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부산에 사는 A씨는 보험료 신용카드 납부 문제를 두고 보험사와 오랜 기간 언쟁을 벌였다. 13년째 거래 중인 KDB생명 측에 보험료를 카드로 납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지만 상담원으로부터 “카드 납부 서비스가 중단돼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KDB생명은 지난해 4월 보험료 카드 납부서비스를 축소하기 시작해 9월부터 전면 중단했다. A씨는 “구멍가게에서 1000원짜리 물건을 사도 카드로 결제하는 세상인데 수십만 원의 보험료를 카드사 가맹점을 해지하면서까지 받지 않는 건 고객의 선택권을 빼앗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반면 KDB생명 측은 “보험료 카드 납부 가능 여부는 금융감독원에서도 회사 자율에 맡기고 있다. 본사는 지난해 4월 변경한 카드 납부 정책 내용을 공식 홈페이지에 게재했고, 대상 고객에게는 문자메시지로 안내했다”고 밝혔다.
또한 카드 납부 중지 안내 문자메시지는 최근 6개월 이내에 신용카드를 1회 이상 납부한 고객에 한해 발송했기에 A씨는 통보 대상이 아니었다는 게 보험사 측 주장이다.
카드 수수료 관련해 금융당국은 뒷짐만
하지만 A씨는 이미 5년 전 고객센터를 통해 ‘카드 납부 서비스를 재개할 경우 안내문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A씨는 “고객센터에 직접 연락해 부탁했음에도 아무런 공지를 받지 못했다는 건 고객을 우롱한 행위 아닌가. 그럼에도 회사 측으로부터 ‘해당 직원의 개인적인 실수이며 회사 차원의 보상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불쾌해했다.
금전적 손해도 무시할 수 없다. A씨가 KDB생명 측에 가입한 보험 상품은 총 4개로 매달 보험료로 70만 원가량이 나간다. 지금까지 납부한 보험료를 계산해보면 5600만 원이 넘는 큰돈이다. 그렇기에 A씨는 그간의 보험료를 카드로 결제해 쌓았을 포인트 등을 생각하면 ‘손해 봤다’는 기분을 지우기 어렵다.
실제로 A씨가 소지한 ‘현대M카드’는 카드로 보험료를 납부하면 납부금액의 1%를 포인트로 적립해줄 뿐 아니라 월 카드 사용액이 30만 원 이상이면 7000원, 70만 원 이상이면 1만5000원 할인되는 혜택이 있다. A씨는 “2015년 9월 카드 납부 가능 고지를 제대로 받고 그때부터 20년 동안 신용카드로 보험료를 납부했다고 가정했을 때 포인트만 270만 원가량이 된다. 소비자가 왜 이런 혜택을 놓쳐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보험료 납부 방식이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현금이든 카드든 상관없이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택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업계 전반에서 보험료 카드 납부 거부 방침이 확대되고 있다. 생명보험협회 자료에 따르면 한화생명, 교보생명, ING생명 등 6개 생명보험사는 카드 가맹점 계약을 아예 맺지 않고 있다.
국내 1위 생명보험사 삼성생명의 경우 만기환급금이 없는 순수 보장성보험에 한해 그것도 삼성카드 결제만 허용하고 있다. 중소형 보험사도 카드 납부 중단에 합류하고 있다. 미래에셋생명은 지난해 8월 저축성보험의 카드 납부를 중단했고, 신한생명은 지난해 9월부터 텔레마케팅 또는 인터넷 전용 채널 고객에 한해서만 카드 납부를 허용하고 있다.
동부생명은 지난해 12월부터 신규 가입자를 대상으로 카드 납부를 중단했다. 손해보험사 중에는 현대해상화재보험과 KB손해보험이 지난 연말 신규 가입자의 저축성보험 카드 납부를 중단해 보장성보험만 카드 결제가 가능하다.
이처럼 보험사들이 카드를 결제 수단에서 제외한 가장 큰 이유는 카드 수수료 때문이다. 저축성보험은 고객이 보험료를 납부하면 보험사가 이를 운용해 다시 돌려줘야 한다. 그런데 최근 저금리 기조가 길어지면서 운용 수익률이 낮아졌다는 게 보험사 측 주장이다. 수익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 납부 보험료의 평균 2.2%에 달하는 카드 수수료가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것.
보험업계 한 관계자는 “카드사에 수수료를 낮춰달라고 했지만 불황을 이유로 거절당해 우리로서도 별 도리가 없다. 이 상황에서 만약 카드 납부를 허용하면 수수료만 높아져 보험료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역마진 현상까지 생길 수 있어 오히려 피해가 소비자에게 전가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 역시 보험료 카드 납부는 보험사와 카드사 간 개별 계약이어서 강제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2015년 일부 보험사가 명확한 기준 없이 카드 납부를 임의로 거절하는 문제가 있어 지난해 7월부터 그 기준을 손해보험협회와 생명보험협회 홈페이지에 정확히 공시토록 했다.
다만 보험료 카드 납부 허용 범위는 보험사와 카드사 간 계약 문제라 당국이 강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보험료 카드 납부 공론화 필요
이러한 상황이라 현재 보험소비자의 보험료 카드 납부 비중은 매우 미미하다. 생명보험의 경우 2회 이후 보험료 납부 시 카드 결제 비율은 지난해 1~9월 누적 기준 전체의 2.9%에 불과했다. 특히 삼성·교보·한화·NH농협생명 등 대형사의 카드 납부 비중은 1%대 미만에 그쳤다.‘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이긴 하나, 결과적으로 카드 납부 이용률이 저조하다 보니 카드사 역시 보험사와 가맹 체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보험료 카드 납부는 회사 수익 면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역시 손해를 보면서까지 보험사 수수료율을 낮출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보험료 카드 납부 거절은 소비자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라는 목소리가 높다. 금융정의연대 한 관계자는 “보험사가 카드 납부를 불허하는 것은 신용카드 이용자를 차별할 수 없도록 한 여신금융전문업법 제19조 1항을 위반한 것이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일부 보험사는 카드사와 가맹계약을 전부 또는 일부 해지하는 꼼수를 부리고 있다. 보험사의 주장처럼 수수료 부담이 과중하다면 금융당국이 합리적인 인하 방안을 도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험료 카드 납부에 대한 공론화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은 “보험료 카드 납부와 관련해 상당수 소비자가 둔감하게 반응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보험료를 카드로 납부하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영세 상인에게도 카드 수수료 부담을 지우면서 막대한 자본력을 지닌 보험사에게만 수수료 부담을 덜어준다는 차원에서 자사 자율에 맡긴다는 건 문제가 있다. 개선을 위한 조율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보험사가 보험상품 운용에 쏟아붓는 전체 사업비를 생각하면 과연 2%대의 카드 수수료가 회사 경영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좀 더 따져봐야 할 일이다. 현재 대부분 보험사는 보험설계사에게 도가 지나칠 정도의 높은 계약수수료를 지급하고 있다.
일부 보험사는 설계사에게 월초 보험료의 1000%까지 수당을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보험사가 고객 편익은 뒷전이고 영업 실적을 높이는 데만 급급한 사이 고객 신뢰도는 점점 더 추락한다는 사실을 보험사만 모르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