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세계에 속한 존재이지요. 다시 말해 인간은 선험적으로 결정된 존재가 아니고, 항상 열려 있고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에요. 정신과 몸으로 이루어진 인간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다고 봐요. 그것들은 찰흙처럼 엉켜 있어서 언제든지 리모델링될 수 있죠. (중략) 나 역시 철학과 예술 사이를 옮겨 다니며 둥지를 계속 만드는 과정 속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박이문 : 둥지를 향한 철학과 예술의 여정’ 중에서)
‘지성(知性)의 참모총장’ ‘철학 나그네’로 불리던 박이문은 진리를 향한 전방위적인 학문 탐구의 인생을 걸었다. 특히 그는 인생의 난제들에서 일어나는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고, 쉴 수 있는 존재가 돼야 한다는 이른바 ‘둥지의 철학’을 추구했다. 지적 탐구와 진리 체험에 목말라 하던 박이문은 현실로부터 탈주를 거듭했으며, 온갖 경계의 밖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추방했다.
그는 1930년 충남 아산의 유학자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6·25전쟁 시절 부산에 머물다 서울대 불문학과에 입학했고, 이어 석사 학위를 받아 이화여대 교수로 발탁됐다. 하지만 안정적인 교수직을 과감히 내려놓고 또 다른 지식 세계를 찾아 서른이 넘은 나이에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파리 소르본대에서 첫 한국인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이 때가 일생에서 가장 치열했고,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박사 논문은 난해하기로 악명 높았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 세계를 철학적으로 분석한 것이었다. 하스미 시게히코 전 일본 도쿄대 총장이 1966년 어느 날 파리 한 서점에서 이 논문을 발견하곤 “동양인도 이런 논문을 쓸 수 있고 저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박이문은 배움을 넓히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가 서던캘리포니아대(USC)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 미국 시먼스대 교수를 시작으로 이화여대·서울대 초청교수, 하버드대 교육대학원 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독일 마인츠대 객원교수, 일본국제기독교대 초빙교수, 포스텍 철학과 교수 등을 지냈다. 2006년 인촌상(인문사회문학 부문)을 수상했으며, 2010년에는 프랑스 정부 문화훈장(교육공로)을 받았다. 2012년에는 대한화학회가 제정한 ‘탄소문화상’ 제1회 수상자로 선정돼 대상을 받았다.
그는 “30대 이후의 삶이 전부 책 쓰고 공부하는 삶이었다”는 자평처럼 철학과 예술은 물론 미학, 시, 과학기술 분야까지 관심사를 넓히고 저술에도 열정을 쏟았다. 그 결과 ‘시와 과학’ ‘철학이란 무엇인가’ ‘나의 출가’ ‘둥지의 철학’ ‘눈에 덮인 찰스 강변’ 등 100권 넘는 저작을 남겼으며 지난해에는 박이문 인문학 전집(전 10권·미다스북스)이 출간됐다.
고인의 평전 ‘삶을 긍정하는 허무주의’를 쓴 사회학자 정수복은 그를 “일생 영달을 좇지 않고 학문의 독자성을 지키며 예술의 고유한 가치를 옹호한 철학자”라면서 “세상을 투명하게 인식하고, 뜨거운 마음을 잃지 않으며, 남과 더불어 착한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분”이라고 평했다.
2014년 7월 14일자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박이문은 “평생 노력했지만 인생의 궁극적 의미 같은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며 “각자 살아가면서 자기에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과는 다른 학문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본명 인희(仁熙)를 필명 이문(異汶)으로 바꾼 그는 인문학의 숲에서 지혜의 길을 뚜벅뚜벅 걸었다. 몸은 국립이천호국원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었지만, 영혼은 하늘에서 지식의 둥지를 틀고 있을 것이다.
졸기(卒記)
졸기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를 뜻하는 말로 ‘조선왕조실록’에도 당대 주요 인물이 숨지면 졸기를 실었다.