그렇다고 뾰족한 대체 카드를 내세우기도 애매하다. 한국 축구가 ‘슈틸리케 딜레마’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